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60화 (259/313)

Chapter 260 - 노예의 징표

“하... 지친다.”

다다미 위에 벌러덩 누워 한숨을 쉬는 나, 그리고 양팔을 위로 뻗으면서 살짝 올라간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내 배를 검지로 콕콕 찌르는 미유키.

정말 풋내가 풀풀 풍기는 장면이다. 옆에 테츠야만 없었다면 만족감이 아주 컸을 테지.

“수고했어.”

이젠 내 배를 토닥이며 통통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미유키의 말.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상체를 일으킨 나는, 탁상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 테츠야를 보았다.

나와 미유키의 꽁냥꽁냥한 스킨십을 보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건지, 아니면 진짜 공부에 집중하느라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테츠야의 음험한 모습을 생각해보면 전자일 것 같긴 한데, 내가 알 바는 아니지.

“테츠야 군.”

“.....”

“테츠야 군, 혹시 모르는 부분이라도 있어?”

미유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테츠야가 특유의 얼빵한 미소를 지었다.

“아냐. 공식 외우는데 집중하고 있었어.”

“되게 기특하네? 다 외웠어?”

“응. 일단은. 시험해봐도 좋아.”

“아냐. 난 테츠야 군을 믿으니까 테스트 같은 건 안 할게. 다음 공부는 테츠야 군네 집에서 할까? 혹시 아주머니한테 말씀 한 번 드려볼 수 있어?”

“어...? 우리 집...?”

“응. 저번에는 우리 집에서 했고, 이번엔 마츠다 군네 집에서 했으니까 다음번엔 테츠야 군의 집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나야 상관없지만... 알았어.”

테츠야의 시선이 날 슬쩍 흘기다가 말았다. 내가 낯선 집에서 눈치를 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내 생각을 해줘서 고마워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다른 건 다 떠나서, 테츠야의 어머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저번에 미유키의 동네를 벗어나면서 봤던 그 건강미 넘치는 여자가 테츠야의 가족일지. 이 두 가지가 궁금해서라도 꼭 가고 싶다.

“너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혹시 내가 부담을 주는 거라면...”

“부담이라니... 그런 거 전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어. 그러면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 다들 수고 많았고, 다음에 또 하자.”

손뼉을 치며 수업 종료를 알리는 미유키. 등 뒤로 손을 뻗어 편하게 앉아있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미유키가 자신의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는, 팔을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머리를 뒤로 넘기며 머리끈으로 묶기 시작했다.

“다 같이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실까?”

사이즈가 큰 반팔 소매 안으로, 미유키의 매끈한 겨드랑이가 보인다. 자고로 일부러 신경을 써서 야하게 입은 속옷보다는, 저런 일상적인 상태에서 나오는 은근한 섹스어필이 더욱 꼴리는 법이다. 물론 전자가 좋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후자보다는 자극이 덜했다.

아아... 아랫도리에 피가 몰린다. 당장 한판 하고 싶은데, 테츠야 이 새끼가 있어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쉽다.

지금도 이렇게나 짜증이 날 정도인데 커피라니... 그건 안 되지. 얼른 치워버리고 미유키랑 함께 샤워를 해서, 테츠야의 몸에서 새어나온 음산한 독기를 정화해야한다.

“빨리 쉬고 싶기만 한데. 머리가 가동범위를 넘었어.”

“나도... 오늘은 정신이 좀 지치네.”

의외로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테츠야. 놈 또한 나처럼 셋이서 커피를 마시는 게 싫은가보다. 미유키가 둘이서 가자고 했으면 냅다 알겠다고 했겠지.

“그래...? 모처럼 세 명이서 모였는데... 아쉽다. 그럼 나가자.”

“알았어.”

테츠야는 책가방을 다 싸놓고도 먼저 가겠다는 소린 하지 않고 있었다. 저래놓고 내 차는 타고 싶은 건가?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다. 아주 입체적인 놈이다. 부정적인 쪽으로.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아직 미유키가 테츠야를 소꿉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아량을 베풀어줘야지. 오늘 밤에 차 내부를 청소해야겠다고 다짐한 나는, 대충 외투를 걸쳐 입고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나와 빨리.”

그러자 미유키가 피식하더니 애정 어린 투로 물었다.

“그렇게 공부가 싫었어?”

공부가 싫은 게 아니라 미우라라는 인간 자체가 싫은 거지. 언젠가 네가 보는 앞에서 놈의 죽통을 갈기는 날이 올 텐데, 그땐 내 편을 들어주었으면 좋겠어. 라는 말을 참아낸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다음날, 렌카의 집 앞.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나는 오늘 렌카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지 기대하며, 그녀가 대문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힘없이, 그리고 천천히 열리면서, 열린 틈 사이로 렌카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게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곧 내 차를 발견하고는 흠칫하더니, 머뭇머뭇 밖으로 나왔다.

오늘 그녀가 입은 옷은 허벅지를 반쯤 덮은, 밝은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에 흰색 목폴라, 그리고 검은색 롱 부츠였다.

전체적으로 도도해보이지만 코트의 핏이 루즈한데다 아래쪽이 테니스 스커트처럼 주름이 져있어서, 귀여움 한 스푼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코트 단추를 모조리 여민 채로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렌카. 조수석 문을 연 그녀가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 앉더니 안전벨트를 맸다.

“안녕요.”

“.... 안녕.”

내가 먼저 말을 하니 그제야 내키지 않는 낯으로 인사를 받아주는 그녀가 귀엽다.

“잘 잤어요?”

