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7 - 마지막 날의 소소한 행운
얼핏 평범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야릇한 하루. 그런 날을 세 번 더 보내고 출근한 나와 렌카는, 카페 앞에 사장이 나와 있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사장이 아쉬움이 섞여있는 표정으로 우릴 맞이했다.
“어서 와라. 오늘이 마지막 날이지?”
“예.”
“근무 끝나면 규동 가게에 잠깐 들러줄래?”
“알겠습니다. 새 알바생은 뽑으셨어요?”
“뽑았어.”
“인수인계는 언제 할까요?”
“그건 괜찮아. 기존 알바생한테 연락해서 다시 와달라고 했거든.”
음음. 귀찮을 뻔 했는데 다행이다. 마음에 드는 사장이야. 와이프를 건드리지 않길 잘했다.
“그럼 마지막까지 잘 부탁한다.”
사장과의 간단한 대화를 끝내고 카페 안으로 들어온 나는 기지개를 폈다.
“이 알바도 오늘로 끝이네요.”
“그러게.”
“기분이 어때요? 시원섭섭해요?”
“아니. 널 보지 않게 돼서 너무 행복해.”
또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보게 될 텐데. 검도대회도 그렇고.”
“적어도 지금은 시원하니까 초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말을 너무 험하게 하네. 제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누, 누가 누굴 가르쳐...! 진짜 죽고 싶어?”
렌카는 나와 온갖 일을 하였음에도 여전히 기가 셌다. 계속 저래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고로 옷을 벗으라 명령했을 때, 순순히 상의를 걷어 올리는 것보단 싫은 얼굴로 마지못해 속옷을 보여주는 모습이 더 꼴리는 법. 평소의 렌카가 딱 그런 타입이었다.
“먼저 옷 갈아입어요.”
“.... 그럴 거야.”
“공손하게 말 안 하면 지금 같이 탈의실에 들어가서 할 거예요.”
나긋나긋한 협박에 찔끔하는 렌카. 진심인지 아닌지 파악해보려는 듯, 눈치를 보며 내 얼굴을 살핀 그녀가 조심조심 날 지나쳐 탈의실 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멈칫하고는 날 돌아보았다.
“그... 그거...”
“사탕은 오늘 집에 데려다주면서 줄게.”
“아, 알았어.”
우리 노예가 매일매일 사탕을 먹는 것에 버릇이 들어버려서, 이 주인님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방학 기간에 새겨진 습관을, 아카데미에서도 보여주도록 해보아요.
옷을 다 갈아입고 시작된 마지막 근무는 꽤나 널널했다. 아직 이른 오전인 걸 감안해도 손님이 별로 없었다. 물론 별로 없다고는 해도 출근 초기보다는 훨씬 많았지만 말이다.
“전 근무자가 초코칩 안 채워놨어. 창고에서 가져올게.”
“올 때 커피콩도 두 봉지 갖고 오세요.”
“알았어.”
그렇게 렌카와 나는 오후 근무자의 똥을 치우면서 일을 했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깔끔하게 설거지를 마친 렌카에게 다가간 나는, 그녀가 벗은 고무장갑의 움푹 들어간 손가락 부분을 빼내고 싱크대에 걸쳐놓았다. 그리고는 이런 내 행동에 챙겨주는 느낌을 받았는지 은근히 수줍어하고 있는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먼저 밥 먹고 오세요.”
“만지지 마...!”
“사춘기에요? 왜 난리야?”
“시도 때도 없이 건드리니까 그렇지... 어쨌든 나 갈게.”
“다녀와요.”
렌카를 보낸 나는 한산한 카페를 둘러보았다. 렌카와의 많은 추억을 쌓은 장소긴 한데... 생각했던 것만큼 이벤트가 많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원래라면 예약을 했는데 다급하게 취소를 하는 손님, 진상 노인네, 어린이의 실수 같은 일이 벌어지면서 그걸 해결해나가며 호감도를 얻을 수 있는데... 이미 렌카와 내 관계가 아주 많이 발전한 터라 전부 스킵이 된 건가?
뭐가 됐든지 간에 서로를 향한 마음이 커졌으니 상관없긴 하다만... 조금은 아쉽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못 다한 일을 하고 있는 사이,
스으윽.
자동문이 열리면서, 히요리가 친구 한 명과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용.”
마지막 날에 행운이 잇따르는구나. 텐션이 올라가는 느낌이다. 오늘 기분이 굉장히 좋았는데 이것 때문이었나보다.
“어서 오세요.”
“저 기억하세요? 서점에서 한 번 뵀었는데.”
기억을 못할 수가 있겠니. 나야 당연하지만,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널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을 거다.
“기억합니다. 만화책 골라달라고 하셨었죠?”
“맞아요!”
그러고 보니 지금 히요리의 옆에 있는 친구도 서점에서 봤었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닌 것 같다.
“나흘 전에는 안 계시던데, 휴무셨나 보네요?”
렌카와 내가 휴무인 날에 왔었나? 그때도 봤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 이어지는 히요리의 물음에 방긋 웃어보인 내가 대답했다.
“예. 오늘이 알바 마지막 날이에요.”
“아 진짜요? 그만두시는 거예요?”
