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5 - 불안하지만 도발을 끊을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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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 치나미.”
“친우님도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뵈어요.”
치나미와 밥을 먹고 헤어진 렌카는 전철을 탔다. 오늘 아침에도 느꼈지만, 방학 내내 마츠다의 차를 타다가 대중교통을 타니 신선한 기분이다.
‘마츠다... 이 나쁜 새끼...’
마츠다를 생각하니 부실에서 있었던 일이 되새겨진다. 그의 뜬금없는 스팽킹에 저도 모르게 암캐 같은 신음을 내어버린 자신... 다시 생각해도 쪽팔려 미치겠다.
감독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원들까지 놀란 것 같던데... 설마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겠지?
어쨌거나 오늘 받은 크나큰 굴욕을 되갚아주기 위해 MK에게 욕을 할 것이다. 현재의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이런 조잡한 복수밖엔 없지만, 면전에다가 하기엔 마츠다의 보복이 두려우니 어쩔 수 없다.
스스로의 소심소심한 태도를 콧방귀로 무시하며 집에 도착한 렌카는,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큰소리로 다녀왔다는 신고를 했다. 그리고는 곧장 방으로 가려다가,
“렌카! 삼촌들한테 소포 왔어! 식탁 위에 있으니까 봐봐!”
위층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식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삼촌‘들’이라 함은, 외곽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쌍둥이를 말함이었다. 명절도 아닌데 갑작스레 소포라니? 개구쟁이 같은 그들이 무언가 장난을 치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식탁에 놓여있는 자그마하고 두툼한 포장지. 그것을 든 렌카는 송장 스티커를 살펴보다가 입구를 열었다.
사각형 모양의 종이봉투가 에어캡에 감싸여져 있다. 에어캡 위에는 테이프로 붙인 듯한 쪽지 하나가 있었다.
[잘 나와서 보낸다. 보고 싶으니까 심심하면 들러라.] 라고 쓰여진 한 줄. 삼촌들의 담백한 메시지를 본 렌카가 실소를 터뜨리고는, 잘 말려있는 에어캡을 풀고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이건...’
이건 분명... 마츠다가 삼촌들의 가게에 처음 들러서 일이 끝났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가게 앞에 붙어있었던 사진이기도 했다. 떼서 보낸 모양인데... 저번에 삼촌들이 이걸 붙여놔야 손님들이 마츠다의 얼굴을 보고 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럼에도 자신에게 보냈다니, 대체 무슨 의도일까? 마츠다랑 같이 들르라는 소린가? 그렇다면 마츠다에게 주말에 갈 수 있냐고 한 번 물어볼까 싶다.
코팅된 사진에 전등이 반사돼서 마츠다의 얼굴이 가려진다. 빛을 등지고 사진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렌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두 험악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 사이에 잘생긴 젊은 청년.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지지만, 은근히 어울리는 것도 같다. 약간 큰삼촌의 아들 같다고 해야 할까?
“으아아...!!”
그러한 생각을 해보던 렌카가 고개를 마구 털어내었다. 마츠다가 큰삼촌의 아들이라니... 그러면 렌카 자신은 사촌과 관계를 해버린 것이 되잖은가. 물론 상상만 했을 뿐이지만, 섭리에 어긋나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확 밀려든다.
들고 있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올려놓은 렌카는, 이걸 어디다가 보관할지 고민해보았다.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기엔 마츠다를 향한 마음이 큰 것처럼 보여서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또한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면 놀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책상 서랍에 대충 놓자니 그건 또 싫은데...
어쩔까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일단 사진을 책상 구석에 놓아두기로 했다. 책상의 수납장 바로 밑. 책상엔 가끔 앉으니까 여기 두면 자주는 아니지만 틈틈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납장 아랫부분이 먼지도 막아주니,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사료된다.
자신의 선택에 아주 만족해한 렌카는, 마지막으로 사진을 흘끗 바라보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애니쉐어 어플을 켰다. 이후 곧장 MK에게 쪽지를 보냈다.
[MK 님.]
