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74화 (273/313)

Chapter 274 - 색다른 장소에서의 밀회

“여기 케이크 주문해도 쿠폰 찍어주시나요?”

큼지막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질문을 물어오는 히요리는,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예쁜 모습을 갖고 있었다. 내가 미유키, 치나미, 그리고 렌카와 관계를 갖지 않았더라면,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겠지.

히요리와 대화를 트고 싶긴 하지만, 과도한 관심은 금물이었다. 그녀 같은 눈치와 성격을 지닌 사람을 공략하려면 천천히 알아가는 게 맞았다. 미유키 때처럼 여러 이벤트를 통한 호감도 작업. 그게 필요했다. 지금으로서는 딱 점원과 손님의 관계가 맞았다.

“네, 찍어드립니다.”

“그러면 치즈 케이크 하나랑, 초코 케이크 하나 주문할게요.”

“음료 추가주문은 없으신가요?”

“넹.”

저렇게 말끝을 올린 대답을 할 때마다 히요리를 꼬옥 안아주고 싶어진다. 그러한 마음을 억지로 억누른 나는, 결제를 마친 히요리가 자리로 돌아가자 렌카에게 디저트가 진열되어있는 투명한 진열대를 가리켰다.

“케이크 좀 꺼내줄래요?”

“치즈랑 초코지?”

“어.”

“반말하지 마.”

“그래.”

능청스레 대답하는 나를 노려본 렌카가 케이크를 꺼냈다. 자신이 직접 서빙을 하려는 걸 말린 나는, 그녀에게서 케이크를 받아들고 히요리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이구동성으로 들려오는 감사인사. 음음... 히요리의 동성 친구들은 예의가 바르구나. 예쁜 애 옆에 예쁜 애가 있다는 말이 있듯 얼굴도 예쁘고... 만약 같은 아카데미에 오면 인기가 많을 것 같다.

딱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어주고 카운터로 돌아온 내가 렌카에게 물었다.

“부실은 언제 갈 거예요?”

“그,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일단 호구 준비해놔...”

부실에 있는 장비들은 일부는 업체에 있었고, 일부는 고로 감독이 집으로 가져간 상태. 방학 기간에 관리할 사람이 없었기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호구까지 챙겨야 돼요? 대련이라도 하려고요?”

“그럴 생각이야. 너도 초보 티는 벗었고, 개인 교습이니까 빠른 발전을 위해서...”

“교습을 빌미로 스트레스를 풀 것 같은 느낌인데. 합숙 때처럼 사정없이 팰려고 그러죠?”

“뭐라는 거야...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 그리고 그땐 너도...”

“나도 뭐.”

“.... 잘하던데...”

합숙 때, 렌카가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잘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말하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실력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지만, 오늘 렌카의 칭찬에는 날 향한 부끄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렌카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굉장히 큰 격세지감을 느낀다. 내게 이성으로서의 마음이 없던 그녀의 변화가 좋았고, 꼴리기도 했다.

“칭찬 고맙네요.”

“칭찬한 거 아니야.”

“누가 봐도 칭찬인데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할까요?”

“반응 자체를 하지 마.”

“그래요. 삼촌들은 잘 지내? 장사는 어떻게 되고 있대요?”

“거긴 그냥 뭐... 그럭저럭 되고 있다고 하더라.”

“잘됐네요. 내 얘기는 없었어?”

“있었는데, 별 거 아니야. 한 번 더 와달라거나 그런 말은 전혀 안 했으니까 괜히 콧대 세우지 마.”

그런 말을 했구나. 카페 알바를 그만두고 개학하기 전에 잠깐 도와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고생을 자처하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그 삼촌들이 호탕해서 마음에 드니까. 좋은 인맥은 많으면 많을수록 낫기도 하고.

“알았어요. 그래서 부실은 언제 갈 거냐고?”

“모르겠다고 했잖아.”

“오늘 갈까요?”

“.... 오늘?”

“어제에 비해 손님도 없는 것 같아서 체력도 남아도는데, 교습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늘 가는 것도 괜찮지 않나?”

“그건 좀... 장비를 미리 준비해놓은 것도 아니니까...”

“그런가? 하긴, 휴게실의 침구는 아카데미가 다 회수해가서 휴대용 매트리스 같은 것도 필요하니까... 준비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렌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매트리스 이야기가 나오니 머릿속에 야릇한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

“매, 매트리스는 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캐묻는 모습이 웃기다.

“딱딱한 바닥은 허리랑 등이 아프니까.”

이 정도만 말해줘도, 변태 같은 상상력을 지닌 렌카는 머릿속에서 온갖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색다른 장소에서의 관계에 약간이나마 흥미가 돋아났나보다. 관계를 많이 갖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수위를 더 높여도 될 것 같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어놓은 내가 말했다.

“내일 부실 갈래요?”

“내, 내일...?”

“예. 별로에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왜 이렇게 빨리...”

