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90화 (289/313)

Chapter 290 - 개학

“한판!”

펄럭-! 하고 들리는 깃발. 결승전 마지막 선봉전을 2:1 승리로 마무리한 나는,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한쪽 주먹을 꽈아악 쥐었다.

‘똥은 안 쌌다.’

결승까지 올라온 상대들이 경력도 있고, 경험도 뛰어났던 만큼 위기는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아파오는 것도 모를 만큼 경기에 집중하니 그래도 해볼 만 했고, 그 덕에 모든 선봉전을 이길 수 있었다.

첫 경기에 선취로 내어준 1점, 이번 경기에 동점을 허용한 1점을 빼면 전승. 이 정도면 선봉으로서 훌륭하게 했다고 볼 수 있었고, 이젠 팀원들에게 명운을 맡기면 되었다.

테츠야가 의외로 선전을 해주고 있으니 희망을 가져 봐도 되나? 그러한 생각을 해본 나는, 테츠야와 교대하고 자리로 돌아가면서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치나미와 렌카가 보인다. 전 대회처럼 여자부가 먼저 끝났구나. 보나마나 우승이겠지.

치나미는 날 향해 양손과 더불어 상체까지 좌우로 마구 흔들며 기뻐하는 중이었다. 반면 렌카는 팔짱을 낀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겠지?

고로의 도움을 받고 호면과 두건을 벗은 나는, 수건으로 얼굴에 흠뻑 묻어있는 땀을 닦아내었다. 그때, 경기장 중앙에서 죽도의 타격음이 강하게 들려오더니, 심판이 깃발을 들었다.

“한판!”

상대팀의 득점이었다. 여태 상대를 늪으로 끌고 가면서 경기를 길게 했는데, 지금은 첫 경기 때의 나처럼 순식간에 선취점을 내어준 것이다.

앞날이 캄캄해 보이는구나. 저놈을 응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은 세 명을 위해서 오글거리는 짓을 좀 해야겠다. 상대 팀을 응원하러 온 관중들이 좋아라하며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을 본 나는, 타이밍을 맞춰 입가에 손바닥을 대고 소리쳤다.

“미우라! 무조건 이겨!”

대회장 전체를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 이에 순간적으로 상대 팀의 흐름이 뚝 끊겼다. 그리고 내 외침을 시작으로, 모리를 비롯한 팀원들이 미우라에게 각자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음음... 훈훈한 그림이다. 테츠야라는 놈에게 격려를 한다는 것 자체는 껄끄럽지만, 적의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저놈도 나름의 재능은 있으니까, 승부욕이 있다면 어떻게든 경기를 원점으로 돌릴 거다. 라고 생각했으나...

쩌어억-!

“한판!”

이어진 경기에서, 테츠야는 또 상대에게 점수를 내어주고 말았다. 이번엔 어떻게든 오랜 시간을 끌었으나, 상대와의 경험 차이가 있어서인지 페이크를 간파하지 못하고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고 2:0으로 패배. 차봉전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죄송합니다.”

기가 죽은 채로 돌아온 테츠야의 사과에, 중견으로 나선 모리를 제외한 남은 팀원들이 괜찮다며 그를 다독였다.

“미안하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이번엔 나에게도 사과를 하는구나. 내가 저놈을 정말정말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팀이라는 단체 안에 포함되어있는 이상 책임을 묻는 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

더군다나 테츠야가 열심이 안 한 것도 아니라서, 나는 놈의 등을 격려차 툭 쳐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후 열심히 모리를 응원했다.

**

“우승, 시미즈다시 아카데미.”

단상 위에 있는 사회자의 말에, 나는 뚱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저번 대회 때처럼 이번에도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구나. 결국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라는 만화의 대사가 생각나는 하루다.

렌카와 치나미에게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이런 정신승리를 하려 했지만, 우승을 코앞에 두고 놓친 건 정말 아쉬웠다.

“다음은 대회 MVP입니다. 마츠다 켄, 단상 위로 올라와주십시오.”

MVP는 내가 먹게 되었다. 결승 상대였던 중견이 엄청 강하던데, 설마 내가 수상할 줄은 몰랐다.

