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64화 (263/313)

Chapter 264 - 냄새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2

“저희 초코칩 프라푸치노 하나랑, 딸기 라떼 하나랑, 자몽 주스 하나랑...”

막힘없이 주문을 하는 히요리는 그저 발랄하기만한, 매사에 기분이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과 친해지면 장난기가 굉장히 많아진다. 짓궂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사고도 좀 치는 편이라서, 미유키가 소속된 학생회와 자주 충돌하고는 했다. 불량학생처럼 나쁜 사고를 치는 건 아니지만, 올해 학생회의 골치가 조금 아프긴 할 거다.

“마지막으로 카페라떼 하나... 이렇게 주세요.”

히요리의 주문을 전부 들은 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는 그녀에게 살포시 웃어보였다.

“알겠습니다. 결제 먼저 도와드릴게요. 저희 카페 쿠폰 있으세요?”

“아니요. 주세요.”

“잠시만요.”

카운터 밑을 뒤적거린 나는 쿠폰을 꺼내, 미리 찍혀있는 도장을 제외하고 여섯 개를 추가로 찍었다. 특별히 일곱 개 찍어줬다. 공짜 음료수를 먹기 위해서라도 자주 오렴.

도장이 찍혀있는 쿠폰을 히요리에게 내민 내가 말했다.

“1840엔입니다.”

“넹.”

히요리는 기분이 좋은 일이 있을 때 저런 식으로 말끝이 쭈욱 올라간다. 오늘 텐션이 상당히 좋나보다.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은 히요리가 휴대폰을 꺼내, 포스기 옆에 있는 결제기에 가져다대었다. 이후 결제를 마치고는 진동벨을 가져가면서 쿠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도장이 하나 더 찍혀있어 의아한 모양이었다. 몸을 돌린 그녀가 내게로 오려는 찰나, 앞치마를 잘 조절해 입은 렌카가 다가오더니 물었다.

“주문량 많아? 도와줘?”

“예. 블랜더로 자몽 좀 갈아줄래요? 냉장고 밑에 보면 있을 거예요.”

“알았어.”

순순히 대답을 한 렌카가 히요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괜히 쳐다본 것이 무안한 듯 웃더니 말을 이었다.

“금방 만들어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렌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히요리의 표정에 흥미가 가득 돋아났다.

“음... 아하.”

아하? 갑자기 저런 감탄사는 왜 하는 걸까? 렌카가 이상한 눈빛을 한 것도 아닌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히요리는 이런 쪽으론 눈치가 굉장히 빠르니... 무언가 감이 왔을 수도 있겠다. 여자로서의 촉 같은 것 말이다.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히요리를 향해,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 주문은 여섯 개만 했는데 쿠폰에 도장을 일곱 개 찍어주셔서요.”

여기서 뭐 이상한 말로 히요리를 꼬시려 해선 안 된다. 무언가 임팩트를 남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자주 마주칠 테니까. 지금으로서는 가벼운 호의만 주면 된다. 딱 기억에 남을 정도로만.

“일부러 하나 추가로 찍은 겁니다. 자주 오시라고요.”

사심 따윈 단 하나도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대답을 건네자, 히요리가 흐응... 하며 수긍하더니 활짝 웃었다.

“영업 전략 같은 건가요?”

“그렇죠. 10개 찍으면 원하시는 음료를 레귤러 사이즈로 드립니다.”

“진짜요? 아무거나?”

“맞아요. 아무거나.”

“감사해요. 자주 올게요.”

“예.”

기분이 더욱 좋아졌는지, 히요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갔다.

이쪽을 흘끔거리며 친구들과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대화내용을 듣고 싶지만 구석에 앉은데다 목소리가 크지 않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려니 한 나는 자몽을 갈기 시작한 렌카에게로 다가갔다.

“부장.”

“왜.”

“오늘은 손목에 초커 안 찼네?”

