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53화 (252/313)

Chapter 253 - 양치질은 필수

-저는...!

-나는...!

남녀 주인공이 동시에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칫한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 안에 연심이 깃들어있는 게 보인다.

영화 초반부에 렌카가 말해주길, 이번에 유명한 감독이 최근 무척 증가한 스트리밍 이용자들을 위해서 만든 OTT 전용 로맨스 만화영화라는데... 재미있다.

렌카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영화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빠져든 것 같다.

아니, 빠져든 게 맞을까? 어쩌면 집중을 하는 척만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웃통을 깐 남자와 단둘이 호텔에 있다는 긴장감 때문에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이건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그러한 생각을 해본 나는, 은근슬쩍 렌카의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스윽.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으힉...”

TV에 눈을 두고 있던 렌카가 본능적인 신음을 토해냈던 것이다. 내 생각이 맞았다는 방증.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참아낸 나는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흐흠... 흠...”

이젠 대놓고 신경이 쓰인다는 듯한 기색을 드러내는 그녀. 그런 그녀의 지척까지 자리를 옮긴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어요?”

“.....”

“재미있냐고.”

“재, 재미있어... 근데 좀 떨어지지...?”

“왜.”

“왜가 아니라... 영화 봐야 하니까...”

“붙어서 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부, 붙으면 집중이 잘 안 돼서...”

“저번에도 영화관에서 잘만 봤잖아요.”

“그건 누구 기억이야...? 나한테는 영화관에서... 그...”

말끝을 흐리는데, 자신은 그때 키스한 기억밖에는 없다고 하려던 것 같다. 고작 이 정도에 수줍어하기는... 귀여워가지고.

“어쨌든 안 돼... 꺼져...”

이어지는 렌카의 욕에 실소를 터뜨린 나는 그녀가 베고 있는 베개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로의 옆머리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이에 화들짝 놀란 렌카가 다급히 내게서 떨어졌다.

“아 꺼지라고...!”

“냄새 좋네요.”

“뭐라는 거야...! 가라고...!”

“내가 그렇게 싫어요?”

“그, 그딴 질문 좀 그만해...! 싫은 게 아니라 다짜고짜 이러니까...”

“옆으로 와요.”

“싫어...”

“오라니까?”

“싫다니까...?”

“강제로 끌어당기기 전에 와.”

“강제로 한다고 하면 내가 겁... 흐아악!”

협박에 코웃음을 치던 렌카가 돌연 비명을 터뜨렸다. 내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불이 스르륵 내려가면서 보이는 적나라한 맨몸. 이를 본 렌카의 고개가 방 안에 들어왔을 당시 보였던 반응처럼 홱, 꺾이듯 돌아갔다.

“오, 옷 입어 이 미친놈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왜 부끄러워하고 난리에요?”

“오늘 한 번 봤어 이 무식한 새끼야...!”

“아닐 텐데? 기억을 잘 더듬어 봐요.”

“닥쳐! 넌 뭐가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건데...! 으익...!”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렌카의 위로 올라타자, 내 몸을 그대로 보게 되어버린 그녀가 소리쳤다.

“귤...!! 귤이라고 했어...!!”

다급하게 세이프 워드를 말하는 모습이 웃기다. 렌카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내가 말했다.

“그건 SM 플레이를 할 때만 쓸 수 있는 걸로 하죠.”

“애, 애초에 그런 플레이를 할 생각이 없는데 무슨... 앗...?”

내게 손목을 붙잡힌 렌카의 짤막한 탄성. 발버둥을 쳐보지만 힘의 차이가 워낙 커서 미수에만 그치고 있다.

나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욕지거리를 쏟아내는 렌카의 손목을 침대 위로 꾸우욱 누르며,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눈빛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 뜨거운 행위를 하기 직전처럼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가라앉은 공기. 그 사이를 뚫고 만화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로맨틱한 대사를 친다.

-아, 아사코 씨를 좋아해요...!