2분 안에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뭐라고 해야겠다. 그런 마음을 먹은 채로 방에서 나온 렌카는, 주방으로 내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물을 컵에 따르고 마시려는 찰나, 우웅! 하는 진동음이 들려왔다.
[왜요.]
딱 2분 정도 걸린 것 같지만, 이대로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왜? 애초에 마츠다에게 쪽지를 보낸 이유가 트집을 잡으면서 골려주기 위해서니까. 유치한 건 알지만 뭐 어쩌라고? 자신만 만족스럽고,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속편하게 생각한 렌카는 천천히 물을 마시고는 휴대폰을 두드렸다.
[답장이 왜 이렇게 늦죠?]
[이 정도면 빠른 거 아닌가?]
[너무 느려요.]
[어플을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는데 이해하세요.]
[이해 못하겠는데요?]
[왜 시비이신지? 정 빠르게 답장 받고 싶으면 라임 아이디 알려줘요.]
그건 절대, 죽는 한이 있어도 안 된다. 세컨 아이디를 만든다고 해도 불가능. 이노쨩의 진정한 정체가 탄로 날만한 여지는 뭐든지 막아야 마땅했다.
[작업 멘트가 굉장히 낡았네요. 촌티 나요.]
[작업이 아니라 팩트를 말한 것뿐인데? 늦은 답장에 불만이 있으면 전용 메신저 어플을 써야죠.]
[안 돼요.]
[그럼 답장이 늦어도 그러려니 하시든가.]
[싸가지 없네요.]
이유 따윈 전혀 없는 정당하지 못한 비난에 어이가 없어졌을까? 마츠다의 답장이 끊겼다.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본 렌카가 쪽지를 이어서 보냈다.
[인정하시는 건가요?]
[아뇨.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익명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욕은 하지 않더라도 저렇게 순순히 수긍하진 않았을 텐데... 왜 저러지? 갑자기 이상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다고 생각한 렌카가 화제를 돌렸다.
[뭐하시는 중이었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이요?]
[어떻게 하면 이노쨩 님을 교육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어요.]
‘교육’이라는 단어에, 렌카의 온몸이 움찔했다. 현실에서의 자신도 마츠다에게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온갖 수모를 겪고 있었는데 이노쨩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을 심산인가? 기가 센 사람을 굴복시키고 싶은 취향이 있는 건 알았지만 참... 미친놈이다.
헌데 지금 이노쨩에게 관심을 가진 건가? 그래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었나? 하나자와 미유키는 물론 치나미, 그리고 자신과도 만나고 있는 바람둥이 주제에, 이노쨩에게도 손을 뻗으려 하다니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물론 마츠다가 두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걸 알면서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렌카 자신도 염치가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배알이 조금 꼴린다.
그나저나 자신의 분신인 이노쨩에게 관심을 있는 듯한 마츠다를 보니까 기분이 굉장히 묘하다.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한... 짜증이 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그런 애매한 느낌이었다.
[교육은 무슨... 조교겠죠. MK 님은 조교물 매니아잖아요.]
[단어는 순화해서 쓰는 게 좋습니다. 근데 제가 추천해준 만화는 다 봤어요?]
웃기시네. 자신에겐 필터도 거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면서, 어디서 예의 있는 척이야. 속으로 그리 꿍얼댄 렌카가 답장을 보냈다.
[아뇨. 재미없어요.]
[보라고 했잖아요.]
[제가 왜 MK 님의 말을 들어야하나요?]
[짜증나네.]
[(๑ᵔ⩊ᵔ๑) 짜증난다고 하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그래요. 조만간 두고 봅시다.]
‘응...?’
마츠다의 메시지를 본 순간, 렌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만간 두고 보자는 말이 무척 의미심장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노쨩에게 하는 말일 텐데, 현실의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느낌. 아까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 찾아오려고 하자, 렌카는 마음을 다스렸다.
그냥 기분 탓이다. 이노쨩의 정체를 숨긴 것 때문에 찔려서 그런 거다. 자신만 조심하면 된다. 그러한 다짐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렌카가 마지막으로 쪽지를 보냈다.
[엿 먹어.]
