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2 - 확인사살
“안녕하세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미유키. 뜬금없이 찾아온 그녀와 나를, 렌카와 치나미가 얼떨떨하지만 반가운 기색이 담겨있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나자와네...? 안녕. 마츠다까지 여긴 무슨 일이야?”
“공부하러 왔는데 혹시 민폐가 될까요?”
“공부? 여기서?”
“네.”
“시끄럽게 떠들지만 않으면 괜찮긴 한데...”
“구석에서 조용히 있을게요. 음료도 1시간에 한 번씩은 주문하려고 해요.”
“눈치 보면서 주문할 필요는 전혀 없어. 그런데 너희 둘만 하는 거야?”
“아뇨. 테츠야 군도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미우라까지? 아... 네가 마츠다랑 미우라를 가르쳐준다고 그랬었는데 그 공부인가보네?”
“맞아요.”
렌카의 시선이 슬쩍 내 쪽으로 향했다. 왜 이곳으로 왔냐는 것 같은 눈빛. 딱히 켕기는 게 있는 건 아닌 듯하고, 그냥 진짜 궁금했나보다. 하긴, 예고도 없이 찾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나자와 후배님, 그간 무탈하게 지내셨나요?”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 치나미의 안부에, 미유키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나나세 선배께서도 잘 지내셨어요?”
“넷. 물론이랍니다.”
치나미의 얼굴은 아주 약간 붉어져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던 일이 생각난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말려든 미유키의 뺨 또한 점점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응...?”
쌍둥이처럼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두 사람을 본 렌카의 의아한 탄성. 그에 흠칫한 미유키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메뉴를 보았다.
“일단... 마츠다 군은 뭐 마실 거야?”
둘 다 무안해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내가 말했다.
“스트로베리 바나나 프라페.”
그러자 렌카가 미간을 꿈틀하더니 날 노려보았다. 스트로베리 바나나 프라페는 내가 시음조차 해본 적 없는, 만들기 가장 귀찮은 음료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 한다는 걸 눈치챈 렌카는, 미유키와 치나미가 옆에 있어 대놓고 욕은 못하겠는지 입술만을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메뉴판을 다 살핀 듯한 미유키를 보고는, 날 대할 때의 툴툴거리는 태도와는 정반대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자와, 너는?”
나더러 들으라는 듯 말하는 것 같은데, 저럴수록 더 엄한 교육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까? 알고 있어서 일부러 저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벌을 더 달라고 말이다.
“음... 저는 간단하게 카페라떼로 할게요.”
“따뜻하게?”
“네, 따뜻하게 부탁드려요.”
“알았어.”
“계산할게요. 얼마예요?”
“모처럼 왔으니까 내가 사줄게.”
“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거절하면 굉장히 슬플 것 같아.”
능청스런 대답으로 미유키의 말문을 턱 막히게 하는 렌카. 저렇게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날 보고 배운 건가 싶다.
“그게... 그래도...”
손에 든 지갑을 열다 말고 우물쭈물하는 미유키를, 렌카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달랬다.
“너무 부담 갖지 마.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자 저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판단하였을까? 미유키가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갑을 집어넣었다.
“그럼... 잘 마실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응. 진동벨 갖고 가.”
“네...!”
음음... 벌써부터 저런 우애가 좋은 모습을 보이다니. 미래가 밝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렇게 진동벨을 든 미유키와 함께 구석 자리로 가려는데, 렌카가 날 불렀다.
“야, 마츠다.”
“예?”
“어디 가?”
“자리에 가죠.”
“너는 돈 내.”
“사준다면서?”
“넌 아냐.”
“진심이에요?”
“어.”
“그래요? 알겠습니다.”
큰 반발 없이 결제를 하려고 하는 날 보고 불안감이 차올랐는지, 찔끔한 렌카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노, 농담이야. 내지 마.”
내가 보복을 할 것 같아서 우려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냥 낼게요.”
“내지 말라니까...?”
“낸다니까?”
“내지 말라고...!”
이젠 화까지 내면서까지 결제를 만류하는 렌카가 웃겼던 나는,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아내며 메뉴를 바꾸었다.
“알았어요. 프라페는 됐고, 그냥 딸기 라떼로 주세요.”
“.... 프라페는 왜 안 먹는데? 비싸서?”
“아뇨. 원래 먹을 생각 없었어요.”
“그래...?”
미심쩍은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렌카. 내가 프라페를 진짜로 먹기 싫어서인 건지, 아니면 만들기 쉬운 음료로 바꿔 배려를 해주는 건지 파악해보려는 듯했다.
“후배님, 후배님. 딸기 라떼는 제가 만들어드릴까요?”
렌카가 그러는 와중 난입한 치나미의 말. 방긋 웃어보인 내가 대답했다.
“예. 그래주셨으면 좋겠네요.”
“후후... 몇 시간 만에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제 솜씨를 보여드려야겠네요.”
자신만만한 말투로 저리 말한 치나미가 냉장고에서 딸기청을 꺼냈다. 저기에 우유를 붓고 섞기만 하면 완성인데 말하는 건 무슨 오마카세 장인 같다. 그래도 귀여워서 좋아.
그나저나 이렇게나 분위기가 좋은데 잠시 후 테츠야가 온다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요즘 복싱을 배운다고 대가리가 조금 커진 느낌이던데... 나한테 스파링 한 판 하자고 안 하려나?