-나는... 나도 널 좋아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고백. 여자 또한 가감 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나와 렌카의 낯부끄러운 상황과 맞물려 그윽하면서도 풋풋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렌카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발악을 멈춘 채로 숨만 몰아쉬는 상태였다.

꽤나 길게 이어지는 대치상황. 등 뒤에 있는 TV에서부터 영화의 OST가 들려올 때쯤, 나는 렌카의 입술에 내 입술을 천천히 맞대려고 했다. 그때,

“기, 기다려...! 난 아직... 잠깐만...!”

렌카가 자신의 다리로 내 허벅지를 감싸더니, 몸에 진뜩 힘을 주어 옆으로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휘청거리는 내 몸. 그 틈을 타고 내게서 빠져나온 렌카가 침대에서 벗어나더니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뭐야 이건...?’

마운트를 훌륭하게 벗겨냈다. 감탄이 나올 정도. 검도 외에도 종합격투기를 배웠나? 어이가 없어진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말 좀 들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날 향한 렌카의 나무람. 그에 정신을 차린 내가 물었다.

“부장. 격투기 같은 거 배웠어요?”

“.... 중학생 때 잠깐...”

잠깐 배웠는데 그렇게 스무스하게 사람을 내칠 수 있는 건가? 격투기에 재능이 있나보다.

헌데 이런 기술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안 써먹고 있었나? 물론 지금 막 떠올랐을 수도 있겠지만... 은근히 여우같은 면이 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나는 침대에서 나와, 자신의 앞머리를 훅 불고 있는 렌카에게 접근했다.

“왜... 왜 또 오고 지랄이야...! 저리 가...!”

“예쁜 말 써요.”

“네가 험한 말이 나오게 만들잖아...! 그리고 옷 입어...”

뒷걸음질을 치며 벗어던진 티셔츠를 손가락질하는 렌카. 그녀의 팔을 붙잡은 내가 순간적으로 힘을 주자,

“흐앗...!”

놀란 신음을 토해낸 렌카의 몸이 내 품 안으로 깃털마냥 쏘옥 들어왔다. 그녀의 얇은 몸을 그대로 껴안은 내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벗어나볼래요?”

“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건 안 배웠어... 손 치워...”

“그럼 다행이고요.”

“다행...? 흣...!?”

의문을 표하던 렌카가 숨을 훅 들이켰다. 내 손이 그녀의 치마 밑을 더듬어서였다.

뒤쪽 허벅지를 만지작거림과 동시에 치맛자락까지 함께 걷어 올리는 손길. 그에 움찔한 렌카의 고개가 옆으로 살포시 돌아가면서, 자신들이 뭘 하는지 볼 수 있게끔 짓궂은 위치에 설치되어있는 거울로 향한다.

내 손이 자신의 다리를 주무를 때마다 작게 움찔거리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 팔뚝과 어깨, 그리고 가슴팍을 살피고 있다. 몸이 아주 마음에 드나보다.

방금까지 크게 반항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조신해진 태도. 마치 오랜 시간동안 혼자 있어 꿀꿀했다가, 돌아온 주인이 만져주니 금세 기분이 좋아진 고양이 같다.

허벅지를 타고 올라간 손이 렌카가 입고 있는 가디건 밑을 파고들어 상의에 닿자, 격하게 몸을 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이익...!”

그리고는 다소곳이 내렸던 손을 올리더니 내 가슴을 있는 힘껏 밀었다. 평소엔 이런 반항에도 끄덕없을 내가 잠깐 밀려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아까 날 뒤집어버린 것도 그렇고, 오늘의 렌카는 아주 셌다.

억지로 날 떨어뜨린 렌카의 얼굴엔 곤란한 기색이 상당했다.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준비가 아직 안 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다. 나와의 낯뜨거운 시간 전에.

“스, 스낵바에서 팝콘 가져올게...!”

