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85화 (284/313)

Chapter 285 - 처벌

우우우웅-!

귓가에서 크게 울리는 진동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었다.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화면을 보니 렌카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어제 깨워달라고 한 것을 잊지 않았구나. 역시 우리 노예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 나는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아...

해 달라는 모닝콜은 없고 웬 감탄사일까? 잠에 취해 완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듣기 좋았나보다. 렌카의 수줍어하는 얼굴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다.

-.... 일어나 쓰레기야.

이어지는 렌카의 말. 아침부터 욕을 먹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 몇 시죠?”

-8시...

“왜 이렇게 일찍 깨웠어요?”

-네, 네가 아침에 깨우라며!

“화는 왜 내는 건데?”

-무슨... 몰라서 물어? 깨워 달라 해놓고 따지니까 당연히 화가 나지...!

“1시간 뒤에 다시 깨우세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대든 거, 오늘 전부 받아내겠습니다.”

-뭐...? 이런 미친...

어제처럼 욕이 튀어나오기 전에 전화를 끊은 나는, 눈을 부비적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휑하고 넓은 거실을 둘러보니 텐션이 팍 죽는다.

힘없는 몸을 일으켜 세워 냉장고로 간 나는,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몸 안으로 들어오니 온 신경이 깨어나는 느낌이 인다.

“하아...”

시원한 한숨을 내쉰 나는 요 위에서 빈둥거리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렌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침대에 있었나? 받는 속도가 빠르다.

“지금 할 일 있어요?”

-없어.

“그럼 9시에 깨우지 말고, 그때 만나죠.”

-뭐...? 점심에 만나기로 했잖아. 나 운동 가려고 했는데...

“무슨 운동?”

-러닝.

“이 추운 날에?”

-5분만 달려도 따뜻해지니까 상관없어.

“그러지 말고 실내에서 같이 운동할까요?”

-헬스장을 말하는 거야? 일일권 비싼데...?

“헬스장 말고 다른 데.”

-다른 데 어디? 시민체육관 같은 데? 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터뜨리는 렌카.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다가, 화가 난 듯 콧방귀를 끼다가... 그렇게 그라데이션 같은 감정변화를 보여주던 그녀가 욕을 내뱉었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한 말의 의도를 눈치챘구나. 어제 일도 있어서인지, 오늘따라 렌카의 변태력이 남다르다.

“왜 욕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이... 더러운...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내게 뭐라 하고 싶지만, 직접적으로 호텔에 가자는 말은 한 적이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마음... 이해한다. 약이 바짝 올라있는 렌카의 목소리를 듣고 피식한 내가 말했다.

“지금 씻고 출발할게요.”

-뭐...!? 난 만난다고 한 적 없어!

“9시까지 나와요.”

-기, 기다려! 일단 나도 씻어야 될 거 아니야...! 나 씻는데 오래 걸려...!

“그럼 9시 20분으로 해줄게요. 불만 없죠?”

-아, 알았어... 하... 짜증나.

“그때 봅시다.”

뚝.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그녀. 매를 벌고 있다. 만나서 많이많이 보듬어줘야겠다. 혹시 모르니까 고양이 꼬리 플러그도 챙길까? 아니다. 아직 손바닥 스팽킹에도 적응을 하지 못했는데 이런 도구를 사용하는 건 이르다.

**

렌카는 정확히 9시 20분이 됐을 때 집에서 나왔다. 오늘 코디의 색감은 블랙이구나. 저번에 봤던 무스탕이 마음에 든다. 길쭉한 다리를 감싼 블랙진, 그 아래로 굽이 꽤나 높은 롱부츠 또한 돋보인다.

덜컥.

뚱한 표정으로 조수석 문을 연 렌카가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블랙 컬러로 코디를 맞춘 여성에게 어울리는 다른 색은 빨간색이라고 생각한다. 빨간 코디를 섞으면 좋다는 뜻이 아니라, 틴트나 립스틱 색깔을 말함이었다. 그리고 렌카의 입술은,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고 있었다.

팩트로 보정된 하얀 얼굴 밑에 윤기가 흐르는 빨간 입술, 그와 더불어 살짝 치켜 올라간 아이라인까지... 무척 마음에 든다. 오늘따라 한층 더 섹시해보이는 렌카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뭘 쳐다보고 난리야. 짜증나게.”

여느 때처럼 툴툴거리는 그녀에게 히죽 웃었다.

“예뻐서요.”

“다, 닥쳐...! 너 같은 쓰레기한테 그런 칭찬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좋으면서 싫은 척하기는. 쉽게 다가가기 힘든 인상이지만, 내 앞에서는 애교가 많은 츤데레가 따로 없다. 그 갭이 무척이나 꼴린다. 지금 차에서 한 판 하자고 할까?

“눈 깔아...!”

