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3 - 불청객과 반가운 손님 #2
테츠야의 입장에 맞춰 마지막 히로인의 등장이라니. 참으로 얄궂은 타이밍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역시 놈도 이 도키아카의 주인공이라 이건가?
더럽다, 더러워. 나는 발에 불이 나듯 뛰어다니는데 저 새끼는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꼬인다. 물론 히요리가 테츠야 같은 놈에게 관심이 있진 않겠지만, 불평등해도 너무 불평등한 건 아닌가 싶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역시나 일행들의 선두에 선 히요리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가 테츠야의 뒤에 섰다. 그러자 테츠야가 옆으로 비켜서더니, 히요리에게 고개를 까딱 숙였다.
굉장히 뜬금없는 행동. 이에 당황한 히요리가 자신의 큰 눈을 끔벅거리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하세용...”
벌써부터 뒷목이 당겨오는 것 같다. 테츠야 저 새낀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고 지랄인지...
“먼저 주문하세요. 메뉴를 고르는 게 힘들어서.”
“아,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스윗한 척하지 마 씨발아. 미유키가 아니라면 여자랑 말도 잘 못 섞었던 주제에,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혹시 날 따라하려고 하나? 아니면 카페에 아는 사람이 있어 괜히 어깨뽕이 솟아오른 건가? 뭐가 됐든 같잖은 짓을 하는 놈이 짜증난다.
테츠야의 배려에 한 번 더 감사를 표한 히요리는, 자리에 앉는 친구들에게 눈으로 무언가를 말하더니 메뉴판을 쓰윽 훑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말했다.
“캐러멜 마키아토 하나랑, 말차 라떼 하나랑, 초코칩 프라푸치노 하나 주세요. 그리구 쿠폰 가져왔는데, 도장 일곱 개 찍혀있거든요? 음료 세 개 주문하면 열 개니까 하나 무료인가요?”
미리 카페 메뉴를 알아본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스무스하게 말을 할 수는 없었겠지.
“맞아요.”
“그럼 스트로베리 치즈 프라페도 하나 추가할게요.”
“알겠습니다. 결제 도와드릴게요.”
“넹.”
상큼하게 대답한 히요리가 자신의 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번엔 휴대폰 결제는 안 하나? 혹시 과소비를 해서 부모님에게 금지를 당한 건 아니겠지?
지폐를 빼고 내게 내미는 히요리의 가느다란 손가락, 그 끝부분에 칠해진 빨간 네일이 돋보인다. 저 손톱으로 내 가슴과 복부를 살살 긁어주면 무발기사정도 가능할 것 같아.
간지럼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내게 여우같은 눈웃음을 치며 좋아요? 라고 말하는 히요리... 상상만 해도 미칠 정도로 꼴린다.
결제를 끝마치고 쿠폰까지 받은 나는, 진동벨과 거스름돈을 히요리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다시 카운터 앞으로 다가온 테츠야가 렌카에게 말했다.
“저는 그냥 아이스 커피로 하겠습니다.”
카운터에 가까이 있는 내가 아니라 렌카에게 주문을 하는 이유는 뭘까? 내게 말을 걸기는 싫은 건가? 아니, 렌카가 사주는 거니까 그녀에게 말하는 거겠지.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내 스트레스만 쌓인다.
“그럴래? 알았어. 금방 만들어줄게.”
“네, 부장. 자리에 앉으면 되나요?”
“응. 일단 앞전 손님이 먼저 주문한 음료부터 만들어야 해서, 조금 기다려줘.”
“당연하죠. 알겠습니다.”
테츠야는 많고 많은 자리 중에서 굳이 히요리의 옆옆자리에 자신의 푸짐한 엉덩이를 붙였다. 히요리가 예쁘니까 흘깃거리려고 저러는 건가보다. 역시 변태새끼답다. 나도 변태이긴 하지만 저놈은 차원이 다르다. 음흉함과 신성함의 차이라고 하면 딱 맞을 것 같다.
“너 왜 미우라랑 말을 안 해?”
