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84화 (283/313)

Chapter 284 - 목격 #2

“그게 뭔지 정확히 말을 해줘야 제가 설명을 할 거 아니에요.”

시종일관 태연한 내 태도에, 렌카가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거...! 그...”

나와 후배위까지 한 마당인데 아직도 신체부위를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건가? 어지간하다. 이런 쪽의 순수함으로만 따지면 치나미보다 더한 것 같다. 말하는 투를 들어보면 가장 기가 세고 내성이 강한 듯한데 말이다.

“그 뭐.”

“그거 있잖아...!”

“말 못하겠으면 행동으로 해봐요.”

“.....”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을까? 냅다 고개를 끄덕인 렌카가 팔을 45도 각도로 뻗더니, 허공을 토닥거리며 엉덩이를 만지는 시늉을 했다. 나한테 직접 해주길 바랐는데 아쉽구나.

“엉덩이?”

“그래... 거기... 네가 음료 주문하러 오기 전에 하나자와가 네 거길 두드렸잖아...”

“예, 그랬죠.”

“너희가 그런 관계라는 거... 치나미는 알아...?”

아예 나와 미유키가 가까운 사이라는 걸 상정하고 있구나. 하긴, 그냥 친구의 엉덩이를 서슴없이 두드리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저럴 만도 하다.

렌카는 치나미와 내가 만나고 있는 줄 아는 채로 나와 관계를 가졌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미유키와 사귄다는 걸 안다고 해봤자, 그녀가 따질 건덕지가 없었다. 지금처럼 치나미는 아냐고 묻는 것밖엔 못하겠지.

어찌 보면 가장 약한... 힘을 쓸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게 렌카였다. 격을 나누는 게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나는 모든 히로인들을 사랑한다.

어쨌든 렌카의 저 질문은 내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치나미가 상처를 받으면 어떡하냐는 뜻이 내포되어있었다.

“대답해...!”

입을 다물고 있는 날 향한 렌카의 재촉. 웃음기를 싹 뺀 내가 대답했다.

“알아요.”

“.... 뭐?”

렌카의 얼굴이 순식간에 벙 쪄졌다.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 두 눈을 끔벅이며 날 올려다본 그녀가, 자신이 들은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안다고...?”

“예, 알아요.”

“지, 진짜로...? 농담하는 거 아니고...?”

“아닙니다.”

“응...? 마, 말이 되나...?”

렌카의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 치나미와 미유키, 그리고 내게 특수한 성벽이 있지 않는 이상, 일반적으론 말이 안 되긴 하니까. 성인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라 황당하기 그지없겠지.

눈에 힘이 완전히 풀린 채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그녀를 향해, 내가 말했다.

“원래는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부장이 괜한 오해를 할까봐 딱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쓰리섬 까지 했다고 말해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치나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 조금 꺼려진다. 물론 쓰리섬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맛만 본 것이지만 말이다.

“여, 여기까지만 한다고? 혹시 이것 외에도 더 있어...?”

“그건 스승님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내가...? 내가 직접?”

“지금 말고, 나중에요.”

최소한 렌카, 그리고 치나미와 쓰리섬 비스무리한 일을 할 때까지는 비밀로 하는 게 나았다. 치나미가 렌카와 내 사이를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말해버리면 일이 꽤나 꼬여버리게 될 터. 오해가 오해를 낳는 상황이 벌어지는 건 껄끄러우니까, 알맞은 상황에 말하는 게 중요했다.

렌카도 처한 상황 상 경거망동하지 않고, 말할 타이밍이 다가오면 분명히 눈치를 채겠지. 그거면 된 거다.

“이만 들어갈까요?”

이어지는 내 말에 온몸을 부르르 떤 렌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너, 너 뭐야...?”

“뭐가?”

“뭐하는 놈이냐고...!”

맥락이 빠져 있잖아. 뭐하는 놈인데 이렇게 태연할 수 있냐고 묻는 것 같다. 벌써부터 이토록 혼란스러워하면 어떡하니. 아직 히요리도 남았는데.

“저는 저죠.”

아리송한 대답을 한 나는 렌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흐앗!?”