**
치나미가 내어온 따뜻한 카페라떼를 한 잔 들이켠 미유키의 얼굴이 노곤해졌다. 미유키가 커피를 즐기는 성격은 아닌데, 오늘따라 날씨가 워낙 추워서 내부가 따뜻해지니 기분이 좋아졌나보다.
“맛있냐?”
“응. 마츠다 군도 마셔볼래?”
“아니. 난 됐다.”
“마츠다 군은 왜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거야? 차 안에서 춥다고 투덜거렸으면서.”
내가 그랬었나?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버릇처럼 나온 말이었겠지. 딸기 라떼 마실래?”
“응. 한 입만.”
내민 잔에 꽂혀있는 버블티용 빨대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미유키. 내가 입을 대었던 빨대 끄트머리를 스스럼없이 무는 모습이 기껍다. 렌카는 지금 이 장면을 봤을까? 일을 하면서 슬쩍슬쩍 미유키와 내가 앉은 자리를 엿보던데, 봤을 수도 있겠다.
“안녕하십니까, 부장.”
헤실거리는 미유키와 달달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카페 입구서부터 테츠야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콧방귀를 꼈다. 꽃밭에 똥가루를 뿌리는 놈이 왔구나.
“어서 와.”
상냥한 투로 그를 맞이하는 렌카에게 반드시 채찍질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치나미에게도 인사를 하는 테츠야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나나세 선배.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안녕하셔요. 후배님들은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음음. 우리 치나미는 테츠야 따위에겐 관심이 전혀 없는 것 같은 목소리구나. 사실 치나미는 테츠야와의 접점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없어서 저런 반응이 당연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특하다. 렌카와는 달리 정성을 다한 마사지로 보답해주어야겠다.
치나미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본 테츠야는, 미유키와 내가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보더니 한손을 흔들었다. 얼핏 우리 둘에게 하는 인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건 미유키에게만 하는 인사였다. 시선 자체가 미유키에게만 향해있었으니까.
여느 때처럼 얼빵한 면상으로 쓸데없는 짓을 한 놈은, 렌카가 커피를 사준다고 하자 감사하다고 말하며 커피를 주문했다. 역시 눈치없는 놈답게 예의상 거절하지도 않는구나.
물론 나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나는 렌카의 주인이기도 한데다 그녀에게 보답 선물을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헌데 지금 헤벌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놈은 그냥 냅다 호의를 받아들이기만 하겠지. 혹시나 렌카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면서.
테츠야를 향한 증오심을 키워나가고 있는 사이, 놈이 테이블로 다가와 미유키에게 같잖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간 딱 맞춰서 왔지?”
“응, 잘했어. 얼른 앉아.”
“바로 시작하게?”
“그러려구.”
“나 커피 올 때까지만 조금 쉬면 안 될까?”
“뭐야... 미루는 게 마츠다 군이랑 닮았네?”
이건 쉬이 넘어갈 수가 없겠는데. 세상 그 모든 욕을 한데 모아놔도 테츠야와 닮았다는 말은 버티기가 힘들다. 기분이 아주아주 나빠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유키가 테츠야에게 얼른 앉으라 말하고는 나와 놈의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는 내 앞에 놓인 잔을 아주 자연스럽게 집어들더니, 아까처럼 빨대에 입을 가져가 딸기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응?’
그 돌발적인 행동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미유키가 이제 나와의 관계를 숨길 생각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미유키로서는 그저 자연스럽게 한 일이었겠지. 허나 테츠야가 받아들이는 감정은 다를 거다. 그에게 있어서, 미유키의 이러한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컸다. 확인사살.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 것이다.
빨대를 공유한다는 건 커플 끼리조차도 호불호가 갈리는 행위였다. 물론 사이가 굉장히 가깝다면 그저 친구 사이임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무척 드물었고, 미유키는 그 드문 케이스에 속하지 않았다.
아무리 테츠야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소꿉친구라고는 하지만 스킨십이라 여길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며, 이런 빨대 공유 같은 행동을 한 적은 당연히 없었다. 소꿉친구라는 사이답게 다른 사람들보다 살갑게 대해주고, 자주 챙겨주기는 하였으나 그게 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테츠야 자신에겐 보여준 적도 없는 일을 서슴지 않고 내게 했다? 아무리 대가리가 모자란 테츠야라지만, 지금 같은 미유키의 행동을 보고도 눈치를 못 채지는 않겠지.
“.....”
예상대로, 빨대를 통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 딸기 덩어리를 냠냠 먹는 미유키를 본 놈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속이 타들어가고 있으려나? 저놈의 마음속을 엿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오늘처럼 강렬하게 느낀 건 처음이다.
“뭐해, 둘 다?”
서로 다른 이유로 벙 쪄있는 우리를 살핀 미유키의 물음에, 테츠야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내가 말했다.
“너 보는데.”
“왜?”
“그냥.”
얼핏 들어보면 농담기가 살짝 섞여있는 일반적이고도 시답잖은 대화였으나, 나와 미유키의 표정을 보면 달랐다. 서로를 쳐다보며 눈꼬리를 올리고 있는 우리 사이엔 분명하게 달달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오늘의 미유키는 유독 사랑스럽구나. 당장 키스하고 싶어진다. 나와 테츠야가 닮았다는 말을 한 건 한 번쯤은 넘어가줘도 될 것 같다. 오늘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미유키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