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2 - 개학 #3
예보니 아카데미의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곳곳에 보인다. 만날 사람이라도 있는지 뛰어가는 학생, 천천히 인도를 거닐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학생,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만면에 미소를 띠는 학생 등... 풋풋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저들을 보니 내 가슴도 덩달아 뛰는 기분이다.
기분을 내기 위해 차를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타고 왔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학생들이 들어가고 있는 교문까지 걸어간 나는, 팔뚝에 풍기(風紀)라 쓰여진 완장을 차고 있는 미유키를 발견했다.
한 학생회 임원과 함께 학생들의 제복 차림을 면밀하게 살피던 미유키는, 곧 나를 알아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안녕, 마츠다 군.”
“안녕, 미유키.”
간단한 인사지만 뭔가 싱그럽게 느껴진다. 미유키 또한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만면을 활짝 폈다.
“제복 잘 입었네?”
“잘 입었지 그럼.”
미유키의 시선이 내 아래로 향했다. 선명하게 드러난 바지선 아래의 바짓단을 슬쩍 살핀 그녀가 말했다.
“바지 줄였나 확인해봤어.”
어제 다림질을 해놓고 입어보라고까지 했으면서 이상한 트집을 잡고 있다. 저건 그냥 내게 장난을 치고 싶은 것. 미유키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감시가 심해서 아쉽지만 못 줄였어.”
“그래? 그럼 계속 잘 감시하라고 전해줘.”
“오늘 저녁에 전할게.”
“응.”
시답잖은 농담을 건넨 우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킥킥거렸다. 재미 같은 건 하나도 없는 가벼운 대화였음에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커서 그런지 절로 웃음이 나온다.
“들어가 봐. 2-A반으로 가야하는 건 알지?”
“몰랐는데.”
“어제도 말해줬잖아.”
“까먹고 있었어. 근데 책상 배치는 어떡하냐? 아무데나 앉아?”
“아니. 그것도 어제 일단 1학년 때랑 똑같이 앉으라고 말했잖아.”
“그랬냐?”
“모르는 척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모르겠네. 그리고 가방... 한쪽 어깨에 걸쳐놓지 마.”
“알았다. 잔소리는...”
미유키의 성화에 가방을 똑바로 멘 나는, 이제 얼른 가보라고 말한 그녀가 내 등을 떠밀자 마지못한 척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교정 안으로 들어가 새로 산 실내화로 갈아 신고, 익숙한 냄새를 맡으며 1학년 복도로 간 나는 아차 했다.
이제 2학년이었지. 미유키에게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들어놓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습관이란 게 이렇게나 무서워요.
텅 빈 복도를 쓰윽 바라본 나는 계단을 올라,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2학년 복도로 갔다. 이후 복도 바로 옆에 있는 2-A반을 찾아 미닫이문을 열었다.
드르륵.
목재끼리 맞물리는 특유의 불협화음과 함께, 교실의 전경이 들어온다. 익숙한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하다가, 내게로 눈을 돌리는 게 보인다. 초창기의 경멸, 두려움이 가득했던 시선과는 달리, 지금은 평범한 호의가 느껴진다.
“안녕, 마츠다 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여학생도 있었다. 문제는 내가 이들의 이름을 전혀 모른다는 것. 테츠야와 빵녀, 부반장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기억이 안 난다.
“안녕. 잘 지냈냐?”
학생들의 인사를 받아주고 대충 형식적인 대화를 나눈 나는, 1학년 학기가 끝날 때 앉았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앞에서 날 쳐다보며 빵을 우물거리고 있는 빵녀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야, 오랜만이다?”
“콜록.”
“그래, 그래. 어디 아픈 덴 없고?”
“콜록...!”
“다행이네.”
“.... 케헥...!”
“난 됐다. 너나 많이 먹어라.”
내게 소보로빵을 내밀던 빵녀의 고개가 천천히 주억거려졌다. 볼 때마다 입에 밀가루를 넣고 있는데, 빵이 그렇게나 좋은가? 다른 걸 넣어보고 싶어진다.