“그렇게 됐습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넹. 초코칩 프라푸치노로 두 개 주세요. 여기서 마시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결제를 마치고 히요리가 내민 쿠폰에 도장을 찍어준 나는, 음료를 제조하면서 그녀와 그녀 친구가 하는 대화를 들어보았다.
“겨울학기에 하루는 와야 되는 거 알지? 오리엔테이션 후에 라커 배정 같은 거 미리 한다더라.”
아카데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응. 엄마가 그렇다고 하더라.”
“같이 갈 거지?”
“당연하지. 내가 왜 너랑 따로 가?”
저 친구도 예보니 아카데미에 입학이 결정난 건가? 이건 몰랐던 사실이다. 도키아카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내가 나타나서 미래가 달라진 건지, 아니면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넘긴 건지 판단이 안 선다.
그나저나 드디어 오는구나. 오래 기다렸다. 히요리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날 보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서점처럼 우연한 만남으로 치부하려나? 그때보다는 조금은 더 운명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겠지.
히요리의 말에 좋아라한 친구가 물었다.
“제복은 샀어?”
“샀어. 근데 치마 줄여서 가면 혼나려나?”
“글쎄...? 그렇게까지 빡빡하게 본다고 하진 않은 것 같던데... 상식적으로만 줄이면 괜찮지 않을까?”
“그럼 줄여야겠다.”
무슨 오리엔테이션 같은 날에 치마를 줄일 생각을 하지? 히요리라면 해봄직한 발상이긴 한데... 아무래도 잔잔한 아카데미에 큰 파문이 일 것 같다. 학생회이자 규범을 준수하는 미유키와의 충돌은 기정사실이겠구나.
자유분방한 히요리,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미유키.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두 사람이라 큰 충돌이 일어날 만도 하지만, 둘 모두 성격이 좋아서 일어나봤자 가벼운 마찰일 거다. 심해지려고 하면 잘 중재해서 친하게 지내도록 만들어봐야겠다.
음료 제조를 끝낸 나는 히요리에게 건네준 진동벨 숫자를 눌렀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서 우우웅거리는 벨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히요리가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벌써부터 카페 안을 가득 채우는 듯한 히요리 특유의 레몬 향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며, 나는 카운터에 내려놓은 트레이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당.”
**
사장은 알바가 끝난 우리에게 규동 가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 여러 장과, 와이프가 만든 간단한 다과, 그리고 보너스를 챙겨주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보너스는 예상 외였다. 주급을 두둑이 주는 걸로 끝낼 줄 알았는데... 그만큼 우리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우릴 배웅하며 일을 하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는 사장. 부담스러울 정도로 우릴 붙잡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카페에서 벗어난 나는, 조수석에 탄 렌카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수고했어요.”
“그래. 그리고 만지지 마.”
“알바비로 피규어 살 거죠?”
“뭔 상관이야.”
“대답 똑바로.”
“.... 살 거야. 진열장도 꽉 차서 하나 추가로 구매할 거고. 아 만지지 말라니까...!?”
경고를 하였음에도 무시하고 자신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렌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쳐다보았다. 반항을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쉰 그녀가 앞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물었다.
“준비는 잘 하고 있는 거지?”
“무슨 준비?”
“무슨 준비라니... 검도대회 말이야. 네가 나간다고 했잖아...! 이미 선수 등록도 끝나서 못 물리는데 그딴 식으로...”
“농담이었어요. 준비 잘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화내지 마.”
“.... 그럼 됐고.”
목소리 톤을 보아하니 좋아하고 있구나. 대회가 끝나면 치나미와 셋이서 따로 놀아볼까 싶다.
“알바 끝난 기념으로 영화 볼래요?”
“아니.”
“왜요?”
“너라면 일부러 사람 없는 영화를 예매해서, 상영관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아.”
정확하네.
“그러면 안 되나?”
태연한 내 태도에 어이가 없어졌는지, 렌카가 헛웃음을 쳤다.
“안 되지...! 공공장소에서 그러는 건 민폐라고...!”
“만지고 싶은데 어쩌라고.”
“.... 그런 독불장군 기질도 좀 버려.”
“생각해보고요. 근데 그냥 이대로 돌아가요? 알바도 끝났는데?”
“넌 무슨 알바 끝난 게 기념일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은데... 특별한 날은 전혀 아니거든?”
“그건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하아... 어쨌든 안 돼. 집에 가서 가족끼리 밥 먹어야 돼.”
내가 같이 가자고 할까봐 ‘가족’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데,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웃기다.
“알았어요. 정 나랑 있는 게 싫으면 어쩔 수 없죠.”
“시, 싫은 게 아니라... 가족끼리...”
“알았다니까.”
“.... 그래. 알았으면 됐어. 이제 조용히... 흣...!”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으로 손을 들이밀자, 숨을 훅 삼키는 그녀. 엉덩이를 좌석에 완전히 밀착시키며 상체를 숙이는데, 상당히 예민한 부위에 손이 닿아 쾌감이 확 찾아온 모양이었다.
불과 나흘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러면 ‘쓰레기’ 라거나, ‘미친놈’ 같은 욕을 하거나 했을 텐데, 지금은 불만은 있을지언정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부분이 마구마구 나오는데, 렌카의 교육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전혀 가늠이 안 돼서 앞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