선봉전 전승이라는 결과에 점수를 내어준 게 2점밖에 되지 않아서 수상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트로피를 얻으면 뭐하는가. 졸업하는 야마자키에게 트로피를 안겨주지 못한 게 신경 쓰이는데.

친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팀원이자 선배인데... 개인전이었다면 나 몰라라 했겠으나, 팀으로 나온 이상 준우승이라는 성적은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팀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트로피를 들고 내려온 나는, 가장 먼저 야마자키의 기분을 물었다. 헌데 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나? 괜찮은데?”

예상외로 쿨해서였다.

“.... 그래요? 아쉽지 않아요?”

“당연히 아쉽지. 하지만 대장전에서 내 실력을 원 없이 보여주기도 했고... 니들이 못한 것도 아니잖아. 트로피 욕심은 있긴 하지만 얼마 전에 개인전에 참가해서 우승했으니 괜찮아. 대학도 장학금 준다는 데가 세 곳 있어.”

“.....”

어이가 없다. 역시 사람은 잘 알아야 해. 야마자키라는 사람을 모르니까 괜히 오해도 하고, 내 스스로를 책망했잖아.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대회도 엄청 중요한 건 아니었었다. 중요했으면 나와 테츠야를 빼고 2, 3학년들만 무더기로 집어넣었겠지. 그래도 공식 대회이긴 하나, 목숨을 걸 만큼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역시 남자들의 땀내 나는 우정과 승부욕 같은 건 스포츠물에서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앞선 후회감이 싹 날아감을 느낀 내가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근데 너... 설마 신경 쓰고 있던 거냐?”

“그럴 리가요.”

“표정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새끼...”

히죽거린 야마자키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려고 했다. 나는 한걸음 슬쩍 물러나는 것으로 야마자키의 손을 피했다.

“서운하게 하네?”

허공을 가른 손을 무안한 듯 바라본 야마자키의 말. 어깨를 으쓱인 내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별로요.”

그렇게 모든 시상식이 종료된 후 대회장을 나선 나는 치나미를 만났다.

“후배님! 아쉽게 되었네요. 그래도 정말정말 멋있었어요.”

아쉽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다. 시원섭섭. 이렇게 표현해야 적당할 것 같다. 근데 저번 대회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나?

뭐가 됐든 간에 유종의 미는 거두었다. 그래도 정신력을 너무 갉아먹는 느낌이다. 이런 집중력은 여자한테 써야하는 건데... 앞으로 검도대회는 최대한 안 하는 쪽으로 해야겠다.

“감사합니다. 부장은 어디 갔어요?”

“렌카는 우승 트로피와 MVP 트로피를 놔두러 가셨어요.”

역시 받았구나. 렌카답다. 치나미의 표정을 보니 그녀 또한 큰 활약을 했겠지. 명불허전이라고 하나? 역시 예보니 아카데미의 검도부 여자 팀은 강호 중에서도 강호인가보다.

“그나저나 우승을 하지 못한 벌로 지옥훈련을 해야겠네요.”

돌연 근엄한 표정을 지은 치나미가 저런 말을 해왔다. 설마 진짜로 날 훈련시킬 생각이었나? 우리 치나미... 제자를 이렇게나 혹독하게 대하려 하다니, 가슴이 아파오려고 해요.

나는 탐탁찮은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기 싫습니다.”

“아닛...? 약속을 하셨잖아요.”

“그래도 싫어요.”

“네에...? 그럴 수가...?”

큰 충격을 받은 얼굴. 내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나보다.

어깨까지 추우욱 늘어뜨린 치나미를 데리고 대회장 뒤편으로 간 나는, 힘없이 딸려온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손녀에게 바깥구경을 시켜주듯, 그녀의 엉덩이 밑을 팔로 받치고 그대로 안았다.

“흐먓!?”

특유의 감탄사를 터뜨리며 내 어깨에 다급히 팔을 두르는 치나미. 그런 치나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움찔한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배님... 저... 땀을 많이 흘려서...”

“괜찮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래도...”

“냄새도 좋은데.”