“너는 여전하구나? 의외로 반갑네?”
빵녀 옆에 앉은 부반장의 인사.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는 그녀를 쳐다본 내가 물었다.
“안경 바꿨네?”
“오, 아네?”
네모네모한 뿔테안경과 무테안경을 즐겨 쓰던 부반장이었는데, 지금은 동그란 디자인의 테가 얇은 안경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수수하긴 하지만 귀여움이 한층 증가되었구나. 어울린다.
“알지. 잘 어울린다. 예전 안경은 별로여서 볼 때마다 짜증... 아니다.”
“할 말 다 해놓고 아니라고 하면 뭐해? 그런 거 미유키가 뭐라고 안 해?”
“지금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지.”
“그럼 미유키 오면 다 말해야지.”
“그러진 마라.”
“칭찬해줬으니까 특별히 넘어가줄게.”
특별히? 넘어가 줘? 감히 내게 그런 오만한 말을 하다니. 입에 자지를 물고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너 검도부 매니저지? 홍보 포스터 만들었어?”
이어지는 부반장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한 내가 반문했다.
“웬 포스터?”
“이제 후배들 입학하잖아. 부활동 하라고 유도하려면 만들어야지. 입부한 후배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분이 좋은 건 물론이고 예산도 늘어나니까 매니저들은 홍보를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던데... 넌 아니야?”
“글쎄. 난 들은 거 없는데. 오늘 한 번 물어봐야겠네.”
포스터는 치나미가 제작하려나? 복숭아 캐릭터를 듬뿍 넣어놓은, 검도부답지 않은 포스터가 만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의외로 포스터의 귀여움에 끌리는 여학생들이 있긴 할 수도...
“근데 넌 무슨 동아리냐? 저번에 독서부에 들어갔다고 했었나?”
“웬 독서부? 나 영화부인데.”
“그러냐? 그것도 어울리긴 하네. 빵녀, 너는?”
소보로빵을 우물거리면서 우유를 마시려는 빵녀에게 턱짓을 하자, 그녀가 여느 때처럼 기침을 했다.
“콜록.”
“제과제빵부?”
“켁!”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보내오는 빵녀. 예전에는 그래도 말은 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안 하는구나. 내가 많이 편해졌나보다.
그녀들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옆을 보니, 테츠야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설마 미유키라도 그리나 싶어 슬쩍 살펴보니, 복싱 글러브를 낀 남자 캐릭터의 선을 따고 있는 게 보였다.
캐릭터가 꽤나 남자다운 인상인데... 몸까지도 적당한 근육질이다. 혹시 테츠야가 원하는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그림으로 투영한 건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생겼다.
“야, 미우라. 뭐 그리냐?”
“.....”
불러 봐도 대답이 없는 그. 일부러 씹는 건지, 아니면 그림에 집중하고 있어서 못 들은 건지 모르겠다. 샤프를 들어 책상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재차 테츠야를 부르자, 그제야 놈이 날 돌아보았다.
“불렀어?”
“어. 네가 지금 그리고 있는 캐릭터는 뭐야? 만화에 나오는 앤가?”
“이거? 그냥 그려본 거야.”
“창작?”
“그렇지.”
“잘 그리네.”
“.... 고맙다.”
감사인사를 할 줄은 몰랐다. 검도대회 때 파이팅을 외쳐준 게 고마웠나?
이런 걸 보면 테츠야가 나름 성장이란 걸 하고 있는 듯하다가도, 잊을만하면 이상한 짓을 해서 그 생각을 싹 날아가게 한다는 말이지. 예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저놈은 참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교실 안으로 미유키가 들어왔다. 교문 검사를 끝냈는지 약간 피로한 얼굴로 동급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이리로 다가온 그녀는, 테츠야의 그림을 보며 멋지다고 감탄했다.
이후 쑥스러워하는 놈에게 방긋 웃어주더니, 창가 자리에 앉아 옆에 있는 내 삐죽삐죽하게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얌전히 있었지?”
“어.”
“잘했어.”
