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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88화 (287/313)

Chapter 288 - 자만했고, 건방졌다

대회 당일, 이른 아침. 미유키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집합장소로 간 나는 고로 감독을 발견했다. 서류 한 장을 쳐다보며 무어라고 말을 하는 그의 옆엔 렌카와 치나미가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진지한 얼굴이다. 대진표를 보는 건가? 아니면 갑작스런 일로 빠지는 사람이 있나? 만약 후자라면 부디 테츠야이길 바라며 그들에게로 간 나는, 인기척을 느낀 고로가 내 쪽을 쳐다보자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감독.”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지?”

“예.”

“검도 연습은 많이 했고?”

“열심히 했습니다.”

“다행이군. 너도 같이 회의할래? 아니면 버스 탈래?”

치나미와 같은 매니저라서 선택권을 주는 건가보다.

“버스 타겠습니다.”

“알았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고로에게 입례를 하고 버스 쪽으로 가려는데, 렌카가 날 붙잡더니 감독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야.”

“왜요?”

“너 연습 열심히 안 했잖아.”

“내가 열심히 했는지 안 했는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뭐...? 네, 네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반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렌카. 남들 몰래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인 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농담이에요. 연습에 대해서 뭐라 하려고 절 여기 끌고 온 거예요?”

“.... 그건 아니고... 그... 사탕 줄 거면 나중에... 대회 끝나고 달라 하려고...”

한소리 할 줄 알았는데 사탕 얘기였구나. 아침부터 특출난 귀여움을 보여주는데, 많이많이 보듬어줘야겠다.

“알았어. 회의 끝나고 버스 탈 때, 스승님이랑 뒷좌석 근처로 와요.”

“싫은데...? 내가 왜 그래야...”

“오라면 와요. 혼내기 전에.”

“아니 무슨 여기서까지...”

“대답.”

“아, 알았어... 알았다고...!”

투정을 부리듯 화를 낸 렌카가 씩씩대며 내게서 멀어졌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눈앞에 굵직한 팔이 불쑥 나타나자 옆을 돌아보았다.

“잘 지냈냐?”

인상이 다소 사나운 남자가 내게 안부를 묻고 있다.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 저번 대회 때 대장으로 나온 선배였던 건 확실한데... 이름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는다.

“마츠다? 얘 왜 이래? 너 어디 아프냐?”

멍을 때리고 있는 날 향한 의아스런 물음. 이름을 모르는 듯 굴면 실망할 텐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까? 그냥 얼버무리면서 인사해버릴까? 라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찰나,

“야마자키 선배! 감독께서 잠깐 오시랍니다!”

멀리서부터 한 검도부원의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야마자키... 그래, 성이 분명히 야마자키였다. 모리, 이케다, 야마자키, 그리고 버러지가 나와 한 팀. 서브가 요시다, 후지이였다.

“안녕하세요, 야마자키 선배.”

뜸을 엄청나게 들인 내 인사에, 황당한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본 야마자키가 말했다.

“뭐야? 이제 정신 차리네?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난 간다.”

“예.”

그렇게 그를 보내고 버스에 탄 나는, 앞자리에 앉아있는 테츠야를 발견했다. 누군가와 메시지를 나누고 있는지 휴대폰을 마구 두드리던 그의 눈썹이, 날 보자마자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왔어?”

“어.”

놈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도시락을 훑었다.

“미유키가 싸준 거지?”

“맞아.”

나는 테츠야의 앞에서 보자기를 풀고, 다른 보자기로 싸여있는 윗 상자 2칸을 빼내 테츠야에게 넘겼다. 놈이 불쌍해서 주는 게 아니라, 미유키가 테츠야를 만나면 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테츠야가 굳이 도시락을 언급한 이유도, 미유키가 마츠다한테 네 몫을 받으라고 말해서겠지.

“다 먹으면 나한테 주든가, 네가 갖고 있든가 해.”

“아, 알았어...”

테츠야는 미유키가 자신을 신경 써줘서 기뻐하는 게 아니라, 기분 나빠 하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미유키가 테츠야 자신에게 도시락을 주고, 마츠다에게 몇 개를 넘기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처지가 완전히 반대가 되었으니까.