“내, 냄새라니요...! 그런 망측한 말씀을...”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제 냄새가 별로인가요?”

“.... 아니요... 좋은... 앗...! 거긴...”

허리에 내 손길이 닿자 몸을 부르르 떨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귀엽다. 왜 이 말랑말랑한 살은 만지면 만질수록 힘이 날까? 렌카나 미유키도 그렇긴 하지만, 유독 치나미의 피부가 만지는 감각이 좋다.

“후아... 후...”

내 어깨에 푹 파묻히는 치나미의 얼굴. 그 아래의 도톰한 입에서부터 후끈한 바람이 새어나와 목을 간지럽혔다.

의식하지 못하는 야함. 그것이 겉으로 튀어나올 때의 꼴림은 그 어떤 것보다 더 뇌쇄적이었고, 지금 내 목을 저도 모르게 애무하고 있는 치나미가 그랬다.

“헤엑...”

노골적이고 느릿하게 치나미의 허리, 그리고 둔부를 만지작거리자, 그녀의 입에서 혀를 뺀 듯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귓가에 그대로 꽂히는 그녀의 야릇한 숨소리를 들으며 수위를 조금 더 높이려고 하던 나는,

“무, 뭐하는 거야 너희...!”

뒤따라 대회장 뒤편으로 온 렌카의 황당, 그리고 창피함이 섞여있는 목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그리고 치나미는, 정말 까무러칠 듯 놀라며 내게 안겨있는 채로 고개를 돌렸다.

“므앗... 죄, 죄송해요...!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면... 흐흠...! 후, 후배님. 일단 절 놓아주시는 게 어떨까요...?”

치나미의 어조는 꽤나 느린 편이었다. 안 그래도 느긋하게 느껴지는데, 흥분까지 한 상태에서 혀가 꼬여 더욱 느려진 상태. 때문에 치나미의 입은 다급한 몸놀림에 비하면 거북이 그 자체였다.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렌카가 몸을 배배 꼴 정도로 말이다.

“후배님...! 멈추세요...!”

단호한 어조다. 이건 내려놔야겠다. 아쉬운 속을 달래며 치나미를 내려놓자, 그녀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렌카에게 다가갔다.

“오, 오셨어요...? 버스는 언제 출발한대요...?”

“그게... 화장실 간 사람들이 많아서... 근데 너 괜찮아...?”

“네엣...? 넷...! 전 괜찮은데... 친우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나... 나? 그... 괜찮은 건 아닌... 듯한데...”

얼굴이 새빨개진 치나미를 보고는 자기 또한 이상한 감정이 들었는지 시선을 가만 두지 못하는 렌카. 그런 그녀를 보곤 더더욱 부끄러워진 치나미가 양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자그마한 얼굴을 가렸다.

“죄, 죄송해요...!”

“아니...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일단 그... 나 자리 비킬까?”

“아니요...! 여기 계셔도 돼요...! 여기 계셔주세요...!”

“.....”

나와 치나미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어색한 듯 옆머리를 긁는 렌카. 찐득한 관계를 대놓고 본 터라 아리송한 마음이 들었나보다. 그 아리송한 마음이란, 질투 같은 게 아니라 약간 야한 쪽의 감정이겠지. 그거면 된 거다.

“우승이랑 MVP 축하해요.”

태연스럽기 짝이 없는 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렌카가 대답했다.

“어...? 고, 고마워...”

“복귀는 언제래요?”

“.... 앞으로 5분 뒤인데...”

“그래요? 슬슬 가야겠네. 가기 전에 사탕 먹을래요?”

“무, 뭐라는 거야...!! 웬 사탕...!? 내가 맡겨놓기라도 했어...?”

너무 심하게 모르는 척을 하잖아. 저런 반응이면 누가 봐도 수상쩍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겠다. 순진무구한 치나미는 아닐지 모르지만.

“가자, 치나미...! 저런 이상한 놈이랑 어울리지 마.”

“흐엣...?”

버럭 화를 낸 렌카가 치나미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한 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대회 마무리는 잘 됐나? 뒤풀이는 빠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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