그러자 렌카가 다소 큰 탄성을 터뜨리더니, 눈에 띄게 움찔하며 반 발자국 물러났다. 미유키가 했던 일을 자신에게 그대로 행하니 이상야릇한 생각이 든 듯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킥킥거린 나는, 추우니 오래 있지 말라고 말하며 먼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뜬금없지만 갑자기 양호선생님의 풍만한 가슴이 생각난다. 내게 전혀 관심이 없는 무덤덤한 투로 상처를 치료해주는 그녀... 그런 사람이 밤엔 아주 외설적으로 앙앙거리던데, 개학을 하면 가장 먼저 양호실에 찾아가볼까 싶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선배!”

밝은 미소를 지으며 렌카와 치나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미유키.

“후배님들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마주 웃는 것으로 미유키를 배웅하는 치나미와는 달리, 렌카의 얼굴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웃는지, 우는지, 아니면 화가 나는 건지 헷갈리는 듯한 모습. 저 얼굴이 의외로 꼴린다고 생각하며, 나는 미유키, 테츠야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4구짜리 컵 캐리어에 아이스티 두 잔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담아둔 나는, 차에 타자마자 테츠야에게 종이컵을 건넸다.

“들고 있다가 내리면 마셔.”

“이거 네가 사는 거야?”

“어.”

“고맙다. 잘 마실게.”

감사를 전하고는 종이컵을 쥔 테츠야의 손에 힘이 살포시 들어가는 게 보인다. 패배감이 큰 건가? 하긴, 미유키가 자신보다 나를 더 챙기는 걸 봤고, 자긴 아무것도 못한 채로 그녀와 내게 뭔가를 받기만 하니까 남자로서의 자존감이 팍팍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미유키의 동네로 돌아가는 차 안. 룸미러를 슬쩍 본 나는, 뒷좌석에 앉은 테츠야가 미유키와 날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야 왜 미유키가 매번 조수석을 고집했는지 알아차린 것 같다. 눈치가 조금 생겼구나. 앞으로 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져야하는 상황을 구분할 수는 있겠지?

미유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테츠야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장난기가 약간 섞여있는 투로 말했다.

“야, 미우라.”

“응?”

“문 세게 닫지 마라.”

“아, 그래. 알았어.”

그러자 차에서 내린 테츠야가 미유키에게 나중에 보자며 손을 흔들더니 문을 닫았다.

쿵.

경고를 해서인지 조심스럽게 닫긴 했구나. 풀이 죽은 채 집으로 걸어가는 놈의 뒷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느낌이... 들진 않는다. 태워줘서 고맙다는 기본적인 감사도 하지 않는 테츠야를 보면, 놈은 여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에서야 저렇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지만, 나중에 가면 또 예전처럼 자고 있는 내게 실수인 척 농구공을 던지거나, 은근한 뒷담으로 날 돌려 까거나 할 테지. 그럴 경우, 예전처럼 미유키의 눈치를 본다는 이유로 참고 넘어가지만은 않을 거다.

“마츠다 군.”

“왜.”

“잠깐 우리 집 들러서 공부할래?”

“.... 진심이냐?”

“응.”

“아니. 싫어.”

“왜? 난 마츠다 군이랑 둘이서 공부하고 싶은데.”

둘이서라... 굉장히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어떤 공부를 말하는 걸까? 요새 미유키의 성욕이 확 오른 걸 보면 일반적인 공부가 아니라 성적인 공부 같은데...

“아주머니랑 아저씨 계셔?”

“있어.”

“그럼 오랜만에 인사드릴까?”

“그러자. 아이스티 마실래?”

“줘봐.”

배시시 웃은 미유키가 차량 컵 홀더에 놓인 아이스티 잔을 빼내더니 내 쪽으로 내밀었다. 빨대를 입으로 물고 한 모금 쭈욱 빨아들이자, 진한 달달함이 느껴졌다. 맛이 좋은 쪽으로 조금 달라졌는데, 혹시 치나미가 따로 비율조절을 한 건가?

“어때?”

“맛있네.”

“진짜네? 아이스티가 다 거기서 거기일 줄 알았는데... 이거 누가 만든 거야? 카페 사장님?”