놈 입장에서는 소꿉친구를 빼앗긴 기분일 테지. 그 소꿉친구는 테츠야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단 하나도 없어서, 빼앗겼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긴 하지만.

“맛있게 먹어라. 난 뒤로 간다.”

“어? 아, 그래.”

“오늘 파이팅하고.”

테츠야를 놔두고 대회에 참가하는 여자 부원들과 인사를 나눈 나는, 사람들이 없는 뒷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창문에 커튼을 치고 등받이를 조금 내려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치나미가 올라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내가 말했다.

“스승님, 여기에요.”

“앗, 거기 계셨군요.”

“이쪽에 앉아요.”

총총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치나미를 향해 옆의 창가 자리를 토닥이자, 그녀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네, 넷...! 그런데... 비켜주셔야...”

“여기 공간 있어요.”

“저, 저도 알지만 공간이 무척 좁은데요...?”

“스승님이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모르는 사실을 안 사람마냥 자그마한 탄성을 터뜨린 치나미가 내 무릎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자신의 다리를 들이밀었다. 내 다리에 몸이 닿지 않게끔 앞좌석 헤드를 잡고 낑낑거리는 치나미. 우여곡절 끝에 자리에 앉은 치나미가 후아!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하셨습니다.”

“후후... 고맙습니다.”

땀도 나지 않았는데 이마를 훔치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진심으로 뿌듯해하는 그녀를 내려다본 내가 물었다.

“근데 제가 더러운가요?”

“네? 더럽다니요?”

“지나가면서 닿지 않으려고 하길래요.”

“어, 어허...! 그건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지, 후배님이 더럽다거나 하는 이유는 절대 아니었어요...!”

“그런 거죠?”

“물론이지요...!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저는 실망을 금치 못... 앗...!?”

미간을 깜찍하게 구긴 치나미가 말을 하다 말고 움찔했다. 내가 그녀의 다소곳이 붙어있는 허벅지 위에 손을 얹어놓았기 때문.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그녀의 선홍색 입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머리가 조금 길었네요?”

사근사근한 내 목소리가 좋은 듯, 치나미가 특유의 므읏... 하는 콧소리를 작게 내었다. 자신의 옆머리를 앞으로 쭈욱 당기고는 손가락에 빙글빙글 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자, 잘라야하는데 귀찮아서요...”

“왜 귀찮았어요?”

“하루에 오랜 시간을 누워있다 보니... 원래 누워있으면 만사가 다 해이해지는 법이니까요...”

“그 마음, 깊이 공감합니다. 근데 안 잘라도 예뻐요.”

“느앗!? 그, 그런가요...?”

뺨에 맺힌 홍조가 귀까지 그 범위를 넓혀나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무척이나 부끄러워하는 치나미... 안아주고 싶다.

“그런데 저어... 후배님...”

“예.”

“이곳에서는 조금... 민망한 것 같은데요...”

“뭐가요?”

“후배님의 손이...”

“마사지해주는 중인데 민망할 게 있나요?”

“아하... 마사지였군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만할까요?”

“네에...”

치나미는 이미지와는 달리, 은근히 자기주장이 강한 면이 있다. 알게 모르게 소심소심한 렌카와 입장이 뒤바뀐 느낌. 하지만 굉장히 잘 어울렸다. 렌카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한 치나미의 허벅지에서 손을 떼어내자, 안심한 그녀가 가져온 비닐봉지에서 플라스틱 통을 하나 꺼냈다.

“복숭아 드실래요...?”

집에서 가져왔구나. 왜 안 나오나 했다. 제철에 먹는 것보단 맛이 없겠지만 겨울에 복숭아를 맛볼 수 있는 게 어디야. 좋게좋게 생각하자.

“한 개만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네요.”

“두 조각 드릴 수도 있는데요...”

“세 조각은 안 돼요?”

“앗, 돼요. 네 조각, 다섯 조각도 된답니다.”

우리 치나미는 마음씨가 무척 고와요. 세상에 이렇게나 착한 사람이 있을까? 깨물어주고 싶다. 그녀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털어준 내가 방긋 웃었다.

“그럼 복숭아는 도시락 같이 먹고, 입가심으로 먹죠.”

“도시락이요?”

“미유키가 싸줬어요.”