“빨리 하고 싶어서.”

“어...? 어? 뭘...?”

“교습.”

“아... 교습...”

“저는 장비랑 매트리스만 갖고 가면 되죠?”

“아, 아니... 아직 결정하진 않았는데... 그리고 매트리스는 굳이...”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통보하듯 말하며 대화를 끝낸 나는, 애꿎은 포스기를 자연스러운 척 만지작거리며 렌카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며 수납장을 열더니, 커피콩을 꺼내며 흘끔흘끔 내 눈치를 보는 그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괜히 찔린 듯 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엽다.

드르륵-!

우리가 말없이 은근하게 꽁냥거리고 있는 사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낸 히요리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먹었던 것들을 트레이에 꼼꼼하게 집어넣고 반납대에 올려놓는 그들을 본 내가 방긋 웃었다.

“안녕히 가세요.”

“잘 먹었습니당.”

대표로 인사를 한 히요리가 일행들을 데리고 카페를 나섰다. 쿠폰도 추가로 받아갔으니 또 오겠지? 알바가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다음날. 렌카의 집 앞에 차를 대기시켜둔 나는, 그녀가 대문을 열고 나오는 걸 보았다.

오늘 그녀의 코디는 저번처럼 방어력이 뛰어난 후드와 청바지, 그리고 패딩이었다. 쉽게 몸을 허용해주기 싫다는 의지인가? 아니면 일부러 치마를 입지 않고 날 자극하여 더 격한 애무를 받고 싶은 건가? 둘 다일 가능성도 있겠다.

어쨌거나 렌카의 어깨엔 죽도집이 매어져있었다. 또한 호구가 들어있는 박스와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는데, 저 쇼핑백이 눈에 띄었다. 오늘 관계를 갖고 난 후에 갈아입을 옷들을 챙겨온 모양인데... 왜 저렇게 빵빵할까? 쇼핑백의 용량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쇼핑백은 윗부분이 가디건으로 가려져있었다. 저 정도로 두툼한 쇼핑백에, 내용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듯 옷으로 가리기까지 했다? 어제 내가 했던 말을 이 상황에 대입해보면, 그녀가 뭘 갖고 왔는지 곧바로 답이 나왔다.

눈을 가늘게 뜬 나는 렌카가 트렁크 문을 열어달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잠금을 풀었다.

덜컥.

“안녕.”

열린 트렁크 사이로 인사를 건네고는 박스를 놓은 렌카. 빈손으로 조수석에 온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는 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내가 물었다.

“쇼핑백이 왜 이렇게 두꺼워요?”

“몰라도 돼.”

“담요 갖고 왔죠?”

움찔.

렌카의 온몸이 크게 튕겼다. 정답을 제대로 맞추었다는 증거였다.

내가 딱 장비와 매트리스만 갖고 간다고 해서, 몸을 덮을 것을 챙겨온 것이다. 웃겨서 미칠 것 같다. 더군다나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기도 했다.

“나한테 말하지.”

“무, 뭘 말하는데...”

“담요나 이불 갖고 오라고.”

“.....”

렌카가 서슬퍼런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걸 어떻게 말하느냐고 따지는 듯한 표정.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녀는, 낄낄거린 내가 차를 출발시키자 긴장한 낯으로 글러브박스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야... 그... 그거 가져왔냐...?”

“그거 뭐.”

“저번에... 그거... 목에...”

“초커?”

“.... 그래, 그거... 나 그거 안 할래...”

아예 섹스를 상정한 채로 요구사항을 말하니까 지금 당장 하고 싶어진다. 카페 오픈 전에 탈의실에서 잠깐만 할까? 아니다. 시간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참고 또 참았다가 부실에서 터뜨리자.

“하기 싫어요?”

“시, 싫은 건 아닌데... 장소가 좀...”

혹시라도 경비가 순찰을 돌아다니다가 방울소리를 들을까봐 우려하는 건가?

렌카는 상식적인 장소 밖에서의 관계를 처음 해본다. 그러니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중요하다. 걱정이 다소 과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허락해줘야 맞다.

“알았어요. 안 채울게.”

“어... 그리고 그... 수건...”

“수건은 부실에 그대로 있지 않나?”

“혹시 모르니까...”

“그래요? 카페 거 잠깐 빌릴까? 아니면 새로 사야 하나?”

“카, 카페 걸 가져오면 빌리는 게 아니라 절도잖아... 새로 사야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싶은 렌카의 마음이 무척이나 풋풋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기대도 되었다. 그녀가 큰 각오를 한 게 보였으니까. 왠지 여러 체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인데, 오늘 그녀의 취향을 확실하게 알아봐야겠다.

“그래요. 또 준비할 거 있어요?”

“이 외엔 뭐... 딱히...”

“알았어요.”

치나미도 부르고 싶지만 오늘은 시기가 아니다. 이건 두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니까, 적절한 날을 찾아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유도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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