“어.”

“치마는요?”

“하아... 난 네가 왜 자꾸 치마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입고 왔어?”

“입었어...! 입었으니까 좀 닥쳐...”

“확인해보게 코트 벗어봐요.”

“싫어...!”

첫 관계를 한 이후라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사납구나. 씩씩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탈의실에서 확인하는 걸로 할게요.”

“확인 같은 건 절대 안 시켜줄 거니까 괜히 기대하지 마.”

“어차피 유니폼 입으면 알아서 확인이 될 텐데?”

“.... 어제 혼자 일할 때, 바지 여벌 라커에 넣어놨어.”

우리 렌카는 준비성이 참 철저하구나. 오늘도 가버릴까봐 그런 거지? 이해한다. 아침부터 짜증나게 군다니 어쨌느니 하는 렌카의 투덜거림을 웃음으로 받아넘긴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혼자 일하느라 외롭진 않았어요?”

“전혀.”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뭐라는 거야... 전혀라고 했잖아. 외로움 같은 건 단 하나도 느끼지 않았으니까 착각하지 마.”

“오늘은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겠네요.”

“.... 그렇게 네 할 말만 하면 마음이 편해?”

“같이 열심히 해봐요.”

서로 다른 엉뚱한 대화를 하고 있음에 짜증이 솟구쳤을까? 훅 하는 콧바람을 내뱉은 렌카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입만 꾹 다물고 있든가. 계속 반응을 해주니까 내가 자꾸 장난을 칠 수밖에 없잖아.

벌써부터 톡톡 튀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카페에 도착해 출근도장을 찍었다. 이후 렌카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탈의실로 함께 들어갔다.

“아이 씨...! 뭐하는 짓이야...!?”

“아이 씨?”

“네가 세게 잡으니까...”

“별로 세게 잡지도 않았구만. 어쨌든 오늘 사탕은 약속대로 세 개에요. 근데...”

“.... 근데?”

버럭 화를 내려다 말고 귀를 쫑긋하는 모습이 웃기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린 나는, 렌카에게 사탕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지금은 하나만 줄 겁니다. 한꺼번에 다 먹으면 부장의 버릇이 나빠지고 이빨에 무리도 갈 테니까요. 일단 이거 먹고, 점심 이후에 또 하나 줄게요. 마지막 사탕은 저녁 먹고 줄 거고요.”

그 말에 렌카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애처럼 취급하지 말랬지 내가...! 그리고 저녁은 뭔 저녁이야...! 누가 너랑 저녁 먹는대?”

“안 먹을 거야?”

“안 먹지 당연히...! 먹을 이유도 없고, 오늘은 치나미도 오는데...”

“셋이서 먹자는 뜻이었는데?”

“싫어. 난 치나미랑 단둘이 먹을 거야.”

“그러면 스승님의 의중을 한 번 물어보죠.”

“웃기지 마...! 넌 치나미랑 미리 약속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딜 염치없게 끼려고 해?”

“약속했어요.”

“어제 치나미랑 통화했는데, 그런 얘긴 전혀 없었어.”

“뭐라고 했는데요?”

“그걸 내가 왜 너한테 말해야... 읏...!?”

바락바락 따지고 들던 렌카가 돌연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손을 뻗은 내가 그녀의 코트 단추를 하나하나씩 풀기 시작했기 때문.

“.....”

얼굴이 확 붉어진 채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내 손을 바라만 보고 있던 그녀는, 단추가 다 풀린 코트가 좌우로 벌어지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스커트가 드러나자 다리를 오므렸다.

“보, 보지 마...!”

보라고 가만히 있었으면서 보지 말라고 하기는. 콧방귀를 낀 나는 대놓고 렌카가 입은 치마를 살폈다.

좌우에 얕게 박음질이 되어있는 짙은 베이지색의 단정한 핀턱 스커트. 재질 때문에 걷어 올리기가 불편해보인다. 롱부츠와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라서, 일부러 내가 만지기 힘들도록 이 스커트를 선택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예쁜 치마네요. 마음에 듭니다.”

“네, 네 마음에 들라고 입은 거 아니야...”

“알아요. 근데 왜 스타킹은 안 신었어요? 내가 분명히 신고 오라고 한 것 같은데.”

“코디랑 안 어울리니까...!”

“제 명령보다 코디를 더 우선순위에 뒀다는 뜻이네요?”

“.... 그래서, 불만 있어...?”

“많죠. 그저께도 까불거렸고, 오늘도 제 말을 듣지 않았으니 벌을 내려야겠습니다.”

“버, 벌...?”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통보하듯 말한 나는, 당황해선 두 눈을 끔벅거리는 렌카를 놔두고 탈의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차로 돌아가, 글러브박스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소품을 꺼내 다시 돌아갔다.

“.... 뭔데...?”

내 손에 들린 검은색 포장지를 본 렌카의 불안한 목소리. 그녀의 앞에 선 나는, 말없이 포장지를 뜯어 물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렌카는, 내 손에 들린 그 물건을 보고 눈을 두 배는 더 크게 떴다.

“무, 뭐야 그건...?”

내가 갖고 온 것은 검은색 초커였다. 누가 봐도 목에 착용하도록 만든, 두께와 높이가 얇은 밋밋한 가죽벨트 형식의... 패션아이템이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BDSM 플레이용 목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디자인을 가진 물건이었다.

초커를 곧바로 알아보고 벙 찐 렌카의 눈앞에 그것을 들이민 내가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이거 착용하세요.”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