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9 - 두려움일까,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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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본 렌카가 기다란 날숨을 내쉬었다. 왜 마츠다와 계속 이런 관계를 갖게 되어버리는 걸까? 당장 그만둬도 모자랄 판인데.
지금까지 자신은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츠다와 대화를 나누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우유부단했다. 그리고 마츠다에게 너무 많이 휘둘렸다.
호텔에서 자신답지 않은 말투로 마츠다의 귀를 만족시켜준 건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는지... 자신에게 깔려있던 그의 올라간 입꼬리를 되새긴 렌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미쳤지...’
심지어는 그의 리드를 따르는 게 기쁘기까지 했다. 평소에도 그런 마음을 은연중으로 품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감정이 더했다. 마치 마츠다를 향한 마음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것처럼.
“하아아...”
연신 한숨을 내쉰 렌카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죽도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야외에서 바람을 쐬며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내일까지 머리가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연습하러 가니?”
거실 소파에 아버지와 함께 앉아있던 어머니의 물음.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깨를, 그리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허리를 감싼 금슬 좋은 모습을 바라본 렌카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실내에서 하면 되지 굳이 나가려고?”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그래? 오늘 추운데다 늦었으니까 적당히 하고 와.”
“알았어요.”
만약 부모님이 마츠다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마츠다가 감독이나 나이든 손님을 대하는 걸 보면 꽤나 싹싹하게 굴던데... 의외로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갖고 밖으로 나온 렌카는, 옷을 여민 채 죽도를 휘둘렀다. 날이 추운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서 연습이 끝나면 죽도에 기름을 많이 먹여줘야 했지만, 어차피 죽도 관리는 생활의 일부라 귀찮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름 오랜 시간동안 반복동작을 하며 연습을 하던 렌카는, 평상에 놓인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왠지 모를 기대감에 잽싸게 그것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면에 나타난 이름을 보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미우라 테츠야 후배]
바라고 있던 마츠다의 전화가 아니었기 때문. 인상을 마구 찌푸리던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뺨을 톡 때렸다.
이러면 자신이 미우라 테츠야에게 유감이 있는 것 같잖은가.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표정관리를 좀 해야겠다. 혼자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멋대로 행동해버리면 남들 앞에서도 이래버릴 수 있으니까.
올곧은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거다. 라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 렌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랜만입니다, 부장!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통화 괜찮으세요?
여전히 씩씩하구나. 검도 연습은 잘 했으려나? 그러고 보니 요즘 마츠다가 검도 얘길 안 하던데... 혹시 손을 놓아버린 건가? 그만큼 재능이 있는 사람이 검도를 그만두면 안 된다. 내일 한 번 넌지시 떠봐야겠다.
“괜찮아. 잘 지냈어?”
-예! 잘 지냈습니다. 부장은요?
“나는 뭐...”
말끝을 흐린 렌카의 입이 다물렸다. 요새 마츠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자신 또한 잘 지낸다며 선뜻 대답하기가 껄끄럽다.
아니, 스트레스를 받는 게 맞나? 오히려 마츠다와의 위험한 관계를 즐기고 있는 게 아닌지? 자기 자신을 향해 그러한 질문을 해본 렌카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순박한 테츠야의 물음에 움찔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아냐. 근데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안부도 여쭐 겸, 다음 검도대회도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혹시 시합이 언제쯤일까요?
“방학이 끝나기 직전에 한 번 열려. 곧 날짜가 잡힐 텐데 그때 감독님께서 말해주실 거야.”
-그렇습니까? 혹시 남자부 대회에 저도 포함되는 건가요?
“당연하지. 앞전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다 같이 갈 거야.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변화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장담해.”
-다행입니다.
“그게 불안했던 거였어?”
-부, 불안했던 건 아니고요... 그저 제가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어서...
솔직하고 순박한 테츠야의 대답에, 렌카가 피식했다.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마츠다가 미우라처럼 서글서글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당히 별로다. 사람에게는 사람마다 걸맞은 이미지가 있는 법. 마츠다는 지금처럼 막무가내 식으로, 강압적으로 나오는 게 훨씬 어울린다.
휴대폰을 반대쪽 손으로 바꿔들고 죽도를 평상 기둥에 기대어 올려놓은 렌카가 말했다.
“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나저나 요새 알바하는데, 위치 찍어줄 테니까 놀러와.”
-알바요?
“응. 카페에서 일하고 있어. 마츠다랑 같이.”
-.... 예? 뭐라고요?
“일하고 있다고.”
-아뇨... 그게 아니라... 누구랑 같이요?
“마츠다랑.”
-.... 제가 아는 그 마츠다요? 마츠다 켄?
테츠야의 의문스런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는 마츠다가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두 사람은 친구 아니었나? 친하지는 않아도 알려줄 만은 한데... 혹시 방학 내내 연락을 안 한 건가?
“맞아.”
휴대폰 너머가 조용해졌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나 싶은 렌카가 물었다.
“여보세요? 들려?”
-아, 네... 들립니다. 그... 굉장히 의외네요...?
의외라... 평소 자신과 마츠다가 서로를 원수 보듯 대했던 걸 상기해보면,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음료수 사줄 테니까 시간 날 때 와. 검도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응. 이만 끊을게.”
