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3 - 냄새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없나...?’
옷을 갈아입어야한다는 렌카를 집까지 태워다주고 도심으로 돌아온 나는,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히요리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온갖 곳을 쏘다녀도 그녀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운명적인 만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꾸 미련이 남아서 찾아보는데, 상큼한 레몬 향은커녕 도심 특유의 퀴퀴한 냄새밖에는 안 났다.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매사에 발랄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라면 어딜 가도 눈에 띌 텐데... 아쉬움을 토로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선 깔깔거리고 있겠지? 그녀는 인기가 많으니까. 얼른 보고 싶다.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마치고 TV를 틀었다. 재미없는 프로그램밖에 나오지 않는다. 절로 하품이 나올 정도.
미유키는 치나미와 성씨가 같은 나나세와 놀고 있다고 했으니 지금 통화하는 건 민폐인 것 같고... 가끔씩 이렇게 혼자 남겨질 때마다 짜증이 난다, 짜증이 나.
이럴 때 타카시가 있으면 심심하진 않을 텐데, 오랜만에 놈에게 연락을 해볼까? 아니다. 마음 다잡고 아버지의 일을 배우고 있으니 괜히 방해하지는 말자.
재미없는 프로는 넘기고 성인영화를 튼 나는, 액기스 시간만 뽑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냅다 그것을 집어들었다.
[MK 님.]
이노쨩의 쪽지가 와있다. 현재시간은 8시. 치나미와 저녁을 먹고 놀러갔다가 돌아온 모양이다.
두 사람은 오늘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렌카의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을, 치나미가 읽고 무슨 일이 있냐고 하진 않았을까? 굉장히 궁금하지만 이건 이노쨩이 아니라 그녀의 본체인 렌카에게 물어봐야 맞는 거지.
두꺼운 이불을 덮어쓴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알 거 없고요, 물어볼 게 있으니까 대답만 해요.]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까칠하네요.]
[(メ゚皿゚) 닥쳐요.]
무시무시한 이모티콘이다. 근데 무서워해야 하나? 귀엽기만 한데.
[그럽시다. 물어볼 게 뭔데요?]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알고 싶네요. MK 님의 판타지는 뭔가요?]
[누누이 말했지만 SM 플레이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싶은 건가? 이걸 알려줘야할지, 말아야할지 가늠이 안 된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다고 본다.
전자의 경우 렌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줄 수 있지만, 격한 반응이 줄어들 것 같아서 그게 아쉽다. 후자의 경우 반응이 무척이나 뛰어나겠지만, 오랜 시간동안 싫다고 고집을 피울 게 분명하기에 조금 지루해질 수도 있다.
‘음...’
어찌할까 고민하던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반응 다 맛이 좋을 것 같으니까, 전부 보면 되지 않겠는가. 적당히 귀띔을 해주면 되겠지.
[가감 없이 설명할까요?]
[가감 없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대놓고 말하냐고요.]
[아, 네.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어떤 상황에서의 플레이로 설정하죠?]
[그런 것까지 설정해야 하나요?]
[하면 좋죠.]
[그러면... 썸녀나 여자친구와의 플레이일 경우 어떻게 할지 얘기해보세요. 여자 측은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요.]
썸녀나 여자친구라... 아주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뭐, 사실 저게 대다수긴 하지만. 절로 입꼬리를 올린 나는, 나름 구체적으로 상황을 만든 렌카를 위해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자세하게는 말씀을 못 드리겠지만, 일단 스마타를 시킬 생각입니다.]
[스마타가 뭐죠?]
알면서 물어보는 게 웃기다. 청순한 척을 해봐야 소용없는데... 우리 노예는 참 가식적이란 말이지.
[여자가 남자 위에 올라타서, 자신의 성기로 남자의 성기를 문질러주는 겁니다. 삽입은 안 하고 애무하듯이 비비는 게 포인트인 체위죠.]
쪽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나타났음에도, 렌카에게선 답이 없었다. 설명을 듣고 저 혼자 흥분해선 자위를 하는 건 아니겠고... 그저 꽤나 적나라한 묘사에 황당함을 느낀 것 같다. 물론 렌카는 변태니까, 살짝 흥분하긴 했으리라.
