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59화 (258/313)

Chapter 259 - 열등한 테츠야 군

“.... 츠다 군.”

귓가에 들려오는 흐릿한 목소리. 세상 모른 채 자고 있던 나는 그 상냥한 음색에 눈을 떴다.

“마츠다 군, 일어나.”

미유키가 못 말리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롱 데님 스커트 안으로 쏙 집어넣은 흰 티셔츠, 그리고 그 위를 덮은 검은색 가디건을 입은 그녀를 보니 눈이 호강하는 느낌이다. 굉장히 잘 어울리는 코디다. 청순한 미유키의 이미지와 딱 알맞다.

“아홉 시 넘었어. 이제 일어나야 돼.”

다정한 목소리에 눈을 비빈 내가 힘없이 말했다.

“아홉 시밖에 안 됐는데 더 자게 둬라...”

“안 돼. 얼른 일어나.”

미유키의 다정한 성화에 대답하지 않은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러자 미유키가 이불을 옆으로 홱 걷어내더니, 내 한쪽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허나 힘이 달려 바닥에 착 달라붙은 나를 일으켜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 힘주는 거야...?”

낑낑거리고 있던 미유키의 황당함이 깃들어있는 물음. 늘어진 척을 하며 온몸에 힘을 빡 주고 있던 내가 대답했다.

“아니.”

“거짓말하지 마. 팔이 딱딱해졌는데 뭐가 아니야...!”

“아니라니까.”

“자꾸 이렇게 게으른 사람처럼 굴면... 으앗!?”

투덜거리던 미유키가 돌연 짤막한 비명을 터뜨리더니 균형을 잃었다. 내가 역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잡아당겼기 때문. 훅 불면 날아가는 솜사탕마냥 내 위로 엎어져버린 미유키. 자두 향을 풀풀 풍기는 그녀의 몸을 팔다리로 감싸 안은 내가 말했다.

“잠깐만 이렇게 있자.”

“.... 그럼 가디건만 벗을 테니까 일단 놔.”

“싫은데.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

“아 빨리... 먼지 묻으면 안 된단 말이야...”

“내가 벗겨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그럼.”

“.....”

“가디건만 벗으면 되지?”

“일단은 그렇긴 한데...”

“알았다.”

사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미유키의 몸에서 떨어져나가기 시작한 가디건. 행여나 미유키가 도망갈 새라 조심조심 가디건을 벗긴 나는, 그것을 다다미 위에 내려놓고 재차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정수리 위에 턱을 괴고 물었다.

“근데 안 춥냐? 이러고 어떻게 왔대?”

“옷장에 패딩 넣어놨는데...”

“언제?”

“방금.”

“나 자고 있는 사이에?”

“응. 근데 머리 아프니까 턱 치워줄래?”

“싫다.”

미유키를 놀리듯 로봇 같은 말투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자, 꿍얼거린 그녀가 내 가슴팍에 입을 대더니 바람을 후욱 불어넣었다.

심장이 후끈해지는 느낌이 퍽 나쁘지 않다. 투정 같은 애교를 부리는 미유키의 온몸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그녀에게 렌카와의 관계를 어찌 설명해야할지 고민해보았다.

미리 언질을 줬었어야 했던 건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망설이느라 시간을 허비했고, 렌카와 관계를 가질 타이밍이 나오자 그대로 호텔에 갔다. 내 실책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그냥 미유키 몰래 관계를 갖고 있다가, 히요리까지 공략한 후 한 방에 터뜨려야 하나? 아니, 그래버리면 미유키가 받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커진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기로 했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좋지 않은 머리로 뭘 해결하려고 하니 뇌세포가 하나하나씩 파괴되는 기분이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참아낸 내가 미유키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이후 고개를 든 미유키를 향해 말했다.

“오늘 뭐할 거냐?”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야? 공부하기로 했잖아.”

“그래... 알았다.”

자포자기한 채로 힘 빠진 표정을 짓자, 키득거린 미유키가 내 갈비뼈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내가 전혀 반응을 보여주지 않자 이내 흥미를 잃고는 품에 꼬옥 안겼다.

“근데 어디서 공부하게? 미우라네 집에서 한다고 했었나?”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여기로 바꿨어.”

“여기? 왜 네 마음대로 장소를 바꾸냐?”

“우리 둘 다 그렇게 하자고 합의했었잖아.”

“언제?”

“사흘 전 밤에 물어봤었는데 기억 안 나?”

미유키의 표정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아마 잠에 들려고 할 때 언질을 줬고, 그에 내가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내가 엉겁결에 대답을 하도록 유도를 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본다. 똑똑하고 영악한 미유키가 일부러 이런 그림을 그렸을 거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아.

“미우라랑 같이?”

“응. 테츠야 군이랑 같이.”

테츠야 같은 찌꺼기가 또 우리 집에 온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넘어가야겠다. 미유키의 바람을 거절할 수는 없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와 테츠야는 친한 소꿉친구니까.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목덜미를 쓰다듬은 내가 물었다.

“미우라는 언제 온다는데?”

“오후 1시에 온대.”

“그럼 4시간 정도 남았네? 잠깐 나가서 밥 먹고 올까?”

“응. 거기 가자.”

“거기 어디.”

“거기. 라멘집.”

미유키와 내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곳을 말함이었다. 오늘 하늘이 평범했다면 미유키는 그곳에 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먼저 언급을 하는 걸 보니 밖에 비가 오려고 하는가보다.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바라본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긴 새벽에 가자. 그때 가야 분위기가 좋아.”