“뭐라고? 블랜더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

잘 들리면서 능청스레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게 웃기다. 콧방귀를 낀 나는 다소 엄한 투로 렌카를 나무랐다.

“거짓말하면 혼납니다.”

“.... 어제만 차기로 했잖아...”

“그런 약속은 한 기억이 없는데.”

“.....”

“자꾸 벌을 자처하네요. 내일 저녁에 시간 비워놓으세요.”

“내, 내일...?”

그저 데이트를 하자는 것임에도 반응이 꽤나 격하다. 저녁이라고 하니 호텔에 갈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제 MK와 나누었던 대화 또한 생각나서 괜히 부끄러워졌겠지.

“예. 내일요. 오늘은 나나세 선배랑 놀아야 하니까 안 되고.”

“치나미랑? 둘이서...?”

“그렇죠.”

“안 되는데...? 치나미는 오늘도 나랑 놀기로...”

“웃기시네. 그런 얘기 없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통화했었으니까.”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양 입을 꾸우욱 다무는 그녀. 눈썹을 구긴 내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거짓말만 할 거예요? 감당 돼요?”

“가, 감당이라니... 일단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음료부터 만들자...”

“그래요.”

음료를 만들면서, 렌카의 눈동자가 연신 내 쪽으로 움직였다. 벌써부터 내일 벌어질 일을 망상하는 건가? 그나저나 곁눈질을 하는 모습이 예쁘다. 약간 포식자를 앞에 둔 다람쥐 같은 느낌이야.

동시에 구석자리에서도 시선이 느껴진다. 음료를 만들면서 살짝 그곳을 체크해보니, 히요리의 동성 친구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관심이 있는 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히요리가 저들에게 무슨 말을 했나? 아니면 그저 내 얼굴을 향한 호감일까? 뭐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히요리는 내게 관심이 없는 듯해서 슬프다.

남자들의 경우 히요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히요리는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그들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고 말이다. 그들 중 한 명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성격이 원체 발랄하기 때문이었다.

저 새끼들은 우리 아카데미에 오면 아주 많이 괴롭혀줄 테다. 질투심으로 그득한 시선을 떨거지들에게 보낸 나는, 갑자기 도키아카를 처음 플레이하기 전에 봤던 공식 가이드가 생각났다.

히요리 옆에 떡하니 나타나있는, [공략 난이도 최상]이라는 글귀.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건 테츠야 입장에서의 난이도지, 내 입장에선 아니다. 물론 어려운 건 마찬가지겠지만 할 수 있다. 속으로 전의를 다진 나는 얌전히 음료수를 만들었다.

**

“안녕히 계세요!” “수고하세요!”

상큼한 인사를 하며 카페를 나가는 히요리 일행들.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마주 인사를 건넨 나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히요리가 앉아있던 장소를 청소하기 위해 움직였다.

흘깃거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내느라 죽는 줄 알았다. 나의 이 풋풋한 마음을, 히요리는 알아줬을까? 다음에 오면 평범한 인사 말고, 사적인 이야기도 해볼까 싶다.

물기만 묻어있는 테이블을 마른 행주로 닦아낸 나는 묵묵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 렌카를 보았다. 활기가 넘치는 히요리도 좋지만, 틱틱거리는 렌카도 좋다. 치나미도, 미유키도 마찬가지. 이 네 사람이 정말 좋다.

그녀들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며, 나는 렌카의 바로 뒤에서 그녀의 등허리에 은근슬쩍 손을 올려놓았다.

“하지 마 그거.”

골반을 확 튕기며 힉! 하는 탄성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반응이 의외로 덤덤하다. 지쳤나? 히요리가 온 이후로 손님이 꽤 와서 피로했을 수도 있긴 하겠다. 렌카의 골반을 다섯 손끝으로 누르다시피 만진 내가 말했다.

“점심은 부장이 먼저 먹고 오세요.”

“알았어. 근데...”

“근데?”

“내일 뭐하려고...?”

