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9 - 자만했고, 건방졌다 #2
버스에서 내린 우린 타 아카데미 학생들의 시선을 받았다. 물론 그 시선의 주인공은 렌카였다. 저번 대회 때랑 완전히 똑같구나.
다른 사람들은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렌카를 고고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냉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가, 내 앞에만 서면 말로밖에는 못 대드는 츤데레라는 실상을 알게 되면 놀라 자빠질 거다.
“하나자와는 응원 안 온대?”
매번 받는 관심에도 태연한 렌카의 물음.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인 내가 대답했다.
“예. 친척들이 근처에 오게 돼서 그쪽에 가봐야 한다네요.”
“엄청 자세히 아네?”
미유키와 내 관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더욱 더 캐려는 의도가 훤히 보인다. 살짝 놀아줘야지.
“자세히 알 수밖에 없죠.”
“왜?”
“글쎄요? 왜일까요?”
“.... 됐다. 그냥 내 눈 앞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어.”
“저요?”
“어. 너.”
“죽으라고요?”
“마, 말을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진짜 쓰레기 새... 흐흠...!”
주변 시선을 의식했는지 말을 하다 말고 재빨리 목을 가다듬는 렌카. 남들 앞에서 욕을 하려던 스스로가 창피했나보다.
그러고 보니 주변 사람들의 눈이 내게도 향해있는 게 느껴지는 듯하다. 저번에 신문에 났었던 걸 알아보는 건가? 아니, 그건 지역지에 작게 나온 기삿거리라서, 다른 지역 아카데미의 검도부원들이 그걸 봤을 가능성은 낮다.
렌카와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서... 라는 이유도 아니다. 지금 그녀는 나와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럼 어떤 이유에서 날 쳐다보는 걸까? 어쩌면 저번 대회에서 신인상에 전체 MVP까지 탄 나를, 타 검도부 감독이 알아보고 조심하라 일러두었을 수도 있겠다.
“관심 받고 있네? 열심히 안 하면 망신당할지도 모르겠어.”
남자들의 시선을 눈치챈 렌카의 티 나는 도발에 코웃음을 친 내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승부욕을 끌어올리려고 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깨를 두드리면서 힘내라고 해야죠.”
“너한테? 내가?”
“못할 것처럼 말하네요?”
“당연히 못하지.”
“그래요. 나중에 봅시다.”
“뭐야... 지금 보복하려는 거야? 쪼잔하게...?”
순식간에 기가 죽어버린 렌카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린 나는,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며 귀를 가져다대자 작게 속삭였다.
“당할 걸 알면서도 기어오르는 이유가 뭐예요?”
“다, 당하다니... 내가 누구한테 당한다고 그러는 건데...!”
“대회랑 수여식 끝나면 잠깐 시간 내서 대회장 뒤편으로 오세요.”
“무, 뭐하려고...?”
“벌주려고요.”
“미친놈...! 안 가...!”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알아둬요.”
통보하듯 말을 끝마친 나는, 남들 몰래 렌카의 둔부, 그리고 뒤쪽 허벅지를 약한 힘으로 토닥였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오싹한 기분이라도 든 듯, 미세하게 몸을 달싹이는 그녀. 그런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여준 나는, 때마침 다가온 치나미에게 활짝 웃었다.
“스승님도 시합 힘내세요.”
“넷!”
담백한 응원에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운 치나미가 말을 이었다.
“후배님도 힘내세요. 참고로 후배님의 오늘 목표는 우승이에요. 결과는 노력한 만큼 따라오는 법이라는 말이 있듯, 지금까지 열심히 해오신 후배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실 거라고 믿어요.”
치나미의 기대치가 너무 높다. 개인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단체전이라서 우승은 개인 기량으로만으론 힘들 것 같아 보이는데... 그나저나 저런 말을 들으니, 훈련을 게을리 한 게 괜히 찔린다.
“최대한 달성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후후... 바로 그 자세에요.”
두 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고로가 부원들 전부를 불러모았다. 여느 때처럼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우리를 격려한 그는, 렌카에게 여자부원의 인솔을 부탁한 후 남자부원들을 데리고 대회장으로 향했다.
**
“너는 검도부에 들어온 지 반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호구 하날 스스로 못 쓰냐?”
곧 3학년이 될 선배 이케다의 타박. 그의 도움을 받아 호면을 쓰던 내가 반박했다.
“호면만 못 씁니다. 다른 건 입을 줄 알아요.”
“그게 그거지. 다 됐다.”
호면의 끈을 다 묶어준 이케다가 머리 부분을 통통 쳤다. 그에게 감사인사를 전한 나는, 곧 시합이 시작되려는 기미가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내라.”
“예.”
팀원들과 주먹을 맞부딪친 나는, 테츠야와도 같은 행동을 했다. 못 본 척 피할 줄 알았는데, 아직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은 아네. 참 입체적인 놈이다.
“각 팀 선봉은 위치로.”
심판의 말을 들은 나는 죽도를 집어들고 어깨를 풀며 경계선 외곽 가운데로 향했다. 관객들은 꽤 있다. 벌써 개학한 아카데미도 있는지,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앉아있는 라인도 보였다.
우릴 응원하러 온 사람들은 얼마 없구나. 저번처럼 언더독의 반란 느낌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
첫 시합 선봉은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자리다. 이게 은근한 부담이 되어 선수의 긴장을 유발하는데, 적당한 긴장감은 경기에 도움이 된다.
“준비.”