“그런가...? 그럼 어디 가지? 그냥 여기서 해먹을까?”

“일단 한 시간만 있다가 다시 생각해보든가 해.”

“왜 하필 한 시간이야? 설마 또 자려구?”

“아니.”

“그럼 왜... 응...?”

의아해하던 미유키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자신의 가랑이 아래에 깔려있는 내 하반신에서, 무언가가 점점 단단해지는 감각을 느낀 모양이었다.

금세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녀가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하는 모습을 본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렇게 됐는데 어떡하냐?”

“.... 뭘 어떡해... 스스로 가라앉혀야지...”

“스스로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럼 뭐 어떡하려구...”

다 알면서 물어보는 게 능글맞다. 킥킥거린 나는 미유키의 스커트 안으로 들어간 티셔츠를 빼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점점 몸에 힘을 빼는 그녀와 자리를 바꾸었다.

**

끼이익...

“안녕, 마츠다.”

대문을 열자마자, 테츠야의 어수룩한 면상이 날 반긴다. 토악질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놈에게 들어오라며 턱짓을 했다. 그러자 띨빵하게 쪼갠 테츠야가 대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실례할게. 근데 여긴 그대로네. 방학 때랑 달라진 게 거의 없는 것 같아.”

달라진 게 없긴 왜 없어. 관리를 안 하던 화단이 잘 정돈되어있는 것부터 차이가 나는데.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 이때까지 미유키의 옆에 붙어있을 수 있는 거구나. 대단한 놈이다 정말.

“그러냐?”

“응. 근데 미유키는? 아까 문자해보니까 먼저 와있다던데.”

“안에 있어.”

“그래?”

“어.”

그러려니 하며 나와 집 안으로 들어간 테츠야는, 때마침 욕실에서 나오는 미유키와 마주쳤다. 사이즈가 몹시 큰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그녀를 보고는 벙 찌는 테츠야. 그런 놈을 본 미유키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테츠야 군.”

외간남자의 집에서 샤워까지 하고,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미유키의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을까? 눈을 끔벅이던 테츠야가 어색하게 한손을 들어보였다.

“아, 그... 안녕, 미유키.”

“밥은 먹고 왔지?”

“응. 먹고 오라길래 먹었는데...”

“잘했어. 얼른 앉아서 책 펴. 바로 시작할 거야.”

“그래... 그, 근데 지금 샤워한 거야?”

“했어. 왜?”

“아냐...”

놈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있었다. 딱 보니 자신의 집에 놀러왔을 땐 샤워조차 안 했었는데, 내 집에서는 거부감 없이 씻어서 마음이 찝찝한 것 같았다. 자신이 오기 30분 전까지 물고 빨고 하던 걸 알면 기절이라도 하려나 싶다.

“옷이 좀 크네...?”

이어지는 테츠야의 말에, 자신이 입고 있는 티셔츠를 본 미유키가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아 이거...? 마츠다 군 거야.”

“마, 마츠다 거라고...?”

“응.”

미유키는 딱히 나와의 관계를 숨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발을 빼는 면이 있었지만 점차 나아지다가, 수학여행을 기점으로 그게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당당하게 내 옷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도 그 심경변화의 일환. 미유키가 이 정도까지 했는데, 슬슬 우리 사이를 눈치챌 때도 되지 않았니? 이상한 점은 계속 느끼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좀 알아차리라고.

아니, 어쩌면 테츠야는 내가 미유키랑 만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럴 놈이다. 테츠야라는 인간은.

솔직히 테츠야가 미유키의 옆에 붙어있다 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날 더욱 부각시키는 장치로 쓸 수 있는데, 오히려 좋기까지 하다.

제 집인 양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고, 탁상에 앉아 책을 편 미유키가 자신의 양옆을 툭툭 쳤다.

“둘 다 앉아.”

그러자 테츠야가 머뭇머뭇 다가오더니 미유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반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나는, 테츠야가 미유키 몰래 코를 킁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미유키가 자주 쓰는 샴푸와 똑같은, 달콤한 자두 향을 맡았구나.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난 네가 시종일관 찌질한 태도를 고수해서 좋다. 끙끙 앓다가 열등감이 확 터져서 미유키에게 못할 말이라도 하면, 그때가 너희 사이가 끝나는 날이다. 그리고 지금 네 똥 씹은 면상을 보니, 그 날이 머지않았다고 느낀다.

미유키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가며 테츠야의 신경을 건드린 내가 물었다.

“오늘 과목은 뭔데?”

“수학이랑 영어.”

“수학은 빼면 안 되냐? 저번에도 했었잖아.”

“수학은 제일 중요한 과목이야. 절대 안 돼.”

“공부에 흥미가 생기도록 유도해야지, 강제로 시키면 반발심만 생겨.”

“흥미를 유도할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하지 않아? 앓는 소리해도 소용 없으니까 얼른 책 펴.”

우리 미유키는 공부에 관해서만큼은 타협이 없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내 밑에서 부끄럼이 가득 묻어나오는 투로 앙앙거려놓고선... 지금은 독재자가 따로 없을 정도로 냉정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결혼하면 더 심해지려나? 아마 그럴 것 같다. 그리 생각한 나는 얌전히 책을 폈고, 멘탈이 살짝 나가버린 듯한 테츠야와 함께 미유키의 수업을 들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