**
이틀 차 아카데미는 여전히 첫날의 싱그러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쉬엄쉬엄 했던 첫날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자, 학생들의 표정에 절망이 서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쯔쯔... 죄다 퍼졌구만.”
좀비처럼 온몸을 축 늘어뜨린 학생들을 보며 혀를 차는 수학선생은 덤. 그러고 보니 어제 양호선생을 보러 가지 않았었는데, 오늘 시간이 나면 한 번 들러봐야겠다.
책상에 팔을 괸 채로 칠판을 쳐다보며 잡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내 손등에 아주 약간의 따끔한 감촉이 느껴지자 정신을 차렸다.
“집중해, 바보야.”
옆에 앉은 미유키가 샤프의 촉으로 내 손을 아프지 않게 누르고 있다. 압력으로 인해 눌린 살이 하트 모양이 되도록 여러 번 찌르는데,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야말로 내 손에 그림 그리느라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소리 내지 않고 킥킥거린 미유키가 말없이 샤프를 움직여댔다. 그 사이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교사가 떠나자, 아예 내 손을 자신의 책상 가운데에 놓아두고는 사인펜을 들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거 수성 펜이냐?”
“조용히 해.”
갑자기 심심해져서 해소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화장실이 가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겠다.
손등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미유키를 지켜보며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던 나는, 동급생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귀를 쫑긋했다.
“어제 복싱부가 엄청 인기 많았대. 아직 홍보 포스터도 없는 상태인데 운동 좋아하는 예비 신입생들이 한 번씩 들렀다던데?”
“진짜? 왜? 우리 아카데미 복싱부에 내세울 게 있나?”
“이번에 2학년 되는 동기가 작년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잖아. 인터뷰에서 감독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유명해졌나봐.”
“감독을 보고 입부하려는 건가보네?”
“그렇겠지.”
“스승한테 감사하다고 하는 건 흔한 일 아니야? 무슨 인터뷰를 했길래 그런대?”
“나도 몰라.”
한 학생이 감독의 지도를 머릿속에 잘 집어넣고, 열심히 연습하여 결과를 얻어내는 것... 이거 소년만화에서 나오는 클리셰 아닌가? 주인공인 내가 아니라 엑스트라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근데 왜 우리 검도부에는 예비 신입생들이 오지 않았던 거지? 검도부 여자 팀의 성적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자부 또한 이번 대회에서 준우승 두 번을 차지했기에 강호로 평가받을 만도 하지 않나?
심지어는 그 대회에서 신인상 한 번, MVP 두 번을 차지한 선수가 여기 떡하니 있고, 참가만 했다 하며 상을 싹쓸이하는 렌카까지 있는 상황인데... 올해 입학할 신입생들 중에서 검도에 관심이 있는 놈들이 없는 건가? 아니면 검도부실이 외곽에 있어서 못 본 건가?
뭐가 됐든지 간에 심한 박탈감이 느껴지는구나. 나중에 렌카나 치나미가 입부생 관련 문제로 골치를 썩으면, 복싱부에 쳐들어가서 몇 놈을 강제로 끌고 와볼까 싶다.
“다 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미유키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내 손을 들어올렸다. 손등에 그러진 빨간 하트,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두 남녀. 미유키가 예전에 노트에 그렸던, 그리고 24시간 운영하는 라멘집에서 그렸던 캐릭터와 똑같다. 오랜만에 미유키와 썸을 타고 있던 시간이 생각나는 것 같아서 가슴이 풋풋해진다.
“잘 그렸네. 근데 그거 수성 펜이냐고.”
“유성인데?”
“그럼 지우기 힘들잖아.”
“지우고 싶어? 내가 그려준 건데?”
“그건 아닌데...”
“농담이야. 수성 맞아.”
“이제 화장실 가도 되냐?”
“지우려고?”
“아니... 생리현상.”
“그러면 가도 돼. 근데 손 씻으려면 손바닥에만 물 묻혀.”
그림이 지워질까봐 우려스럽나보다. 저럴 거면 아예 유성 펜으로 그리든가 하지, 내 색으로 물들면서 막무가내 기질이 조금 생긴 미유키... 너무 무섭다.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