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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93화 (292/313)

Chapter 293 - 통성명

히요리가 미유키에게 불려가고 있다. 왜 미유키가 갑자기 저러는 건지는... 히요리가 입은 제복 치마를 보면 답이 나왔다. 두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 궁금했기에, 나는 혹여 2교시를 지각하더라도 대화를 엿들어보기로 했다.

목소리가 간신히 들려올만한 곳에서 몸을 숨긴 내가 최대한 집중을 하자, 둘이 나누는 이야기가 희미하게 귀에 꽂혔다.

“치마가... 너무 짧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요?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뎅...”

“.... 이게요?”

“아닌가요?”

“전혀 아닌데...? 주변을 둘러보세요.”

“음... 아, 제가 조금 많이 짧게 입은 것도 같긴 하네요.”

조금 많이가 아니라 상당히 짧던데... 우리 히요리는 과감한 면이 있다. 보수적인 내가 잘 훈육해줘야겠다.

“저희 아카데미에 신입생으로 들어오시는 거 맞죠?”

“맞아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은 왜요? 앗...! 저 설마 찍힌 거예요?”

순진한 말투와는 다른 직접적인 질문. 그에 당황한 미유키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찌, 찍힌 게 아니라... 치마 길이가 허용범위보다 짧아도 너무 짧아서... 공식 학기 전까지 확인해보려고 했던 거였어요. 그때까지는 유예기간을 드리려고 해요.”

“아... 그런 거였구나. 근데 이 치마는 시접이 여유롭지 않아서 기장 못 늘리는뎅... 새로 사야하나?”

“.....”

히요리의 태연한 중얼거림에 벙 찌는 미유키. 그녀를 쳐다본 히요리가 찔끔하더니 말했다.

“아, 이대로 입고 온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저는 아사히나 히요리에요.”

“아사히나 히요리 학생... 알겠습니다. 그... 정 줄이고 싶으시면 허용범위 안으로만 해요. 통지문에 교칙도 같이 왔을 텐데, 세 번째 항목을 보시면 나와 있을 거예요.”

“넹.”

“.... 일단 저쪽으로 가셔서 안내 받으세요. 팜플렛 들고 가시구요.”

“넹.”

히요리의 발랄한 대답 이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예상했던 대화였는데 나는 왜 스토커처럼 이러고 있을까. 괜히 자괴감이 생긴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른 학생들을 안내하고 있던 미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츠다 군? 여기서 뭐해?”

몸을 일으키자마자 알아보는데, 역시 미유키구나 싶다. 태연한 걸음걸이로 미유키에게 가까이 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젤리 한 봉지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거 먹어.”

“뭐야... 나 주려고 산 거야?”

“어.”

“엄청 감동이긴 한데... 지금 수업 시작하지 않았어?”

“2분 남았어.”

“그래? 젤리 고마워. 얼른 가봐.”

“알았다. 힘든 건 없고?”

“힘든 건 딱히 없는데, 되게... 과감한 후배가 한 명 있었어.”

방금 본 히요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내 기준에서도 치마가 짧다고 느낄 정도인데 미유키는 오죽하겠는가. 방금 일을 모른 척하기로 한 내가 물었다.

“과감하다고?”

“장난꾸러기 같은 후배인데, 치마가 엄청 짧더라.”

“벌점 줬냐?”

“그 친구들은 봄 학기에 입학하는데 무슨 벌써 벌점을 줘. 그냥 줄이고 싶으면 허용범위 안에서만 줄이라고 했어.”

“장난꾸러기인 건 어떻게 알아?”

“그냥 인상이 그랬어. 그리고 엄청 예쁘게 생겼던데...”

“그래? 사진 없어?”

“그런 게 어디 있어...! 바보.”

장난을 치자 피식하더니 내 팔을 미는 그녀. 낄낄거린 나는 빨리 교실로 돌아가라는 미유키의 성화에 알겠다고 대답하며 교정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면서 미유키와 여러 번 손인사를 한 건 덤. 왠지 가슴이 풋풋해져옴을 느낀 나는, 오늘 느낌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며 교실로 돌아갔다.

**

“안녕, 마츠다 군.”

점심시간. 미유키와 함께 화장실에 간 테츠야를 기다리던 나는, 모르는 여학생의 인사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 근데 누구냐 넌?”

일단 인사를 받아주자, 옆에 있던 미유키가 팔꿈치로 내 허리를 꾸욱 눌렀다. 그리고는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츠다 군...! 학생회 선배셔...! 뱃지 안 보여?”

미유키의 말마따나 학생의 가슴엔, 학생회를 상징하는 금색 뱃지가 달려있었다. 미유키는 안 끼고 다니던데, 저걸 봤어야 알지.

그나저나 아주아주 권위주의적인 물건이로구나. 내 몸에서 나온 허여멀건한 점액으로 저 뱃지에 먹칠을 하고 싶어진다.

무안한 듯 머리를 긁은 내가 고개를 까딱하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냐. 작년에 체육관에서 봤었는데 기억 안 나?”

“체육관요?”

“응. 신입생 학부모님들 모셔서 설명회 할 때.”

히요리의 부모님이 왔는지 확인하려고 했을 때였나? 그러고 보니 그때 본 것 같기도 하다.

“아... 기억이 나네요.”

“오며가며 눈도 몇 번 마주쳤었는데 서운하네.”

관심을 보이는 건가? 아니면 의례적인 말인가? 표정이 무덤덤해서 헷갈린다.