전화를 끊은 렌카는 애니쉐어를 통해 마츠다에게 쪽지를 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요새 MK와 대화를 하는 횟수가 잦고, 마츠다가 저번에도 의심했었으니까 위험한 짓은 그만둬야 맞았다.
유일하게 마음 놓고 마츠다를 욕할 수 있는 이 즐거움을, 한순간의 실수로 놓쳐서는 안 되지. 오래오래 우려먹어야 마땅하다.
조용해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렌카는, 슬슬 마츠다의 전화번호부 이름을 바꿀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여전한 쓰레기] 정도면 딱 좋을 듯하다.
이것도 특별한 거다. 원래 자신은 치나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이렇게까지 고심해서 저장해놓지 않으니까. 그러니 마츠다는 자신에게 고마워해야한다. 물론 그가 이 사실을 알면 건수를 잡았다는 듯 또 다시 날뛰겠지만.
그나저나 다음에는 어떤 플레이를 하게 될까? 오늘 일어났던 일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사람의 목에 고양이 방울이 달린 초커라니... 목줄은 안 채워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그러면 다음엔 목줄인가...?’
MK가 목줄을 언급하긴 해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 플레이를 하려고 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모르겠다. 그때가 다가와 봐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오늘 플레이는 매우 굴욕적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으나, 사실 나쁘지는 않았다. 마츠다가 자신의 몸을 굉장히 좋아하는 게 보였고, 첫 관계 때보다 사정 또한 빨리 해서 은근히 뿌듯했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되는 것 같다. 다음에 있을 관계가.
‘아냐...!’
은연중으로 차오르는 벅찬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힌 렌카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잠깐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은 완전히 꽁꽁 싸매서 마츠다의 화를 돋워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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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알고 있었지. 왜 말을 안 했냐구? 그게 말할 필요가 있는 일이야?”
요 위에서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 미유키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응, 응... 그렇지. 아냐, 괜찮아. 다음 공부? 수요일로 하자. 그때가 마츠다 군이 쉬는 날이거든.”
대화내용을 들어보니 미유키의 전화상대는 테츠야구나. 어떠한 경로로 내가 렌카와 같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물론 그 경로란 렌카겠지. 오랜만에 선망하는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들은 것이 틀림없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놈이 지은 표정이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테츠야 같은 버러지 따위에게 신경을 쓸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저딴 놈의 낯짝보다는, 미유키에게 나와 렌카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가 걱정이다.
매번 생각은 하고 있는데 감이 잡히지 않는 건 물론이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유키가 치나미와 쓰리섬을 하기 전에 보여주었던 반응을 상기해보면... 이번에 보여줄 반응이 두렵다.
쓰리섬을 허락해주었던 전적이 있어서 의외로 내가 걱정하는 만큼 상황이 심각해지지 않을 수도 있긴 할 테지만, 그 가능성은 낮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결혼하자고 해서 일단 혼인신고부터 박아버릴까? 너무 막나가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어차피 미래에 할 예정이긴 하니 그걸로 미유키를 단단히 묶어놓고... 아니, 이건 좀 그런가?
근데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금 미유키에게 결혼 얘기를 하면,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날 너무나도 좋아하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한창 젊은 나이에 혼인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 생각을 많이 해봐야겠다고 말할 것 같기도 하다. 미유키는 감수성이 풍부해서 분위기를 잡고 제대로 고백한다면 냅다 수락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 다음에 봐.”
활기찬 목소리로 통화를 끝낸 미유키가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 행동이 충전을 해달라는 뜻임을 알아차린 나는 헛웃음을 쳤다.
“내가 네 시종이냐?”
“나 못 움직이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못 움직이긴 무슨...”
“아 빨리이...!”
이불로 감싼 전신을 통통 튕기며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고 한다.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데... 지금 운을 떼어볼까? 아니, 전조도 없이 그러는 건 충격만 가져다줄 뿐이다.
미유키의 휴대폰을 받아들고 충전 잭을 꽂은 나는, 몸을 웅크린 채 그대로 눕는 그녀를 툭툭 건드렸다.
“야.”
“왜?”
“그냥 불러봤다.”
“뭐야... 유치하게...”
별꼴이라는 듯 날 바라보며, 미유키가 장난 식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저 발랄한 모습을 보니 얘기를 꺼내기가 더욱 망설여진다. 내가 이렇게나 결단력이 없는 놈이었나?
치나미와의 쓰리섬을 한 번 더 요구해보면 어떠려나? 렌카 얘길 하는 것보단 거부감이 덜할 테니까,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일단 지금은 미유키의 애정도를 더욱 끌어올려보자. 날 향한 그녀의 마음이 지금보다 훨씬 커졌을 때 뭐라도 해야 통할 것 같다.
다가올 미래에 관한 두려움을 가슴속 한켠에 넣어둔 나는 미유키의 위에 올라타, 그녀가 절대 내어주지 않으려 하는 이불을 강제로 확 펼쳤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아 하지 마...!”
까르르 거리며 좋아하는 미유키. 나는 그런 그녀와 오랜 시간동안 풋풋한 스킨십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