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1 - 주인공은 완벽한 하루를 경험하고 싶다 #2
“안녕하세요. 혹시 대입수학II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은 채 여자 점원에게 저리 묻자, 책을 정리하던 그녀가 흠칫하더니 무언가를 다급하게 찾는 사람마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한쪽 팔을 뻗어 방향을 가리켰다.
“수학 코너는 저기...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서점 입구에 남자 점원도 있었음에도, 굳이 멀리 떨어진 여자 점원에게 다가간 이유가 이것이다. 남자보다 훨씬 친절하니까. 그 사유는 내 얼굴과 목소리 때문이겠지. 굳이 무뚝뚝하거나 가식적인 대답을 듣는 것보단, 과도하더라도 진실하게 친절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게 좋지 않겠는가.
“대입수학... 대입수학... 아, 여기 있네요.”
수학책이 늘어서있는 코너로 날 데려간 것도 모자라 책까지 찾아주는 점원. 그녀가 내민 책을 받은 내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바로 결제해드릴까요?”
“아뇨. 좀 더 둘러보려고요.”
“네.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예.”
머뭇거리며 멀어지는 점원을 보내고, 나는 서점 내부를 훑어보았다. 크기가 워낙 큰 것도 그렇고, 책장을 비롯한 진열대에 책들이 빼곡하게 있는 것도 그렇고...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특유의 새 종이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아파지려고 한다. 만화책이나 몇 권 고른 다음 돌아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코믹스 코너로 향하고 여러 만화의 제목들을 보고 있는데,
“이거 재미있어 보인다. 그치, 히요리?”
“응. 나도 같은 생각했어.”
조금 떨어진 코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꼭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청아한 음색. 그 주인공은 히요리였다.
혹시나, 혹시나 서점에 히요리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었고, 만나고 싶다 생각을 했는데 그게 현실이 될 줄이야. 오늘은 운수가 아주 좋은 날이다. 주인공 버프... 너무 달달한 거 아닌가?
예전에도 생각했듯, 히요리에게는 대놓고 들이대면 안 된다. 특히 지금 같은... 카페 알바와 손님이라는 가벼운 관계인 상태에서 아는 척을 한다면 히요리는 날 스토커로 생각할 거다.
상황에 맞게 행동하자. 실제로도 우연히 그녀를 만난 것이잖은가. 새끼 고양이의 경계심을 풀어주듯,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거다.
설레는 마음을 뒤로한 채로, 나는 만화를 고르는 척 히요리가 있는 코너로 천천히 움직였다.
“이거 장르 뭐야? 로맨스?”
“로맨스 스릴러 같은데... 표지가 무서워.”
점점 선명하게 들려오는 히요리와 친구의 대화. 맥락을 보아하니 로맨스 장르 만화책을 고르는 것 같았다.
코너에 조용히 도착한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슬쩍 곁눈질했다. 멀찍이서 쪼그려 앉은 히요리가 입은 치마 아래로, 군살 하나 없는 새하얀 허벅지가 돋보인다.
허어...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내가 그들의 눈알을 죄다 파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조심성이 없구나.
스타킹은 안 신은 것 같다. 겨울인데 춥지는 않을까? 이렇게 흘끔거리니 진짜로 스토커가 된 것 같아.
테츠야와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지. 만나고 싶다는 소원도 이뤘으니까 염탐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약간의 자괴감과 창피한 감정이 든 내가 친구와 숙덕거리는 히요리를 놔두고 발걸음을 다시 돌리려는 찰나,
“저기, 죄송한데용...”
히요리 특유의 끝부분이 올라간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설마 날 부를 줄 몰랐기에, 가슴이 순간적으로 크게 뛰었다. 허나 억지로 흥분을 억누르니 조금 진정이 되었고, 그렇게 최대한 마음을 다스린 나는 몸을 돌렸다.
“예?”
“위에 있는 책을 꺼내고 싶은데 키가 안 닿아서... 죄송하지만 저거 하나만 꺼내주시면 안 될까요?”
