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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58화 (257/313)

Chapter 258 - 무너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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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

수면 아래에서 내뱉는, 진폭이 약해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욕조에 가득 찬 물속에 얼굴을 담근 채 몇 번이고 소리를 지르던 렌카는, 그럼에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자 고개를 홱 들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뚝뚝 떨어지는 물기. 앞머리와 옆머리를 대충 정리한 그녀가 후끈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마구 닦아내었다.

‘돌아버리겠네...’

창피함, 부끄러움, 분노 같은 기쁨... 온갖 복합적인 감정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

마츠다와 첫 관계를 가졌다. 이것이 주는 임팩트가 너무나도 커서, 지금도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손이 자신의 은밀한 장소를 마음껏 만지도록 뒀다. 그뿐이랴? 심지어는 몹시 천박하게, 허리를 튕기면서 침대보를 조수로 흠뻑 적시기까지 했다.

관계를 갖던 중간중간에는 왜 스스로 나서서 키스를 했는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다.

다른 상스러운 일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관계가 끝난 후 마츠다가 뭐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샤워는 했었나? 되짚어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안개라도 낀 듯 뿌옇다. 아마 호텔에서 일어나자마자 정신없이 돌아와서 그런가보다.

양치만 간단하게 하고 마츠다의 차를 타고 온 건 기억이 난다. 묵묵히 운전을 하는 마츠다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것도. 관계를 가진 것도 모자라 외박까지 해버리다니... 어이가 없다.

“하아...”

복잡한 한숨을 내쉰 렌카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머릿속을 맴도는 안개가 걷히면서, 어제 일어났던 일의 일부 장면이 그려진다.

마츠다의 길고 두꺼운 그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허여멀건한 점액. 그것이 피부에 묻었던 감촉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굉장히 뜨거웠던 것 같다. 마츠다의 성격을 나타내듯 말이다.

마츠다가 자신의 아래를 만져준 후, 서로 마무리 키스를 했던 것도 떠오른다. 입 안으로 침입하는 촉촉한 혀를 받아들이다가, 몸을 파르르 떨며 또 절정을 맞이했었다.

“흐아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어진다. 혼자 있는데도 이런데 카페에서 마츠다를 마주치게 되면 어떠할지... 오늘은 휴일에다, 내일은 자신보다 하루 덜 일하는 마츠다가 없어 혼자 일하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다행인 게 맞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충격... 아니, 여운은 오래 갈 거라는 점이다. 오늘 집에서 푹 쉬며 마음을 잘 다스려보자. 그리 생각한 렌카가 자신의 안쪽 허벅다리를 만졌다.

첫 관계는 아프다고들 하던데... 의외로 아래가 괜찮다. 약간의 불편한 감각은 있었다. 그러나 통증은 없다. 마츠다가 잘 풀어준 덕분인가?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나저나 치나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반응은 고사하고 자신이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나 있을까?

‘거절했었어야하는 건데...’

뭐에 씐 사람마냥 호텔에 가버리다니... 이게 다 마츠다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그냥 마츠다 탓이라고 생각하자. 이러면 꼴 보기 싫은 그에게 한 방 먹인 기분도 드니까 마음이 조금은 진정된다.

자신밖에 모르는 아주 소심한 복수를 한 렌카는, 샤워를 마친 뒤 젖은 머리를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살펴보았다.

메시지 어플 우측 상단에 알림이 와있다. 마츠다인가보다. 또 자신을 놀리려고 연락을 한 걸까? 이참에 욕을 한바가지 끼얹어줘야겠다.

괜히 콩닥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어플을 킨 렌카는,

[뭐해? 너 알바한다며?]

기대하던 마츠다의 톡이 아닌, 같은 반 이성친구의 톡이 와있자 눈썹을 구겼다. 왜인지 모르게 서운하다. 짜증도 나고, 부글부글 끓어오르기까지 한다. 친구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마츠다에게 화가 난다.