[천박하군요.]
몇 분의 텀 끝에 온 쪽지. 문장에서 찌푸려진 렌카의 얼굴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구체적으로, 대놓고 설명해달래서 한 건데 왜 뭐라고 해요?]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천박한 걸 어떡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정도로 창피해하면 어떡하려고?]
[그런데 그 정도로 SM 플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자 측에 목줄이 달려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목줄...?]
[예. 목줄을 채워놓고 아래에서 줄을 잡아당기면서 여자친구의 반응을 즐기고 싶네요.]
[(⚆_⚆) 정말 상종 못할 인간이군요. 이제 됐어요. 딱 여기까지만 들을게요.]
어차피 이 이후론 말할 생각이 없었단다. 흥분감에 몸을 바르르 떠는 렌카를 상상해본 내가 손가락을 놀렸다.
[이노쨩 님도 조교물을 좋아하지 않나요?]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어떤 미친놈이 하도 징징거리니까 어쩔 수 없이 봐준 거지.]
[그 미친놈은 누굴까요?]
[글쎄요. 눈치가 없는 사람인 건 확실해요.]
돌려까는 모습도 깜찍하다.
[그나저나 이노쨩 님은 왜 매번 말이 바뀌죠?]
[그건 무슨 소리에요?]
[저번엔 조교물에 취향을 붙였다고 했다가, 지금은 또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잖아요. 사람이 왜 그렇게 줏대가 없어요?]
[그럴 수도 있죠.]
[매력 있네요.]
[기분 나쁘니까 칭찬하지 마세요.]
[칭찬 아닌데.]
[엿 먹어요.]
익명의 힘이란 게 이렇게나 무서워요. 내 앞에선 틱틱 원툴 렌카가 과감해지잖아.
[못생길수록 공격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던데.]
[본인 얘긴가보네요.]
[대화가 안 통하네.]
[마침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좋지 않은 하루 되세요. 저는 이만.]
[필요할 때 절 불러놓고 용건이 끝나니까 먼저 나가는 거예요?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요?]
답장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로그아웃을 한 모양이었다. 주인을 앞에 두고 일방적으로 대화를 종료한 노예 교육을 위해서라도, 또 호텔을 예약해야겠다. 그래도 대화하는 동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했네. 이건 감안해준다.
그리 생각한 나는 라피아 호텔 홈페이지에 들어가, 방을 하나하나씩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떤 컨셉이 좋을까? 코스프레 복장도 입혀볼까? 간호사복도 좋지만 경찰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범죄자를 잡았지만 역으로 당하는 경찰... 상당히 꼴릴 것 같은 느낌이야.
**
오늘 렌카의 패션은 평범하구나. 뭘 입고 오라고 하진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코디를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청바지를 입은 것으로 보아, 내게 반항을 하려는 건가보다.
덜컥.
“안녕.”
조수석에 타자마자 무신경한 인사를 건네는 렌카. 그런 그녀를 보고 피식한 내가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어제 스승님이랑 잘 놀았어요?”
“어.”
“뭐했는데?”
“알 필요 없... 햣...! 그... 바, 밥 먹고 스티커 사진 찍었어...! 거기 만지지 마...!”
시큰둥한 대답을 내보이려던 렌카는, 무심한 듯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어간 내 손에 기겁을 하더니 순순히 어제 일을 실토했다.
이렇게나 여리여리한 반응을 보여줄 거면서 이노쨩으로는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들키면 파장이 아주 클 텐데, 대비는 되어있으려나 싶다.
그나저나 렌카의 정체가 들통 날 날이 오면 모르는 척을 해줘야하나, 아니면 알고 있었다고 능욕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아침부터 왜 난리야 또...!”
이어지는 렌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나는 넌지시 이노쨩과의 대화를 언급할 떡밥을 던졌다.
“어제 스트레스를 좀 받아서요.”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사람 허벅지를 마음대로 만져도 돼...?”
“이렇게 해야 풀리거든요.”