스팀기에 우유를 가져다댄 렌카의 물음. 얼린 우유 조각과 딸기를 블렌더에 넣은 내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굳이 할 필요가 있나요?”
“반갑지 않아? 서로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몰랐으면서.”
“그건 부장이 미우라한테 말했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미유키랑 공부할 때 자주 보는데다, 그때 많이 말해서 괜찮아요.”
“셋이서 공부도 해?”
“그렇죠. 부장도 스승님한테 공부 좀 배워요.”
“아 왜 얘기가 그쪽으로 가...!”
“알았어. 미안해요.”
남들 몰래 렌카의 둔부 위쪽을 토닥인 나는, 토라져선 툴툴거리는 그녀와 함께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히요리가 있는 테이블을 살펴보며 어떠한 대화가 오가는지 잘 들어보았다.
“아사히나. 같이 에펙 하자.”
히요리를 부르며 징징거리는 남자. 카페 테이블에 팔을 쭉 내밀고 그 위에 머리를 얹어놓으면서 귀여운 척을 하는데, 토악질이 나오려고 한다.
넌 다음부터 내 눈에 띄면 사형이다. 히요리에게 꼬리를 치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하는 행동이 좀 싫다.
“에펙? 하고 있는데?”
캐러멜 마키아토를 쪽 들어킨 히요리의 대답에, 남자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뭐...? 언제부터?”
“그저께부터. 리히토가 알려줘서 플레이하는 중인데 재미있더라. 근데 계속 1킬 하고 죽기만 해. 리히토는 막 한 판에 7킬씩 하던데.”
“아 진짜? 나한테 배우지. 내가 리히토보다 잘해.”
“리히토도 그런 말 했어.”
“걔 말은 믿지 마. 나보다 랭크도 한참 낮아.”
발끈한 남자를 보니 왠지 웃기다. 상황을 보니 저놈이 히요리에게 관심이 있는데, 리히토라는 놈도 마찬가지라서 둘이 따로 게임을 하니까 질투심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입가를 가리고 킥킥거린 히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시간 날 때 친구추가 할 테니까 나중에 톡으로 아이디 보내.”
“그래.”
“리히토랑 같이 트리오 하면 재미있겠다. 근데 파밍 끝나면 무슨 총을 써야 돼?”
“돌격소총 중에 카빈이라는 총이 있는데, 반동이 착해서 좋아. 양념만 해주면 내가 다 잡을 수 있어.”
“양념이 뭔데?”
“실드랑 HP를 깎아놓는 게 양념이고, 다른 용어는...”
물 만난 고기마냥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하는 남자. 히요리가 잘 받아주니 신이 났나보다.
내가 저 남자에게 왜 이렇게 적개심이 강한지 이제야 알겠다. 히요리에게 꼬리를 치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단 조금만 우쭈쭈 해주니 좋아하는 게 테츠야랑 닮아서인 것이 컸다.
옆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기다리던 테츠야는 게임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평범한 척은 하고 있지만 놈 특유의 어벙한 연기 때문에 티가 난다.
히요리의 친구가 말한 게임에 관심이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에펙이라는 게임이 국민 게임이라고들 하는데... 테츠야라면 이미 즐기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근데 설마... 설마 테츠야도 저 게임을 하는데, 우연히 히요리와 만나서 인연을 쌓게 되는... 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아닐 거다. 배틀로얄 장르인 게임이라 매칭으로 만나는 건 확률이 너무 낮고, 커뮤니티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는 해도 히요리는 그저 심심풀이용으로만 게임을 즐길 테니까. 요새 강박이 너무 심해진 느낌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게임 말고 다른 얘기하면 안 돼? 나 그 게임 하나도 모른단 말이야.”
히요리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의 칭얼거림에, 남자가 장난 식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여자가 한손으로 주먹을 들며 위협을 했다. 참 보기 좋은 장면이다. 풋풋한 청춘 같아.
“마츠다, 나 이제 아이스커피 준비하러 간다?”
