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0 - 주인공은 완벽한 하루를 경험하고 싶다
다음날 오전. 미유키가 말했던, 과외를 위한 책을 사기 위해 도심으로 나온 나는 먼저 커피숍에 들렀다.
스으윽.
알바를 할 때와는 달리 당당하게 정문의 자동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나는,
“앗! 후배님! 안녕하세요!”
카페 유니폼과 앞치마를 입은 치나미가 카운터에서 날 반기자 눈썹을 꿈틀했다.
“스승님? 왜 거기 있어요?”
“무후후... 렌카 친우님께서 오늘 하루 도와달라고 하셔서요.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답니다.”
“그런 거예요?”
“네.”
“그렇군요. 일은 할만해요?”
“물론이에요. 손님이 이것저것 물어보실 때 답해드리는 것도 재미있고, 음료를 제조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복잡한 음료는 못 만들지만, 그래도 즐겁답니다.”
치나미의 밝은 이미지에 딱 어울리긴 한다. 미래에 그녀에게 자그마한 개인 카페를 운영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메뉴는 대부분이 복숭아와 관련된 것이겠지만.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유니폼이 굉장히 크네요?”
“넷. 후배님이 입으셨던 유니폼이에요.”
내 옷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치나미가 양팔을 아래쪽으로 교차하며 내리고는 몸을 배배 꼬았다. 깜찍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예뻐 죽겠다. 뽀뽀세례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새로 안 받았어요?”
“사장님께서 주신다고 하셨는데 제가 받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하루 일하는 건데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역시 우리 치나미는 착해. 마음씨가 너무 말랑말랑하다. 고와서 미쳐버릴 것 같아.
“부장은 어디 갔어요?”
“창고에 계세요. 그런데 후배님은 여기 어쩐 일이신가요? 놀러 오신 거예요?”
“아뇨. 책을 사러 온 김에 잠깐 들렀습니다.”
“책이요? 어떤 책일까요?”
“수학책요. 미유키가 사오라고 해서.”
“하나자와 후배님께서요?”
“예. 내일 미우라랑 같이 셋이서 공부하거든요. 미유키가 과외시켜줘요.”
“아하. 하나자와 후배님께서 공부를 잘하시니 두 분을 도와드리는 것이로군요.”
“그렇죠.”
“힘내셔서 2학년에는 5등 안쪽에 들어보도록 해보아요!”
불가능한 일을 저렇게 희망찬 목소리로 말하면 내가 노력할 수밖에 없잖아. 두 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하는 치나미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창고에서 렌카가 나왔다.
“어?”
양손에 컵과 컵 홀더를 한아름 들고 온 그녀는, 날 발견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왜 온 건데?”
마주치자마자 하는 말이 저거라니. 아직도 교육이 덜 됐나? 노예교육이 육아도 아니고... 참 힘들다.
“안녕요.”
“.... 안녕.”
“오늘은 손님으로 왔습니다.”
“그걸 핑계로 이것저것 시키려고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안쪽에 자신이 갖고 온 소모품을 내려놓은 렌카의 말. 가식적인 쌀쌀맞음을 보여주고 있는 그녀에게 실소를 터뜨려보인 내가 말했다.
“협박이 귀엽네요. 그럴 생각은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뭐 마실 건데.”
“아메리카노 한 잔 줘요.”
“결제해.”
“돈 받으려고요?”
“손님으로 왔다며. 당연히 받아야지.”
“너무하네.”
“쿠폰 줄 테니까 화 풀든지 말든지.”
어제 이노쨩의 힘을 빌려 그렇게 까불어놓고선 오늘도 기어오르고 있다. 옆에 치나미가 있어서 내가 자신을 못 건든다고 생각하는 건가? 눈을 게슴츠레 뜬 내가 렌카를 지그시 쳐다보자, 렌카가 찔끔하더니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450엔.”
“장난해요? 300엔이잖아.”
“팁 포함이야.”
“팁을 50퍼센트나 가져가는 가게가 어디 있어요?”
“여기.”
“이렇게 나올 거예요?”
“뭐. 불만 있어?”
“많죠.”
“.....”
목소리를 살짝 가라앉히자, 렌카가 이제는 물러나야할 때라고 판단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런 눈치는 빠른 게 왠지 약 오른다.
“카드결제요.”
“.... 장난 좀 친 건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떡해?”
“말투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됐어. 안 받아.”
“그래요 그럼. 커피는 우리 스승님이 만들어줬으면 좋겠네요.”
어깨를 으쓱인 내가 우쭈쭈 하는 표정으로 치나미를 쳐다보자, 얼굴에 화색이 돈 그녀가 방긋 웃었다.
“앗, 그럴까요? 그러면 커피에 복숭아 시럽을 넣어드릴게요.”
“예...? 아뇨. 그러진 마세요.”
“어째서일까요?”
고개를 한쪽 방향으로 기울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서 뭐든 알겠다고 하고 싶지만, 저것만큼은 안 된다. 뭔 커피에 복숭아 시럽이야. 상상만 해도 끔찍한 맛이 날 것 같다.
“보통 커피에 복숭아 시럽을 넣지는 않잖아요.”
“그렇다면 아이스티에 에스프레소를 추가해서 피치 아메리카노를 드시는 건 어떠세요?”
“그것도... 조금...”
“어째서일까요? 후배님 또한 복숭아를 좋아하시지 않나요?”