“넷...? 하나자와 후배님께서 후배님을 위해 싸주신 것을 함께 먹어도 될지 굉장한 의구심이 드는데요...”

“스승님이랑 같이 먹으라고 했어요.”

“앗, 그렇다면 기쁜 마음으로 먹도록 하겠어요.”

금세 헤실헤실한 얼굴로 돌아오는 그녀. 도시락 내용물을 보고 감탄을 하며 물개박수를 치기까지 하는 그녀와 함께 사이좋게 젓가락을 드는데,

“그... 어떡하지? 치나미랑 할 얘기가 있어서...”

앞에서 렌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보나마나 테츠야가 옆에 앉으라고 꼬리를 쳤겠구나. 알만하다.

“미안해. 나중에... 대회장에 도착하면 말해줄래?”

친절하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테츠야에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 렌카가 나와 치나미에게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 틈을 탄 나는 젓가락으로 유부초밥을 집어들려 하는 치나미에게 속삭였다.

“스승님, 그거 알아요?”

“아니요?”

“들어보지도 않고 모른다고 하면 어떡해요?”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요...?”

저렇게 나오니까 반박을 못하겠다. 하긴, 질문 자체의 맥락을 따져보면 치나미의 말이 맞긴 하다.

“부장 있잖아요.”

“네.”

“엄청 변태던데요.”

“네에엣...?”

치나미의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크게 뜨였다.

“시도 때도 없이 야한 생각만 하던데.”

“그, 그럴 수가...?”

이젠 입까지 벌리고, 손으로 그 벌어진 입을 가리기까지 하고 있다. 뜬금없는 말을 하였음에도 참 좋은 리액션을 보여주는 그녀에게 무어라고 더 말하려는데, 우리 쪽으로 다가온 렌카가 미간을 꿈틀했다.

“뭐하냐? 내 욕하지 마.”

“욕 안 했는데.”

태연한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작게 짜증을 낸 렌카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내게 턱짓을 하더니 말했다.

“자리나 바꿔.”

“왜요.”

“치나미랑 전략 얘기할 거야.”

전략 얘기는 무슨... 딱 봐도 창가 자리에 앉은 치나미가 내 몸에 가려져서, 감시를 제대로 못하니까 바꾸라고 하는 거구만.

“싫습니다. 이 상태로도 얘기할 수 있잖아요. 제가 전략 토론을 듣는다고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 재수 없어.”

“칭찬 고마워요. 유부초밥 먹을래요?”

“꺼... 흐흠... 싫어.”

순진무구한 치나미 앞이라고 욕을 자제하는 모습... 보기 좋다.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홱 돌리는 렌카에게 피식한 나는, 치나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방금 한 얘긴 농담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자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치나미가 한쪽 볼을 부풀렸다.

“후배님...! 그런 짓궂은 말씀은 함부로 해서는 안 돼요.”

“미안해요.”

“나중에 친우님께도 사실을 고하시고 사과를 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제 제자라면 그럴 것이라고 믿어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농담을 하실 정도로 두 분이 많이 친해지신 것 같아 기쁘네요.”

바로 옆에서 숙덕거리고 있는 우리의 대화 내용이 궁금해졌는지, 렌카가 자신의 몸을 복도 쪽으로 슬쩍 밀었다. 그리고는 따지듯 말했다.

“내 욕하지 말라니까?”

“안 했다니까?”

“.... 나도 유부초밥 하나 줘봐.”

“싫다면서요.”

“마음이 바뀌었어. 내놔.”

“얻어먹는 입장이면 공손히 부탁을 해야 맞는 게 아닐까요?”

“내가 왜 너 따위한테 부탁을 해야 되는데?”

“왜냐니요? 당연히 노...”

“아아아...! 시끄럽고, 내놔...!”

‘노예’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리라는 걸 예상하고는 내 말을 끊어버리는 렌카. 치나미의 눈치를 보며 눈을 부라린 그녀가 내 젓가락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행동을 예측한 내가 팔을 휙 들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벌써부터 분위기가 좋다. 치나미가 있어서 그런가? 주변 공기가 말랑말랑해진다. 복숭아와 블루베리 향도 향기롭고... 벌써부터 만족스러운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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