어느새 말차 라떼와 캐러멜 마키아토를 다 만든 렌카의 말. 그에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의 등허리를 두드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히요리와 친구들의 모습이 부러운 건 아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청춘을 즐기고 있기 때문. 언제고 히요리도 내 청춘에 들어와 동화되겠지? 그거면 족하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 마신 잔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테츠야가 렌카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순식간에 칙칙해졌던 카페 분위기가 다시 밝아지겠다.
“벌써 가? 조금 더 있다가 가지.”
“아뇨. 어디 들르는 김에 온 거라서...”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검도는 잘 하고 있지? 괜찮으면...”
렌카의 말을 듣고 있던 내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녀는 지금 테츠야에게 검도부실로 가자고 권할 생각이었다.
화가 난다, 화가 나. 우리 노예가 요즘 선을 자주 넘는다. 왜 나와의 오붓한 시간을 사서 깨뜨리려는 걸까?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혼쭐을 내야겠어.
렌카의 옆으로 슬쩍 접근한 나는, 그녀의 등을 검지로 콕 찔렀다.
“읏...!?”
가슴을 살짝 펴며 움찔하는 렌카.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그녀의 반응에 의아해한 테츠야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 사이 나는 재빨리 렌카의 등에 X표시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렌카는, 내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차리고는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다시금 렌카에게서 떨어진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컵을 닦기 시작하자, 눈치없는 놈답게 어리둥절한 면상으로만 날 훑어본 테츠야가 말했다.
“뭐 하실 말씀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검도...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저번에 전화로 하셨던 말씀이네요?”
“응. 그렇지... 강조하는 거야. 까먹지 말라고.”
“당연히 안 잊어먹죠. 강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놀러 와도 될까요?”
“물론이야. 언제든 환영할게.”
“감사합니다, 부장. 고생하십시오.”
절도 있게 입례를 한 테츠야가 내게도 수고하라고 말을 하더니 카페를 벗어났다. 나가기 전에 히요리 일행들을 흘깃거릴 줄 알았으나, 놈은 의외로 순순히 떠났다. 성장이란 걸 조금 했구나. 아까 그녀들의 대화를 엿들은 건 좀 찌질했지만, 이건 나도 했으니까 봐준다.
조용히 떠드는 히요리 일행들을 본 나는, 무릎을 굽힌 채 렌카에게도 앉으라 손짓했다. 이후 그녀가 날 따라서 주저앉자 정색을 했다.
“검도부실 개인교습은 저와 부장만의 약속이었잖아요. 근데 굳이 미우라까지 불러야겠어요?”
“.... 이게 무슨 거창한 약속이라고... 부장으로서 재능이 있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건 할 수 있잖아... 그리고...”
“그리고?”
“너랑 나만 가면... 네가 이상한 짓을 할 게 뻔하니까...”
그렇고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거절을 했네? 그걸 위해서 부장으로서의 사명도 접어두고 나름 재능이 있는 부원을 내팽개치기까지 했단 말이야? 이건 칭찬감이다. 입술도장 찍어줄게요.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무,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해...!”
“어쨌든 안 됩니다.”
“그래서 말을 얼버무렸잖아...! 근데... 방금 네가 검도부실이라고 그랬다?”
“그랬죠.”
“그럼 우리 집에 오는건 취소지? 부실에서만 가르쳐주면 되겠네?”
“아니요. 부실에서도 하고, 부장 집에서도 하려고요.”
“.... 웃기지 마. 말장난할 거면 부실도 안 갈 거야.”
단호하게 선을 그으려 하는 렌카의 아래쪽 허벅지가 보인다. 쪼그려 앉게 되면서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눌려, 평소에 비해 더욱 두툼해진 살집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치마도 입었으면서 무방비하기는.
손을 슬쩍 내밀어 그 부근을 간지럽히듯 긁은 나는, 렌카가 소리 내지 않고 기겁을 한 렌카가 몸을 휘청거리며 무릎을 펴자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머리에 바람을 훅 부는 렌카의 몸을 계속 만지려하다가,
“나 케이크 주문하고 올게.”
히요리가 의자를 당기며 일어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렌카가 다급하게 내 손을 팍! 하며 치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