“좋아하긴 하지만 복숭아 커피 같은 바리에이션은 조금... 낯서네요. 그리고 오늘은 단 게 별로 당기지 않습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일반 커피로 드려야겠네요.”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아이스로 드려요?”
“예.”
“알겠어요.”
기분이 좋아진 듯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린 치나미가 컵에 얼음을 담기 시작했다. 판다처럼 토실토실한 그녀의 뒷모습을 감상하던 나는, 치나미에게 쩔쩔매는 내가 웃겼는지 작게 킥킥거리는 렌카를 쳐다보았다.
“뭐가 웃겨요?”
“웃기니까. 난 웃으면 안 되냐?”
“사회에 불만이 많은 표정이네요.”
“어쩌라고.”
음음... 따박따박 대드는 렌카를 보니 아날 플러그 교육이 마려워진다. 너무 빠른가? 조금은 참아야하나? 고양이 꼬리가 달린 플러그를 사놓기는 했는데... 오늘 깊게 고민해봐야겠다.
“.... 무, 뭐야...?”
“뭐가.”
“방금 이상한 눈으로 봤잖아...”
“피해망상이라도 있어요?”
“그게 아니라...”
스으윽.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렌카는, 카페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오자 억지로 밝게 웃어보였다.
“어서 오세요...! 카페 24입니다.”
그 사이 구석자리에 앉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치나미가 트레이를 들고 와 테이블에 내려놓자 옆자리를 톡톡 쳤다.
“앉아요.”
그러자 치나미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선홍색을 띠었다. 저번에 이곳에서 했던 스킨십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넷...? 저는 오늘 손님이 아니라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거라서... 조금 곤란한데요...”
“손님도 별로 없는데 2분만 같이 있다가 가요.”
“아, 안 되는데요...”
“스승님에게조차 환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서러워지려고 하네요.”
“낫...?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실 정도로 제가 미덥지 못하신 건가요? 일을 하러 왔으면 딴 짓하지 말고 열심히 해야지요...!”
“저번에는 일하고 있던 저랑 잠깐 놀았었잖아요.”
“후배님께선 정식 알바생이라 일에 적응을 잘 하셨고, 사장님과의 친밀도가 높았던 것까지 감안하셔야 맞는 게 아닐까요? 그에 반해 저는 렌카의 부탁을 받고 온 일일 알바생이에요. 제가 땡땡이를 쳐버린다면 사장님께 저를 소개해주신 렌카의 마음이 어떨 것 같나요?”
“들키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요?”
“어허...! 어허! 아주 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래서는 안 돼요. 제가 손님으로 왔을 당시 후배님께서 제 옆에 앉았을 때도 심장이 콩닥거렸고 죄스러웠는데,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은 그 마음이 더할 거예요. 오늘은 절대 후배님의 옆에 앉지 않겠어요.”
허리춤에 꺾은 손목을 얹어놓고 엄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 오랜만에 검도부실에서 날 가르쳐줄 때의 치나미가 보이는 것 같다. 그때 호구를 대신 입혀주면서 호면을 콩콩 때렸었는데... 생각하니까 미소가 지어진다.
그나저나 이대로는 치나미를 붙잡아둘 수 없을 듯하다. 그녀에게 밉보이는 건 싫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아쉽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린 나는, 치나미가 가져다준 유리잔에 빨대를 꽂고 커피를 홀짝 빨아마셨다.
“스승님이 만들어줘서 그런지 평소의 커피보다 맛있네요.”
“그럴 리가요? 원두의 함량과 물의 양은 가이드와 똑같은데요.”
가끔 치나미는 내 말문을 턱 막히게 한다. 지금처럼 이런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춘 것 같은 칭찬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말이지. 참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혹시 복숭아 시럽을 넣지 않겠다고 해서 화난 건 아니겠지?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기쁜 마음으로 뿌듯해하겠어요.”
아아... 방긋 웃는 치나미가 너무나도 귀엽다. 당장 저 아담한 체구를 꽉 끌어안고,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싶다는, 몸에 오일을 듬뿍 발라 미끄럽고 말랑한 피부를 마사지해주고 싶다는, 치나미 특유의 상큼하고 특이한 신음을 듣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그러면 저는 다시 일을 하러 가볼게요. 음료를 만드는 게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네요.”
만화영화에 나오는 청순한 주인공마냥 빈 트레이를 가슴께에 안는 치나미.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표정에 드러나는 터라 나까지도 텐션이 올라가는 느낌이다.
“그래요.”
“다 드신 컵은 반납대에 가져가지 마시고, 그냥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세요.”
“왜요?”
“치우는 것도 재미있거든요.”
우리 치나미는 취향이 굉장히 특이하구나. 테이블 청소가 즐겁다니. 근데 왠지 어울린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맛있게 드세요.”
“기다려요.”
“네?”
고개를 갸웃하는 치나미를 향해 입술을 살짝 내밀자, 당황한 그녀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머뭇머뭇 내게 다가와, 복숭아색 틴트가 발라져있는 입술을 내밀어 내 입술에 살포시 가져다대었다.
토옥 하고 닿는 감촉이 무척 좋다. 발랄한 치나미도 봤고, 뚱한 렌카도 봤고, 미유키도 보면 되니 오늘 당 충전은 완벽하다. 여기서 히요리만 만날 수 있다면 최고의 하루가 될 것 같은데... 기대감을 품어 봐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