내게 주었던 아이스티를 빨아 마셔본 미유키의 감탄. 속으로 대소를 터뜨린 내가 대답했다.

“나나세 선배일 걸? 복숭아 좋아하잖아.”

“아, 그랬지. 근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건가?”

“글쎄. 사장님한테 허락받았거나 그랬겠지.”

미유키는 렌카가 날 대할 때의 이상반응을 눈치챘을까? 평소에 비해 과한 스킨십을 한 걸 보면, ‘뭔가 이상한데?’ 라는 느낌 정도는 받은 것 같긴 한데...

미유키가 먼저 말이라도 꺼내주면 좋으련만... 이런 건 내가 직접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도 일이 차근차근 진행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

**

늦은 저녁, 홀로 집으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샤워였다. 미유키의 방에서, 그녀와 함께 뜨거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

예상대로 미유키는 공부를 하는 척하다가 내게 은근한 터치로 신호를 주었고, 나는 그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그녀와 침대에서 조용한 관계를 가졌다.

부모님이나 언니가 들으면 안 돼서 입을 콱 틀어막은 채로 헐떡거리는 미유키가 어찌나 예뻤는지... 상상하니 또 꼴린다.

그나저나 집으로 돌아갈 때, 미도리가 땀으로 살짝 떡져있는 내 머리를 본 것 같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들키진 않은 것 같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부모가 있는데 딸과 그렇고 그런 일을 했다면서 안 좋게 보려나?

앞으로 미유키의 집에서 하는 건 지양해야겠다. 심장이 확 쪼그라드는 느낌이야. 부디 미도리 또한 카나처럼 미유키와 내 관계에 호기심을 갖길 바라면서,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거실에 요를 깔았다. 이후 그 위에 벌러덩 누워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하려다가, 메시지가 하나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상 최악의 쓰레기.]

렌카의 푸짐한 욕설이었다. 오늘 받은 충격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페에서 봤던, 괴상하게 찌푸려진 렌카의 얼굴을 생각해보며 실소를 터뜨린 나는 휴대폰에 나타난 키보드를 두드렸다.

[갑자기 뭐예요?]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내 휴대폰에 저장된 네 이름이야.]

[왜 그렇게 심한 짓을 해요?]

[넌 쓰레기가 맞으니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네요. 뭐해요?]

[네가 알 바 아니야. 앞으로 나한테 말 걸지 마.]

선을 긋는 척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한 나는, 렌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거리는 신호음이 세 번 정도 지나갔을 때쯤, 그녀의 새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앞으로 말 걸지 말라더니 전화는 받는구나. 여전히 날 향한 호감이 많다는 증거였다.

“뭐하냐고요.”

-집에 있어. 이 쓰레기야.

할 말이 쓰레기밖에는 없나보다.

“내일 휴무죠?”

-근데?

“뭐할 거예요?”

-알아서 뭐하게.

“피규어 보러 갈 거죠?”

-.....

정곡을 찔렸는지 수화기 너머가 조용하다. 렌카가 들으라는 듯 킬킬거린 내가 말을 이었다.

“같이 갈까요?”

-내가 왜?

“점심에 만나서 밥 먹고 피규어 구경하러 가요.”

-싫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일어나면 전화해.”

-싫다고 했어.

오늘 받은 충격 때문에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나는 렌카가 내일 아침 나를 전화로 깨워 주리라는 것을 안다. 이미 뒤로 물리기에는 늦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틱틱대는 거다.

“일 끝나고 스승님이랑 저녁 먹었어요?”

-.... 치나미가 말해줬냐?

“아뇨. 추측이에요. 부장은 항상 스승님을 챙기니까.”

-어쩌라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다음엔 저도 껴달라고요. 같이 이것저것 해요.”

-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렌카.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인지, 평소였다면 심드렁하게 넘어갔을만한 말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아니, 심각하게가 아니라 야릇하게라고 해야 옳겠지.

“이만 끊을게요. 귀 아파.”

통보하듯 말한 나는 렌카가 욕을 더 쏟아내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내일 많이많이 때찌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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