엄지와 검지를 쫙 펼쳐 내 턱을 잡고는 좌우로 흔드는 미유키. 수학여행 때도 이랬었는데, 그때 빵녀와 부반장만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교실 안에 학생들이 전부 꽉 차있는 상태다.
시선이 전부 쏠린 것까진 아니지만, 수십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애정표현을 하는 그녀가 기껍다. 아예 나는 자신의 것이라고 못을 박아놓는 건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나 1교시 끝나면 잠깐 나가봐야 되거든? 그러니까 수업 열심히 듣고 있어. 점심시간에 검사할 거야.”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은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뭔 검사야... 첫날인데 봐줘라. 어차피 선생들도...”
“님.”
“아, 그래. 선생님들도 수업 안 하고 그냥 쉬라 할 텐데.”
“그건 모르는 일이지. 테츠야 군도 마찬가지니까 개학 첫 날이라고 딴 짓하면 안 돼. 알았지?”
책상 아래로 상체를 수그린 채 테츠야를 바라본 미유키의 당부. 날 향한 미유키의 스킨십으로 인해 표정이 굳어있던 테츠야가 억지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야.”
그 대답에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은 미유키가 가방에서 책과 필기구를 꺼냈다. 그런 그녀의 필통을 만지작거린 내가 물었다.
“근데 왜 또 나가?”
“아... 오늘 입학할 1학년들 오는 날이거든.”
“개학 첫날이라 바쁠 텐데 벌써 오게 한다고?”
“아카데미 분위기도 보여주고, 소개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오늘뿐만이 아니라 겨울학기에 세 번은 더 올 거야.”
분명 카페에서 히요리와 그녀의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오리엔테이션과 라커 배정을 하기 위해 하루만 오면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통지문을 잘못 읽은 건 아닐 테고... 어쩌면 ‘최소’ 하루는 와야 한다는 뜻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럼 혹시 오늘 히요리도 만날 수 있는 건가? 아니, 필수로 참가해야하는 게 아니라면 친구들과 놀기 바빠서 오지 않겠지. 그래도 가보긴 해야겠다. 혹시 아는가? 카페나 서점에서처럼 또 만날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발품을 팔아야 맞는 거다.
“아카데미 소개는 네가 해?”
“아니. 그건 다른 학생회 선배들께서 따로 하실 거야. 나는 그냥 인사만.”
“그럼 그냥 안 가면 되는 거 아닌가?”
“학생회는 필참이야.”
“사람을 막 부려먹네. 못됐다.”
투덜거리는 내 팔을 토닥여주는 그녀. 가늘고 얇은 손가락 끝에 윤기가 나는 손톱이 매력적이다. 따로 네일 같은 걸 칠하지 않고 저렇게 영양제만 발라도 좋구나. 만지작거리고 싶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못 봤던 교사가 들어와 자신을 소개하며 방학은 잘 보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이구동성으로 힘없이 대답을 하는 학생들에게 빠졌다며 혀를 끌끌 찬 늙은 그는 출석을 부르자마자 수업을 시작하였으나, 오래 진행하지는 않고 쉬는 시간을 주었다.
첫날이라 학생들이 퍼진 만큼 조금은 풀어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미유키는 짧게나마 배웠던 것을 노트에 옮겨 적고, 몇 번이나 복습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모범생다운 그녀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를 따라 필기를 하면서 1교시를 보냈다. 이후 미유키가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교실을 나서자, 약간의 텀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매점에 들러 빵녀와 부반장이 부탁한 먹거리를 산 뒤 운동장 쪽으로 향하자, 교문 안으로 틈틈이 들어오는 신입생들에게 화사한 인사를 건네는 미유키를 보았다.
친절한 얼굴로 팜플렛을 나누어주는데, 고생이 많다. 끝나면 내 방식대로 수고했다고 치하해줘야지.
꽤나 가까운 곳에서, 그러나 미유키가 볼 수는 없는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그리 생각한 나는, 쉬는 시간이 끝나가자 발걸음을 돌려 교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저기요...! 학생!”
“넹?”
미유키의 다급한 부름에 대답을 하는 한 여학생의 익숙한 말투가 들려오자,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