맞은편에 멀찍이 떨어져있는 상대방을 주시하던 나는, 심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상대를 살펴보았다.
키는 나와 비슷하다. 덩치도 마찬가지. 체격으로 위압감을 주기는 힘들어 보인다. 당연히 나보다 검도 경력이 많겠지. 하지만 센스는 내가 더 뛰어날 거라고 믿는다.
경기장 중앙을 기준으로 좌우에 그어진 실 앞에서 우뚝 멈춘 나는, 심판의 신호에 따라 무릎을 굽히며 준거했다. 그리고...
“개시!”
시합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굽혔던 무릎을 펴며 상단세를 잡았다. 이후 달려 들어오는 상대에게 마주 짓쳐가면서 죽도를 내리쳤다.
따닥-!
코앞에서 맞부딪치는 서로의 죽도. 순식간에 코등이 싸움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나는 상대가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멀어지게끔 칼자루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 순간, 상대의 발이 유려하게 움직이더니, 내게서 옆으로 벗어났다.
‘어?’
발 앞쪽에 힘을 주고 있던 내 무게중심은 자연히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고, 상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이야앗!”
쩌억-!
사무라이 같은 상대의 기합성과 함께, 내 손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둔탁한 감촉. 누름손목이 제대로 들어왔다. 이건 위험한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심판이 상대 팀의 색인 빨간 깃발을 들어올렸다.
“한판!”
‘이런 미친...’
눈 깜짝할 사이에 점수를 내어주었다. 멍하니 타격당한 부위를 쳐다보던 나는, 위치로 가라는 심판의 말을 듣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중앙선으로 걸음을 옮기며 내 자신의 태도를 질책했다.
“좋았어!”
선취점을 따고 좋아하는 상대와 상대 팀을 보니 화가 난다. 저들에게 부글부글 끓어오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한심해서 미치겠다.
‘어이가 없네... 병신.’
이 대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앞전 대회를 훌륭한 성적으로 마무리하고 올라온 강자들이다. 이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자신만만해했을까? 이전 대회를 우승하고 올라온 것도 아닌데 왜 자만하고 있었을까? 이건 너무... 병신 같잖은가.
이 따위 마음가짐과 실력을 가진 주제에, 치나미가 우승을 언급했을 때 개인기량을 운운했었던 게 쪽팔린다. 스스로를 욕하며 선으로 간 나는, 대기하고 있던 부원들의 힘찬 응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츠다! 제대로 가보자! 할 수 있어!”
내가 아무리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지만, 같은 팀원들마저도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개인주의에 사무친 놈은 아니다. 정신 차리자. 나는 선봉이다. 내가 속절없이 밀려버리면 다음 선수들이 기가 죽은 채로 시작하게 된다.
“준비.”
코등이싸움이니 뭐니 괜히 기교를 부리려 하지 말고, 상단세를 주력 겨눔세로 채택한 내가 잘하는 걸 하자. 이제부터 대회가 끝날 때까지, 1점이라도 내어주면 할복한다. 그리 다짐하며 준거한 나는, 상념을 모조리 털어버리고 상대에게 집중했다.
“개시!”
**
“머리이이!!!!!”
쩌어억-!
죽도의 격자부로, 상대의 격자부위를 정확하게 때렸다. 하지만 검도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잔심이 아주 중요하다. 방심하지 않고 기검체를 유지하여 자세를 잡고 있던 나는,
“한판!”
심판 세 명이 동시에 흰 깃발을 들어올리고, 주심이 한판을 선언하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2:1 역전승. 초반엔 손쉽게 당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긴 사거리를 활용해 호쾌한 공격을 하니 금세 동점을 만들었고, 그 이후엔 절대 밀릴 것 같지 않은 상대가 기세에 눌려 주춤하여 빈틈을 파고들 수 있었다.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나는 이쪽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박수소리를 무시하며,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봉 테츠야와 교대했다.
놈에게 따로 조언 같은 건 건네지 않았다. 상대도 다를 뿐더러, 괜히 말을 걸었다간 집중력이 깨질 것 같아서였다.
테츠야도 평소엔 기합성을 최대한 자제하던 내가 우렁찬 소리를 내는 걸 보며 무언가 느끼는 게 있었는지, 진중한 표정으로 상대 차봉을 살피고 있었다. 눈 한 번 잘못 두었다간 골로 가리라는 것을, 앞선 시합에서 배운 듯했다.
경기장 외곽에 비치된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중견 선수인 모리와 간단하게 주먹을 맞부딪치고는 호완을 벗었다. 손이 땀으로 가득하다. 선취점을 내어준 후 무의식적으로 긴장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 다. .... 주마.”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작되기 직전의 차봉전을 지켜보고 있던 내가 고개를 돌리자, 고로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호면 벗는 거 도와준다고 했다. 땀 빼둬야 돼.”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한 고로의 친절한 목소리. 아차 한 나는 그가 내어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도움을 받아 호면을 벗었다.
“물 마셔라.”
“아, 예. 감사합니다.”
“정신이 번쩍 들지?”
“예... 뭐...”
“그거면 됐다.”
딱히 충고를 해주지 않고, 큼지막한 자신의 손으로 내 어깨를 두어 차례 두드리기만 하는 고로. 왠지 마음이 읽힌 것 같아서 창피하다.
“개시!”
곧바로 시작된 차봉전. 나는 테츠야와 놈의 상대가 내지르는 기합을 들으며, 잡념을 최대한 날려버리고 눈을 부릅떴다. 미적지근하게 굴지 말고 전부 봐두자. 배울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