헤실거리는 낯으로 위쪽을 가리키는 히요리. 검지만 빼꼼 내민 손가락 끝에 빨갛게 칠해져있는 네일이 왠지 모르게 야릇해보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히요리가 가리킨 부근에 있는 책을 건드렸다.
“이거요?”
“아니요. 그 옆에 거예요.”
“이거? ‘그 남자 그 여자의 집착’?”
“네, 맞아요.”
서로 집착하는 스토리의 로맨스 만화인가? 표지도 나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데, 히요리가 선택한 책이니만큼 재미있을 것 같다.
“1권만 빼드리면 돼요?”
“넹.”
그녀는 무언가 재미있는 게 생각난 듯한, 말괄량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저 얼굴을 보고 오해하고는 한다. 혹시 히요리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저 표정은 히요리의 장난기 많은 성격이 드러난 것일 뿐이었다. 쉽게 말해, 그냥 평소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날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건가? 내가 쉽게 잊혀질만한 얼굴과 덩치는 아닌데... 아주아주 약간 서운해지려고 한다.
뽑은 책을 히요리에게 건네주자,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근데... 혹시 카페에서 일하시는 분 아니세요? 카페 24요.”
알아봐주었구나. 서운함이 싹 가신다. 히요리의 기억에 남았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나도 아는 체를 해야 할까? 괜히 친밀하게 다가갔다가는 오히려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쭈구리가 된 거지? 공략 난이도가 최상이라는 가이드북이 자꾸 생각나서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데, 이건 나답지 않다.
히요리도 쉽게 잊히는 얼굴이 절대 아니잖은가. 내가 알아본다 해도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거다. 뒤를 밟았다고 오해를 한다면 또 별개의 문제가 일어나긴 하겠지만, 살짝 놀란 내색을 곁들이면 괜찮겠지.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나는, 히요리와 그녀의 친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며, 그녀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저번에 왔던 손님들이신가요? 쿠폰으로 무료 음료 주문하셨던...”
“맞아요! 어떻게 알았... 앗, 죄송...”
반가운 기색으로 대답을 하다가 입을 가리는 그녀. 서점에서 목소리를 키우니 무안했나보다.
미유키보다 반 뼘 정도는 작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쿠폰으로 주문하시는 일반 손님은 드물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손님?”
“쿠폰을 다 채운 분들은 대부분 카페 주변 회사나 가게에 다니는 직원이거든요.”
“아 진짜요?”
“예.”
히요리는 이 만남을 인연이라고 생각할까? 표정을 살펴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 방금 어떻게 알았냐며 물어본 것도 그저 형식적인 인사를 하려는 의도였겠지? 히요리는 낯선 사람한테도 붙임성이 좋으니까.
그나저나 서로 존댓말을 쓰니 은근히 거리감이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현재 우리 사이는 누가 먼저 들이대지 않는 이상 더 발전하기도, 퇴보하기도 어려운 관계일 테니 당연하긴 하다.
솔직히 대화를 이어가려면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었지만, 딱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다는 직감이 든다. 본격적인 호감도 쌓기는 히요리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다.
그 전에 몇 번 마주칠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히요리가 더 이상 궁금해 하는 것도 없는 듯하니 내 쪽에서 먼저 적당히 끊자. 임팩트가 별로 없는 심심한 대화였지만, 내 얼굴을 더욱 각인시킬 수 있어 만족스럽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오세요.”
“책 대신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용.”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대충 아무 책을 하나 뽑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이제 패션잡지 보러 가자.”
나와 했던 대화는 곧바로 잊어버린 듯, 친구와 또 다시 떠들기 시작한 히요리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아카데미에서 날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그때는 정말 인연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한 나는 고른 만화책을 보고는 소리 내지 않고 기겁을 했다. 성 도착증과 관련된, 제법 야한 만화였기 때문.
