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2 - 돌아온 복타쿠 #2
“프헤에...”
참아왔던 숨을 몰아쉰 치나미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헤롱헤롱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은 모습. 치나미의 입주위에 살짝 번져있는 틴트를 엄지로 닦아낸 나는, 이번엔 그녀의 둔부를 마구마구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믓... 후, 후배니임... 일을 하셔야하는 것 아닐까요...?”
“괜찮습니다. 부장이 조금 봐줄 거예요.”
“그, 그래도... 렌카와 이야기가 된 건 아니잖아요... 저도 아이스티를 한 잔 마시고 싶군요... 비율 테스트가 필요해서...”
비율 테스트라니... 치나미답다.
“미리 만들어져있는 아이스티라서 비율 테스트는 못할 텐데요?”
“그러면 시음을 통해 어떤 브랜드의 가루로 만들었는지를 알아봐야겠네요...”
“그런 것도 알아요?”
“당연하지요... 앗...! 거긴 안 되는데에...”
엉덩이를 만지다 말고 그 아래쪽으로 넌지시 손을 내려 보내자, 까치발을 들어 다리에 힘을 빡 주는 치나미. 여전히 훌륭한 그녀의 허벅지 촉감을 느끼던 나는,
“후배님...! 그만...! 나중에 만지도록 하세요...! 여기는 바깥이에요...!”
치나미의 엄한 목소리를 듣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손을 뗐다.
“그럼 나중에... 둘이 있을 때 만지는 걸로 할게요.”
“네... 이만 들어가요...”
“알겠습니다. 주문은 아이스티로 하실 거죠?”
“네에...”
몹시 부끄러워하는 치나미와 함께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간 나는, 친구의 표정을 살핀 렌카가 날 죽일 듯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이, 자신의 뺨을 톡톡 건드리며 흥분감을 가라앉힌 치나미가 렌카에게 다가가더니, 그녀가 낀 초커를 가리켰다.
“친우님의 손목에 찬 그것은 무엇인가요...? 팔찌에요?”
그에 흠칫한 렌카가 입을 열려고 할 때, 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정의 징표입니다.”
“우정의 징표?”
“예. 저와 친해진 기념으로 준 선물이에요.”
“오호라...! 그렇군요...! 기대대로 두 분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아지신 것 같네요...!”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치나미. 그녀를 본 렌카가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딱히 뭐라고는 하지 않았다. 친구가 기뻐하고 있어 대놓고 부정하기가 껄끄러운 듯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치나미의 말에 기겁을 하며 그녀를 말렸다.
“저도 저 팔찌가 탐나는군요. 혹시 하나 더 있나요?”
“아, 안 돼...!”
그러자 치나미의 고개가 갸웃했다.
“므응? 독점을 원하시는 건가요?”
“독점 같은 건 관심도 없어...! 그게 아니라 이건... 그... 디자인이 좀...”
“디자인이 어때서요? 심플하고 좋은 걸요?”
“.....”
렌카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순수한 치나미에게 어찌 설명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왜 이렇게 웃길까. 킥킥거린 나는 치나미의 등을 살포시 토닥이며 렌카를 약 올렸다.
“저한테 처음 받은 특별한 선물이라서 소중히 여기나봅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이딴 건 당장에라도...”
그 말에 욱한 렌카가 초커를 풀려고 했지만, 치나미의 면전 앞인데다 내 눈치마저 보이는지 손을 멈칫했다.
“어허...! 친우님. 선물을 이딴 것이라고 부르면 어쩌시나요...!”
엄한 표정을 지은 치나미의 나무람. 입술을 잘근 깨문 렌카가 한 발 물러났다.
“미안... 진심은 아니었어.”
오늘 렌카가 큰 수난을 겪는구나. 재미있다. 병을 줬으니까 약도 줘야겠지. 그리 생각한 나는 렌카를 위해 화제를 돌렸다.
“자리에 앉아있으면 아이스티 만들어서 갖고 올게요.”
“앗, 좋아요. 어디 앉을까요?”
“편하신데 앉으세요.”
“그렇다면 친우님과 후배님께서 일을 하시는 모습이 보고 싶으니, 이쪽에 앉아야겠어요.”
카운터와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그녀.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선 우리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귀엽다.
오랜만에 치나미를 보니 활기가 차오르는 기분이다. 카운터 아래로 렌카의 골반을 툭 건드린 나는, 움찔하는 그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음은 반만 넣어요.”
“.... 닥쳐.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치나미 앞에서 곤란하게 하지... 읏...! 거기 만지지 마라...! 진짜 죽인다...!?”
가랑이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가려는 손을 팍 하고 쳐내는 렌카. 맞은 부위를 한 차례 쓰다듬은 내가 말했다.
“자주 만졌던 곳이잖아요.”
“일 안 해...?”
“알았어요.”
조금만 더 자극하면 진짜로 때릴 것 같다. 순순히 물러난 나는 카페에서 가장 큰 컵을 꺼내 렌카의 앞에 놓아두었다.
**
“흠흠. 아이스티 점수는, 제 기준에서 10점 만점에 5점이에요.”
착하디착한 치나미지만 복숭아와 관련해서는 타협이 전혀 없구나. 신랄한 평가다. 역시 복숭아 소믈리에야.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치나미와 함께 카페에서 나온 내가 물었다.
“왜 5점이죠? 평범한 맛이어서 그런 건가요?”