자신은 이렇게나 싱숭생숭한 채로 있는데, 괜찮다는 연락조차 하지 않다니... 이제 볼 건 다 봤다는 건가? 태워다줬으니 오늘은 끝이라 이건가? 참으로 이기적인 놈이 아닐 수 없다. 지금쯤 그냥 속편하게 누워 퍼질러 자고 있겠지?

성질이 난다, 성질이 나. 마음만 같아선 마츠다의 얼굴에 펀치를 날려주고 싶다. 남은 한 개의 소원권을 써서 다섯 대만 맞아주라고 해볼까 싶다.

친구의 톡이 온 시간은 어제 저녁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휴대폰을 보지도 않았구나. 매일 밤마다 신작 애니메이션의 정보를 찾는 게 일과인데, 그걸 빼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밀린 일과를 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툭.

다소 화난 손짓으로 휴대폰을 베개 옆에 휙 던진 렌카는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으니, 온갖 낯간지러운 기억들이 떠오른다. 동시에 마츠다의 흉악스런 그것이 자신의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드는 듯하다.

자꾸 야한 상상만 하는 자신이 웃기기도 하지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다. 여운에 잠기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마츠다에게 직접 연락을 하면 없어 보일 것 같으니까, 달려라 이노쨩의 힘을 빌려 MK에게 쪽지를 남겨볼까? 아니다. 그렇게 하면 괜히 자신이 마츠다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여서 자존심이 상한다.

“하...”

혼자 이러고 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이 마구 솟아나기도 한다. 가슴을 두드린 렌카가 뭐라도 먹으려 상체를 일으키려 할 때쯤,

우웅-!

던져놓은 휴대폰에서부터 진동이 울렸다. 화면 상단에 적혀있는 [쓰레기]라는 앞 글자. 이그것을 본 렌카는, 몇 차례나 헛기침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신호음이 네 번 정도 지날 때쯤 전화를 받았다. 이후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못 참겠어서.

“뭐?”

-괜찮죠?

대체 이 근본도 없는 맥락은 무엇이지? 뭘 못 참겠다는 거고, 뭐가 괜찮냐는 걸까? 어리둥절해하던 렌카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떠한 장면이 재생되자 흠칫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자신에게 전화하겠다는 마츠다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었던 게 순간적으로 확 떠오른다. 분명히 그런 말을 했었다. 왜 지금에서야 기억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그래서 저런 황당한 대화의 흐름이 튀어나온 거구나. 마츠다에게 욕을 했던 게 미안해지는... 건 아니고, 그냥 멋쩍기만 하다.

-여보세요? 부장?

이어지는 마츠다의 재촉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렌카가 대답했다.

“전화하지 말랬는데 왜 해.”

-못 참겠다고 했잖아.

“쓰레기 같은 새끼.”

-욕 레퍼토리를 좀 바꿔볼 생각은 없어요?

“닥쳐...! 너, 너 때문에 한정판 피규어 예약판매 기간을 놓쳤어.”

한정판 피규어 예약판매 기간? 갑자기 왜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하다.

-그게 왜 나 때문인데요?

“어제 저녁이 예약판매 시간이어서...”

-저녁 몇 시?

“.... 6시쯤?”

-그땐 우리가 하기 전 아닌가?

렌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츠다가 대놓고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엄청난 부끄러움이 찾아왔기 때문. 침까지 꼴깍 삼킨 그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마츠다를 나무랐다.

“네가 정신없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내 탓이니까 책임져라?

“그, 그건 아니고...”

-아니에요. 책임질게요. 모레 사탕 두 개 주면 되죠?

그 말에 렌카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두 개...? 오늘 것, 내일 것, 그리고 모레 것까지 총 세 개를 줘야 맞는 거 아니야?”

-이빨 썩을까봐 걱정돼서 하나 줄인 거예요. 그나저나 부장이 그렇게나 제 사탕을 원하는지 몰랐네요.

“그게 아니라...! 수학을 못하는 널 놀리는 거잖아...!”

-그런 거였어요?

“이해력도 달리네... 기말고사는 컨닝해서 10등한 거지?”

-그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네요. 제 노력을 부정하는 발언이었어요.

“그, 그냥 넘어갈 수 없으면 어쩔 건데?”