“너무 강한 말은 쓰지...”

“만화 대사 같은 거 실제로 하지 마...!”

아직 전부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씹덕답게 이 대사가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꿰고 있다. 냉랭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불같이 화를 내는 렌카가 귀여웠던 나는, 준비해두었던 사탕을 꺼냈다.

“읏...!”

손에 들린 사탕을 보자마자 움찔하며 몸을 빼는 모습을 보니 아래로 피가 몰리려고 한다. 이상성욕이라도 생긴 건가? 왜 이러지?

“왜 언짢은 표정이에요? 사탕 먹기 싫어?”

“시, 싫은 게 아니라...”

“그럼 뭐.”

“.... 됐어. 내놔.”

“그렇게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뭐라는 거야...! 빨리 먹고 치우게 내놓으라고...!”

떽떽거리는 렌카를 무시하며 포장지를 뜯은 나는, 사탕을 그녀의 입술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무어라고 작게 꿍얼거린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그 안으로 사탕을 집어넣는 나는, 입술이 닫히는 타이밍에 엄지를 쏘옥 밀었다.

“우읍...”

본의 아니게 내 손가락을 삼켜버리게 된 렌카의 막힌 신음.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이라도 했는지, 반발은 딱히 없었다. 다만 차 안이라는 장소에서까지 이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상태로 가만히, 그윽한 눈으로 렌카를 쳐다보고 있자, 내가 원하는 걸 알아차린 그녀가 엄지를 혀로 건드렸다. 처음엔 간을 보듯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사탕을 구석으로 밀어내고 엄지를 혀로 지그시 감싸더니 그것이 사탕이라도 된 양 살짝 빨아들이고 있다.

촉촉하고 따스한 그녀의 입 안에서 렌카의 의지로 인해 이리저리 굴러가는 손가락, 그 감촉이 정말 좋다.

“웁...!”

이제 됐냐는 듯 눈빛으로 말을 하는 렌카에게 방긋 웃어보인 나는, 그녀의 입 안에서 엄지를 빼고 아랫입술을 꾸우욱 누르면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이후 치약 향을 솔솔 풍기는 그 손가락을 내 입안에 집어넣는 것으로 스킨십을 마무리했다.

“그, 그거 하지 마...!”

순식간에 붉어지는 렌카의 뺨. 화장기를 뚫고 튀어나온 부끄러움이 참... 러브 코미디 같다. 물론 과정은 러브 코미디물이 아니라 조교물이지만.

“야...! 하지 말라고!”

노골적인 행동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는지, 렌카가 팔을 쭉 뻗어 내 손목을 덥석 붙잡고 당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핸드백에서 자그마한 물티슈를 꺼내, 엄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미친놈...! 죽어...!”

표백이라도 하듯 물티슈를 벅벅 문지르는 모습을 보니, 마치 저주를 거는 것 같다. 어둡고 좁은 방 안에서 자신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오는 내 인형을 고정해놓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못질을 하는 렌카... 은근히 꼴리는데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나 싶다.

**

매장에 진열된 피규어를 보는 렌카의 눈은 정말 초롱초롱했다. 그렇게나 들키기 싫어서 만화를 모르는 듯 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내가 옆에 있음에도 취향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있다. 이왕 드러났으니 자포자기하고 즐기려는 마인드가 된 건가보다.

“이건 어느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에요?”

“시끄러워. 조용히 해.”

“말도 못 걸어요?”

“마감 잘 돼있는지 확인해야 되니까 닥쳐.”

“딱 봐도 화려한 캐릭터인데 그걸 일일이 다 확인한다고요?”

“어.”

“인터넷으로 평가 찾아보면 안 되나?”

“이런 건 전부 수제로 제작되는 거고, 도색이 잘못돼도 상품 불량으로 안 쳐주는 곳이 많아서 한 번 볼 때 제대로 보고 사야 돼. 그러니까 이제...”

“알았어요. 닥칠게.”

“.....”

싸늘하게 말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을까? 피규어에만 눈을 두고 있던 렌카가 허리를 펴더니 날 쳐다보았다.

“이게 좀... 집중이 필요한 시간이어서...”

“그래서?”

“.... 그냥 그렇다고...”

내가 트집을 잡아서 보복할까봐 우려스러운 모양이다. 귀엽게 용서를 구하는 렌카에게 알겠다고 대답하자, 안심한 그녀가 포장된 피규어를 한동안 유심히 보고는 점원을 불렀다.

“저기요. 이거 지금 살 수 있어요?”

그러자 렌카의 미모에 혹한 점원이 후다닥 다가오더니, 가리킨 피규어를 보고는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드릴까요?”

“네.”