렌카의 머릿속을 파악해보려고 하던 찰나, 그녀가 자신의 핸드백을 집어 들더니 슬리퍼 째로 방에서 나갔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그녀의 신형. 쾅! 하고 닫힌 문을 바라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도망가려는 건가? 아니, 신발을 갈아 신지 않았고 자신의 휴대폰까지 침대에 그대로 있다. 핸드백까지 챙길 여력이 있었으니 도망치려고 했다면 저 두 가지도 갖고 갔을 테고, 자신이 갈 장소를 구체적으로 말하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잠깐 바람이라도 쐬려는 건가? 모르겠다. 가만 보면 렌카는 치나미보다도 더 엉뚱하다는 말이지.

‘뭐야 대체...?’

머리를 긁적인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우리 노예는 꼭 주인의 손이 가게 만들어요. 이 보답은 무조건 받아내고 말리라.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기다려봐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렌카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진짜 집으로 가버린 걸까? 아니면 스낵바의 팝콘을 튀기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나? 이도 아니라면 누군가 렌카에게 찝쩍거리고 있나?

슬슬 불안한 마음이 피어올랐기에, 나는 티셔츠를 입고 렌카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그 무렵, 방 문에서부터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문 열어...

창피함이 깃들어있는 렌카의 목소리였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목소리였는데, 복도라서 일부러 언성을 낮춘 것 같았다.

문을 여니 양손에 팝콘과 음료수, 그리고 과자를 한아름 안고 있는 렌카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괘씸하다. 주인을 걱정시키게 하는 노예라니...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내가 물었다.

“뭐하다 왔는데?”

“팝콘 갖고 온다고 했잖아... 비켜...”

어깨로 조심스럽게 날 밀치며 침대로 향하는 렌카에게서는 시원한 느낌이 일었다. 마치 찬물세수를 한 직후의 사람에게서나 풍길 법한... 그런 느낌이었다.

뭔가 싶었던 나는, 처음엔 없었던 민트 향이 아주 미세하게 풍기자 눈썹을 꿈틀했다. 이건 일반적인 민트 사탕의 냄새가 아니라, 치약 냄새였다.

“아...”

나는 그제야 렌카가 문을 박차고 나간 이유를 알아차렸다. 양치 때문이었다. 아까 나와 키스를 하게 되기 직전까지 오자 자신이 이를 닦지 않았다는 걸 상기한 모양이었다. 핸드백을 갖고 나간 이유는, 그 안에 칫솔과 치약 세트가 있어서였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호텔에 오기 전까지 양치를 할 틈 같은 건 없긴 했지. 절로 웃음이 나온다. 렌카는 귀여움의 화신 같은 게 아닐까? 벌을 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저런 짓을 하는데 용서해줘야 마땅하다. 이번만큼은 면죄부를 줘야겠다.

“아는 뭔 아야...? 얼빵하게 쪼개지 말고 와서 영화나 봐...!”

침대 옆 탁상에 먹거리들을 올려놓은 렌카의 타박. 재차 티셔츠를 벗은 내가 욕실로 발을 움직이자, 두 눈을 끔벅거린 렌카가 물었다.

“어디 가...?”

깔끔을 떠는데 나 또한 그에 맞게 행동해줘야 옳은 거지.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킨 내가 대답했다.

“양치질하려고요.”

“으힛...!?”

그러자 요상한 추임새를 넣은 렌카의 어깨가 크게 달싹였다.

“주, 죽어!!”

뒤이어 이어지는 진심이 담긴 욕설. 그저 양치만 하겠다고 했는데 제 스스로 찔려선 씩씩대는 게 왜 이렇게도 웃길까. 렌카의 반응에 큽! 하는 실소를 터뜨린 나는, 눈을 부릅뜬 채로 날 노려보는 그녀에게 히죽 웃어보였다.

“그래요.”

지금부터 네가 무슨 욕을 하든 다 받아주마. 대신 나도 받아갈 거다. 첫 경험이면 공평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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