-지금 말하기엔 조금 그렇고, 모레 알려줄게요.

뭔가... 아주 야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게 짜증으로 인한 건지, 아니면 설렘으로 인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어떠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는데 애써 모르는 척 하는 것일지도.

“마, 만약 그러면 죽일 거야...”

-그래요. 지금 뭐하고 있었어요?

“누워있는데...”

-나돈데.

“어쩌라고...?”

-영상통화 할까요?

“싫어.”

-왜?

“내가 왜 오늘까지 네 못생긴 면상을 봐야 하는 건데...?”

-못생겼다는 말은 처음 듣네요. 충격적이에요.

“네가 충격을 먹었다니 다행이네.”

-자꾸 기어오를 거예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나보다 나이도 어린 놈이 왜 이렇게 까불어대...!”

-고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한 살이라도 난 네 선배라고...!”

-대우는 착실하게 해주고 있잖아요.

렌카의 코에서 기가 찬 듯한 바람이 새어나왔다. 선배대우를 착실하게 해주고 있다? 웃기는 소리. 마츠다는 사이코가 분명하다.

-왜 비웃어요?

“안 비웃었는데?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니까 찔리나보네?”

-또 까부네.

“불만 있어?”

-아니에요. 보기 좋네요.

평소의 마츠다였다면 자신이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슬슬 불만이 생기려고 한다거나 혼을 내주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얌전했다. 아무래도 첫 경험이 끝난 자신의 마음을 생각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말투가 싸가지 없는 건 여전하지만 그건 자신이 먼저 퉁명스럽게 굴었으니까 넘어가고, 어제도 마츠다답지 않게 친절하긴 했다. 마츠다의 저런 모습도 나쁘지는 않구나. 하지만 자연스럽지는 않다.

왠지 마츠다는 이기적이고 강압적인 게 디폴트여야 어울린다. 삐뚤어진 미소를 지은 채로 뺀질거리는 게 본모습이라 그게 더 좋은데... 예전에는 그 모습에 질색을 했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뭔가 심심한 느낌이다.

마츠다의 당당하고 뻔뻔한 모습을 되새겨보던 렌카가 돌연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안 돼...!’

내심 마츠다의 태도를 좋게 평가해버렸다. 조교라도 당한 사람마냥 말이다. 이러면 자신이 MK가 추천해주었던 조교물의 여주인공과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절대 마츠다의 마수에 넘어가지 말자. 육체는 이미 무너져버렸지만 정신은 다르다. 꿋꿋하게 버티고 버티는 거다.

눈을 부릅뜨며 결의를 다진 렌카가 말했다.

“이만 끊어. 나 쉬고 싶어.”

-5분만 더 통화해요.

“.....”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마츠다의 목소리 톤. 그것을 들은 렌카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녹아내렸다.

“5분...?”

-예. 5분요. 괜찮죠?

아까 했던 다짐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린다. 생각해보면 매번 그랬다. 마츠다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뜻을 굳게 세워도, 그가 뭘 할 때 항상 알아서 무릎을 굽힌다.

마치 어른의 눈치를 보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정신연령은 어려도 한참 어린 게 아닐까? 그러한 생각을 해본 렌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딱 5분만 하고 바로 끊는다?”

-5분이 돼도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그 주제가 끝날 때까지는 통화해야죠. 그래야 맞는 거예요.

웃기는 소리다. 자신과의 통화가 무슨 노래방 서비스 시간 같은 건 줄 아나?

“그건 기각이야.”

-왜 부장이 판결을 내려요? 노예면서.

“자꾸 노예 노예 거리지 마. 짜증나니까.”

-그래요. 허벅지는 괜찮아요? 아픈 데는 없어?

“읏...!”

자신의 상태를 묻는 마츠다의 말에 움찔한 렌카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5분이 무척이나 길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그녀는, 이상하게 짜릿해지는 자신의 몸을 진정시키며 어떻게 화제를 돌려야 자연스러울지 고민하다가,

“으스대지 마...!”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매번 그랬던 것처럼 마츠다에게 틱틱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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