여태 그걸 생각했었나? 지금처럼 당당하게 물어보지 끙끙 앓고 있다니... 렌카답지 않다. 그래도 귀엽다.

“이것저것.”

“이것저것 뭐.”

“그때 보면서 정하려고요.”

“.... 호텔 가려는 건 아니지...?”

“먼저 언급을 해주니까 좋네요. 일단은 갈 생각이긴 해요.”

“미, 미친놈 아니야...? 그걸 왜 너 혼자 결정해...?”

“아직 결정한 건 아닙니다. 부장이 하기 나름에 따라 달라져요.”

“내가 하기 나름이란 게 무슨 뜻인데...?”

“아까처럼 거짓말을 하거나, 말을 똑바로 안 듣거나 하면 부장이 원하지 않는 쪽으로 제 생각이 기울어질지도 모르죠.”

“나한텐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지껄이지 말지...?”

“이렇게 험한 말을 하는 것도 포함입니다.”

“너는 진짜...!”

“얼른 점심 먹어요.”

렌카의 말을 끊으며 둔부를 토닥이자, 방금과는 달리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린 그녀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카메라가 없는 탈의실 근처가 아니어서 다소 불안해하는 것일 뿐.

이런 스킨십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이 눈에 보여서 좋다. 나름 고분고분한 렌카의 반응에 만족스런 웃음을 흘린 내가 말을 이었다.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어요.”

“애 취급하지 마... 한 대 맞기 싫으면...”

“또 험한 말.”

“아니... 험한 말은 너도 하면서 왜 나한테만... 너 욕 엄청 많이 하잖아...”

“최근엔 안 해. 그리고 부장한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매일 독불장군처럼 이기적이게 굴었으면서...”

“그건 말이 아니라 태도잖아.”

“말이나 태도나...”

“말대꾸할래요?”

“.....”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기만 하는 렌카. 그녀로서는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쭈구리가 됐나 싶을 거다. 그럼에도 반항할 마음은 없겠지. 왜? 이미 뒤바뀌어버린 입장 자체에 적응을 했고, 즐기는 수준까지 왔으니까.

“일단 점심부터 먹어요. 배고프잖아.”

나긋한 목소리로 렌카를 달랜 나는, 그녀가 궁시렁거리며 카페 후문으로 나가자 킥킥 웃었다. 렌카는 지금처럼 소심할 때와 기가 셀 때의 괴리감이 큰데, 둘 다 어울린다. 내일 많이많이 예뻐해주자.

**

퇴근시간이 되고 렌카와의 약속을 반쯤 강제로 잡아놓은 나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치나미를 만났다.

“후후후... 후배님과 놀러나가는 건 오랜만이네요.”

차에 타자마자 깜찍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그녀.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 내가 물었다.

“어제 이노오 선배랑은 잘 놀았어요?”

“네. 아주 예쁜 스티커 사진을 많이 찍었답니다.”

“저도 보여줄 수 있어요?”

“앗, 책상에 전부 붙여버렸는데요.”

“그러면 스승님 집에 놀러갔을 때 봐야겠네요?”

넌지시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치나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저 복숭아 빛으로 물드는 수줍은 얼굴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정말 그리웠다.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양손을 끼워넣고 몸을 배배 꼬던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러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엇을 하실 건가요...?”

“글쎄요. 아직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만... 간만에 모모님 굿즈샵이라도 가서 신상품이 나왔나 확인해볼까요?”

“앗, 신상품은 나오지 않았어요... 이번에 새로 나올 모모님 키링은 2주 뒤에 발매돼요.”

무슨 아이돌 스케줄을 따라다니는 열성팬도 아니고... 모모님에 관해서는 소식이 무척 빠르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속으로 황당한 헛웃음을 친 내가 말했다.

“그러면 못 다한 일을 다 끝내놓고 생각해볼까요?”

“못 다한 일...? 그것이 무엇일까요...?”

“자연히 알게 될 겁니다. 일단 갈까요?”

“으응...? 어디로요...?”

“어디든 가요.”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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