“농담이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미유키, 오늘 오후수업 끝나면 잠깐 학생회실에 들러줄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몰래 내 등을 툭 친 미유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선배.”

“응. 그럼 밥 맛있게 먹어.”

밝게 인사를 하고 떠나는 그녀. 선배의 멀어지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유키가, 돌연 내 제복 소매를 잡았다.

“왜.”

“마츠다 군은 학생회 사람들 얼굴도 몰라?”

“알아야 되냐?”

“내가 소속된 곳인데?”

“너만 알면 그만이잖아.”

대답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을까? 날 훈계하던 미유키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얼핏 보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나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 은근히 좋아라하는 그녀를 내려다본 내가 말했다.

“좋냐?”

“뭐래... 좋긴 누가 좋아? 난 지금 마츠다 군을 나무라고 있는 건데?”

“그래? 너무너무 무서운 걸?”

“방금 말투 뭐야?”

“별로였나?”

“별로는 아닌데 엄청 이상했어. 안 어울려.”

배시시 웃은 미유키가 소매를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흔들었다. 혹시라도 교사에게 들킬까봐 대놓고 애정표현은 못하지만, 그래도 간접적으로는 하고 있는 모습이 기껍다. 작년 여름에 굉장히 보수적이었던 그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행동은 격세지감이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이니 만족한다.

“나 왔어.”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음험한 목소리. 테츠야가 미유키의 옆에 서는 것을 본 나는, 저놈은 언제쯤 빠져주려나 생각하며 미유키와 함께 급식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맞은편 멀찍이서 다가오는 두 여자를 보고 흠칫했다.

“히요리, 도시락 싸올 거야?”

“그러려고.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예보니 아카데미 급식은 별로래.”

“아 진짜? 그래도 신청은 해놔야 하지 않을까?”

“그런가? 일단 돌아가서 엄마아빠랑 상의해보지 뭐.”

만면에 웃음꽃이 핀 채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히요리와, 서점에서 보았던 그녀의 친구였다.

벌써부터 콧속에 풋풋하고 톡 쏘는 레몬 향이 맴도는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을 해본 나는, 최대한 히요리를 모른 척하기로 다짐하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아! 교문에서 봤던 학생회 선배! 안녕하세요?”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히요리가 미유키를 알아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사성은 참 밝다. 보는 사람 기분 좋아지게.

“안녕하세요, 아사히나 학생. 교내는 잘 둘러보셨어요?”

그녀의 치마를 흘깃거린 미유키의 물음. 활짝 웃은 히요리가 대답했다.

“네! 거의 다 둘러보고 지금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렇구나... 식사는 하셨어요? 오늘 오신 예비 신입생 분들한테는 급식 무료인데.”

“아뇨. 나가서 먹으려... 어...?”

미유키의 옆에 있는 나를 바라본 히요리의 아리송한 감탄사에, 올게 왔구나 싶은 내가 얼빵한 탄성을 터뜨렸다.

“엉?”

“어어...? 어어어!!”

뒤이어 안 그래도 큰 눈이 더더욱 커지는 히요리. 그런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 미유키와 테츠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릴 번갈아 쳐다볼 때쯤, 내 얼굴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바라본 히요리가 소리쳤다.

“카페 알바생 님 아니에요!?”

놀란 건 이해하겠는데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면 다 듣잖아. 목청이 무척 커서 순간 놀랐다.

여기서는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맞을까? 덩달아 놀라야하나? 아니면 덤덤하게 알아본 척을 해야 하나... 짧은 시간동안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을 하던 나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카페에 몇 번 왔던 손님이네요?”

“맞아요! 여기 다녀요? 선배셨어요?”

텐션이 너무 높아서 따라가기가 힘들다. 지금 히요리의 옆에 있는 친구는 그녀와 정말 친하다고 알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버틴 거지?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가긴 하는데...”

“아 진짜요!? 저 여기 입학해요!”

“그래요...? 1학년으로?”

“네! 우와... 엄청 신기하다...! 응...?”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던 히요리가 테츠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가 민가 한 표정. 테츠야와 히요리, 두 사람은 저번에 카페에서 딱 한 번 마주쳤던 게 전부여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음험한 것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놈이니만큼 눈에 띄긴 띄었겠지.

“안녕하세용...?”

잠깐 테츠야에게로 눈길을 주던 히요리는, 놈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한 후 관심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봄 학기 때 잘 부탁드려요! 제 이름은 히요리에요. 아사히나 히요리.”

“마츠다 켄입니다.”

드디어 통성명을 했구나. 왠지 감격스럽다. 히요리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의 이름을 자신이 편한 대로 줄여 부른다는 것. 가령 미우라 테츠야의 경우는 미테츠라고 불렸고, 미유키 같은 경우는 하나미 선배라고 불렸다.

내 경우엔 마츠켄이려나? 상큼발랄한 말투로 마츠켄 선배! 마츠켄 선배! 라며 날 부르는 히요리가 상상돼서 가슴이 싱그러워지는 느낌이다.

“선배는 성함이 뭐예요?”

붙임성 좋은 히요리가 미유키에게도 이름을 물었다. 그때까지 멍하니 나와 히요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던 미유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한걸음 물러나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나는, 미유키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자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저런 미유키의 반응은 야한 짓을 할 때 말고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데...

히요리가 나타나자마자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구나. 미유키와는 앙숙까진 아니더라도 성격이 달라 자주 맞부딪치겠지만, 다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어쩌면 의외로, 두 사람이 잘 어울릴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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