이딴 걸 일반 서점에서 왜 파는 거야? 설마 히요리가 보진 않았겠지? 뒤에서 저 남자가 이상한 걸 골랐다는 얘기도 들려오지 않았고,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리지도 않았으니까... 아닐 거다.
운수 좋은 날엔 꼭 마가 한 번 끼는구나. 기분이 더럽다. 이걸 굳이 자세히 표현하자면, 히로인과의 대화 도중 난입한 테츠야 같아.
**
집으로 돌아와 빈둥거리던 나는, 미유키가 뜬금없이 집에 들이닥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냐? 집에 있는다며?”
“마츠다 군. 공부하자.”
“공부? 내일이잖아.”
내일은 테츠야의 집으로 가는 날이었다. 그렇게 약속되어있을 텐데 갑자기 공부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뭘까? 그에 대한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테츠야 군네 집이 공사한대서, 다른 곳에서 해야 돼.”
“공사?”
“응. 테츠야 군의 집 지하실이 조금 많이 낡았거든. 그래서 페인트랑 시멘트 바르느라 냄새가 많이 나나봐. 쿵쿵거리는 소리도 나구...”
“갑자기 공사를 한다고?”
“예정보다 공사기간이 늦어지고 있대.”
놈의 어머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저번에 봤던 태닝녀가 누나인지 동생인지 궁금했는데 갑자기 웬 공사인지. 설마 테츠야가 날 집에 들이기 싫어 핑계를 대고 있는 건가?
아니, 테츠야가 아무리 찌질하다지만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신께서 그런 놈의 가족을 네토리하지 말라고 계시를 내려주시는 건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신은 꼴알못이다. 날 괴롭히던, 혹은 내가 싫어하던 친구에게 빼앗긴 가족. 야동이나 만화에 무수한 바리에이션이 있는, 매니아 층이 탄탄한 단골 NTR 소재인데... 그만큼 안정적인 맛도 보장되어있고...
참으로 비통하도다.
“그래?”
“응. 미안하다고 하더라구.”
“그럼 어쩔 수 없는데 왜 오늘 공부를 하자고 해? 내일 어디에서든 하면 되지.”
“책을 사러 갔을 때 마츠다 군의 공부 욕구가 마구 솟아났을 테니까, 이참에 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수학책 보자마자 머리 아팠어.”
“그 정도야? 그럼 더욱 오늘 해야겠네. 열정을 만들어줘야 해.”
“이건 무슨 억지냐?”
“안 할 거야?”
말투를 구슬프게 바꾸는데 안 할 수가 있나... 연기인 걸 알면서도 넘어가줘야하는 이 마음... 누가 알아줄까.
“나야 오늘 하든 내일 하든 상관은 없지만 어디서 하려고?”
헛웃음을 친 내가 승낙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냅다 표정을 편 그녀가 대답했다.
“카페에서 하려고 해.”
“카페? 어느 카페?”
“마츠다 군이 일하는 카페. 근데 거기서 공부해도 된대?”
거기에서 공부를 한다고? 잘됐다. 렌카에게 미유키와 내 사이를 어렴풋이 알려줄 수 있는 기회도 되고... 심지어 지금은 치나미도 있어서, 세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여줄 수 있기도 하다.
어쩌면 테츠야의 집 공사와 지금 이 미유키의 변덕은 신님의 훌륭한 안배였을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의심해서 죄송스럽구나. 내일 신사에 가서 새전해야겠다.
“될 거야. 미우라한테는 말해놨고?”
“시간 맞춰서 온대.”
“미리 말한 거면 아예 내가 승낙할 걸 상정했다는 뜻이네.”
“응.”
감히 그런 여우같은 짓을 하다니... 뻔뻔한 지고. 그래도 내가 잘못한 게 많으니까 넘어가자.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오늘 하면 내일은 쉬는 거다?”
“내일도 해야지.”
“.... 진심으로?”
“농담이야.”
농담을 진담처럼 말하니까 무섭잖아.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나는, 미유키가 내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다가오자 피식했다. 하는 짓이 참 예뻐서 미워할 수가 없다. 미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