“네. 닙톤에서 생산한 제품이 확실한데, 제가 사장님이라면 가루의 비율을 높이겠어요.”
“건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앗, 아니에요. 사실 평범한 분들이 맛보셨다면 비슷하다고 느끼실 거예요. 저 같은 예민한 입맛을 가진 사람만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정도지요.”
“그런가요?”
“그런 거예요. 자, 저는 이제 짐을 풀러 집으로 돌아가봐야겠네요.”
냅킨으로 조신하게 입가를 닦아낸 치나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러니까 무슨 음식 평론가 같잖아.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면 어울릴 듯하다. 물론 대놓고 쓴 소리를 못하는 치나미의 성격상, 운영을 해도 가게에 대한 칭찬밖에는 없겠지만.
“짐도 안 풀고 왔던 겁니까?”
“네. 렌카 친우님과 후배님이 보고 싶었으니까요.”
“역시 우리 스승님은 말을 너무 예쁘게 하네요.”
“그런가요?”
“예. 부장은 매번 욕만 하고 틱틱거리던데.”
“다 후배님이 좋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렌카는 싫은 사람에겐 말도 안 걸어요.”
“그럼 처음에 저를 탐탁찮아했던 것도 다 관심으로 인한 거였네요?”
“렌카는 후배님을 탐탁찮아했던 게 아니라, 재능이 있는 후배님께서 엇나갈까 우려해 일부러 살살 도발을 했던 것뿐이에요. 검도부에 묶어놓으려구요.”
사실과는 전혀 다르지만, 치나미의 말이니까 그렇다고 쳐주자.
“알겠습니다.”
“그래요.”
격려를 하듯 내 등을 톡톡 친 치나미가 렌카에게 다가가, 작별인사를 하고는 출입문을 나갔다.
냅다 치나미를 뒤따라간 나는, 빨리 들어가서 일을 하라는 그녀의 성화에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치나미가 상체를 꾸벅 숙였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어요. 열심히 하세요, 후배님.”
“혼자 갈 수 있겠어요?”
“제가 무슨 어린아이인가요? 게다가 집까지 그리 멀지도 않은데...”
“태워줄까요?”
“어허! 일하는 시간에 그런 행동을 해선 안 돼요. 마음만 받겠어요.”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네.”
양손을 마구 흔들며 멀어지는 그녀. 마주 손을 흔든 나는 그녀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도심을 오가는 사람들의 거지같은 냄새를 뚫고, 익숙한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오자 눈을 꿈틀했다. 저번에 미유키와 오락실에 갔을 때 맡았던, 달콤하고 톡 쏘는 듯한 레몬 향. 이 운명의 향기의 주인은 분명히 히요리였다.
‘근처에 있는 건가?’
사람이 꽤 있어서 찾기는 힘들 것 같다. 잊을만할 때쯤 이렇게 한 번씩 존재감을 드러내주는데, 왠지 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냥 들어가자. 어차피 히요리는 아카데미에서 마주치게 되어있다. 더군다나 이곳을 지나기도 했으니, 알바가 끝나기 전에 한 번쯤은 카페에 올 수도 있겠지. 검도대회장으로 가면서 봤던 것처럼, 만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운명적인 만남은 러브 코미디의 클리셰니까.
그러한 희망을 가져본 나는 카페로 돌아갔다.
“일하고 있는 시간에 잘하는 짓이다.”
이후 내게 비아냥거리는 렌카의 옆으로 가,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 정도는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누구 때문에 저녁에 만나지도 못하는데.”
“....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불만이 있었으면 네가 나보다 먼저 치나미랑 약속을 잡았어야지. 그리고 손 치워.”
“스승님이랑 무슨 얘기할 거예요?”
“넌 몰라도 돼.”
“그 얘긴 제가 할까요?”
“뭘?”
“그거요. 저번에 호텔에 갔었던 일.”
“.... 그, 그건 일단 조용히 하고 있어...”
“난감하면 조금 도와줄 수도 있어요.”
“안 난감하니까 조용히 하라고...! 입 다물어...!”
순식간에 새빨개지는 렌카의 얼굴.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초커를 만지작거린 내가 말했다.
“알았어요. 이건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하나도 안 들어. 짜증나. 당장 벗어던지고 싶을 정도야.”
“너무하네.”
“손님이나 받아.”
“없는데 어떻게 받아?”
“지금 들어오시... 아니네...”
카페에 들어올 것처럼 기웃거리다가 갈 길을 가는 손님. 창밖을 통해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렌카가 내 눈을 피했다.
“아니네요.”
“.... 어.”
“근데 왜 거짓말해?”
“거짓말이 아니라... 이건... 착각한 거지...”
“한 번만 봐줄게요.”
“.... 알았어.”
왜 안 개기고 납득을 하지? 치나미 앞에서 떽떽거렸던 일을 보복할까봐 불안했나? 걱정이 많아도 참 많다. 그냥 포기하고 순응하면 얼마나 좋아.
렌카의 손을 내 앞으로 가져와,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내가 말했다.
“오늘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 거죠?”
“구,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톡 하나 남길게...”
“알겠다고 하면 되지 사족은 왜 붙여요? 선심을 써주겠다 이거에요?”
“.....”
“이것도 봐줄게요.”
“그, 그래...”
고맙다는 말을 하라고 재촉할 수는 있지만, 렌카의 마음이 심란할 테니까 더 놀리지 말자. 조교를 위한 자극은 오늘로선 딱 이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