24000엔짜리 피규어를 고민도 없이 산다고? 대단하다. 렌카의 집엔 분명 이것보다 훨씬 비싼 피규어가 많이 있겠지. 이런 쪽의 덕질엔 어마어마한 돈이 깨진다더니, 살짝 이해가 되는 것도 같다.

과할 정도로 친절하게 구는 점원에게 돈을 건네주고 피규어 박스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받은 렌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구하기 힘든 제품이었나본데... 보기 좋다.

“아.”

헤실거리며 내게 다가오다가 표정을 확 굳히는 그녀. 방금 내뱉은 짤막한 감탄사를 보아하니, 내게 의도치 않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줘서 무안해하는 것 같다.

“더 구경할 거예요?”

그런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내가 저리 묻자, 헛기침을 한 렌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 맞다. 야.”

“왜.”

“검도대회 나갈 거지?”

“갑자기 웬 검도 얘기에요?”

“갑자기가 아니라... 계속 말해왔었잖아. 그리고 어제 감독한테 전화 왔었어. 빠지는 인원 없는지 조만간 확인 전화 돌리실 거래.”

“그래요? 빠지면 어떻게 되는데?”

“설마 빠질 생각이야?”

“그런 건 아니고, 빠지면 어떻게 되나 물어보기만 하는 겁니다.”

“저번 대회 때부터 정해둔 후보 선수 있으니까 괜찮기는 한데... 하아... 아니다. 너 같은 게으른 놈한테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입 아파. 그냥 나가지 마. 기대했었던 내 잘못이라고 칠게.”

“기대했었어요?”

“됐어, 꺼져.”

주인은 노예를 참 예뻐하는데, 노예는 쌀쌀맞은 짓만 하다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도의가 땅에 떨어진 세상... 어찌 될 런지 걱정스럽다. 벌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앞서가는 렌카와 보폭을 맞춘 나는, 그녀의 몸이 비상계단이 있는 문 근처에 도달했을 때쯤 손을 뻗었다. 이후 문을 열고, 렌카의 몸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

“흐앗...!?”

떠밀리다시피 비상구로 들어가게 된 렌카의 깜짝 놀란 탄성.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벽까지 밀어붙이고 몸을 밀착시킨 내가 말했다.

“야.”

“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내가 안 나가겠다고 했어?”

“무, 뭐...?”

“안 나가겠다고 했냐고. 왜 갑자기 화를 내는데?”

“아, 아니... 그...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냥 물어보는 거라고 했잖아. 근데 왜 혼자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꺼지라느니 뭐니 하는 욕을 하냐고.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갑자기 화냈지?”

“읏...! 그건 네가 하나자와한테도...”

“뭐.”

낮은 목소리로 계속 반말을 하자 위압감을 느낀 듯, 렌카의 태도가 주춤해졌다.

“다, 당연히 화날만한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쓰레...”

그럼에도 여전히 반항을 하려는 렌카였으나,

짜악-!

“햐아악!?”

내가 그녀의 허벅지 옆쪽을 다소 강하게 때리자 기겁을 하며 온몸을 펄떡였다. 그 틈을 탄 나는 렌카의 다리 사이에 내 다리를 집어넣고 몸을 완전히 딱 붙였다. 더 나아가 그녀의 바지허리에 손을 올려, 허리를 고정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에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렌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자, 잠깐...! 마츠다...! 여긴...!”

“시끄러.”

“야...! 아, 안 돼...! 하지 마...!”

“시끄럽다고.”

“우읏...!”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걸까? 벽과 내 몸 사이에 낑겨 버둥거리던 렌카가 다급한 눈짓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피규어... 이것만... 저기...”

쇼핑백만 저기 놓아두겠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처지를 이해한 것 같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지. 그리 생각한 나는 렌카를 풀어주고 고개를 까딱였다.

“하아...”

그러자 한숨을 푸욱 내쉰 렌카가 미간을 구기며 날 쏘아보았다.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며 계단창 구석으로 향한 그녀는, 그곳에 피규어가 담긴 쇼핑백을 내려놓을 것처럼 굴다가,

“으익...!”

깜찍하게 숨을 들이켜더니, 냅다 출구 쪽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도주 행각은 미수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상행동을 눈치챈 내가 재빨리 움직여 출구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

거대한 덩치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자 안타까운 탄식을 토해내는 렌카. 도주하려고 했던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을 직감하였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모습이 귀엽다.

마치 감옥 탈출 드라마에서 탈출에 실패한 주인공을 보는 듯한 느낌. 터질 뻔한 웃음을 참아낸 나는, 표정을 싸악 굳힌 채 렌카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미, 미안해... 화장실이... 급해서...”

뒤로 물러나며 같잖은 핑계를 대는데 통할 리가 만무하다. 주인에게서 탈출하려고 하는 노예는 예로부터 엄하게 다스려왔다. 쉽게 말하자면 중죄.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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