“미친놈 아니야 진짜... 무슨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그래...? 어제 치나미랑 둘이 만난다니까 삐친 건가...?”
“제가 그렇게 졸렬해보여요?”
“어. 엄청 졸렬해보여.”
“인정합니다. 근데 어제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예의 없는 사람이랑 짜증나는 대화를 해서 그래요.”
예의가 없다는 말은, 내가 마지막으로 이노쨩에게 보냈던 쪽지 내용이었다. 그리고 렌카는 분명히 그걸 봤다. 눈빛이 일변하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아마 밤에 몰래 들어가서 쪽지함을 확인해봤겠지.
“그, 그래...? 그게 누군데...?”
목소리 안에 미세하게 깃들어있는 불안감이 느껴진다. 살짝 쫀 것 같다. 동시에 호기심도 있는 듯했다. 내가 이노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한 거겠지.
“그런 사람이 있어요. 부장이랑 성격이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 나 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이 한둘인가...?”
“흔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틱틱대는 게 닮았어요.”
“.....”
정곡을 찔렸는지 입을 다무는 모습이 어이가 없다. 저런 연기력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는지 걱정이다. 곤란해 하는 렌카의 위쪽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내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부장은 그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긴 하죠.”
“대, 대체 그 사람이 누군데 비교질이야... 짜증나게... 안 알려줄 거면 언급 자체를 하지 마...!”
“알았어. 미안해요.”
아침의 투닥거림이 끝난 우린 카페로 갔다. 옷을 갈아입기 전 사탕을 렌카의 입에 넣어주고,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오고...
여느 때처럼 평범한 날이었다. 그때까지는... 아니, 오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점심시간을 앞두고 확 바빠진 카페 안. 여러 손님들을 맞이하고 내보낸 나는, 렌카를 먼저 규동 가게로 보내려고 했다. 그때,
“왜 하필 여기야? 우리가 가려는 식당이랑 거리가 꽤 있는데?”
“내가 자주 보는 블로그에서 그러는데, 여기 초코칩 프라푸치노가 엄청 맛있대.”
“아 그래?”
“응. 미사키가 초코칩 들어간 거 엄청 좋아하잖아.”
“그렇긴 한데 나는...”
“알아. 유키노 너는 딸기 라떼 좋아하지? 그것도 맛있다더라.”
“진짜?”
“그렇다니까? 나 못 믿어?”
카페 안으로 들어온 손님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어?’
그리고 나는 귀를 쫑긋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짙은 레몬 향이 확 풍겨왔다. 매번 흐릿한 뜬구름 같은 냄새만 맡다가 콧속으로 짙은 향이 들어오니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다.
고개를 홱 돌려 문 쪽을 바라보니, 여섯 명이나 되는 또래 남녀들의 선두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찰랑거리는 밝은 금발과 큼지막한 눈. 그리고 그 중앙에 자리한 동그랗고 초롱초롱한, 머리색과 같은 눈동자, 얼굴에 묻어나오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소악마, 말괄량이 같은 느낌, 마지막으로 악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개구쟁이 같은 웃음기까지...
‘히요리다.’
내가 알고 있는 히요리가 확실했다. 언제고 카페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어제였지 않았나?
그 생각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이야... 최근에 신사에 가서 새절을 한 번 했었는데 신이 소원을 들어준 건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도키아카... 어쩌면 똥겜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무슨 초등학생들을 인솔하듯 친구들을 구석자리에 앉힌 히요리는, 공공장소니까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며 일행들에게 단단히 당부를 하고는 카운터로 다가왔다. 따로 상의 없이 곧장 이곳으로 오는 걸 보니 친구들이 어떤 메뉴를 좋아하는지 전부 아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히요리와 대화를 나누는 건, 내가 이 도키아카에 온 후 처음이다. 타이밍이 무척이나 뜬금없긴 하지만... 전조는 있었으니 당황하지 말고 잘 맞이해보자.
저번엔 먼발치에서 봤었는데... 오늘 내 머릿속에 저 말괄량이 같은 얼굴을 완벽하게 집어놓아야겠다. 그리 생각한 나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다가오는 히요리를 향해 마주 웃어보였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