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96화 (295/313)

Chapter 296 - 말랑말랑, 화끈화끈

똑똑.

단단한 목재에 노크를 한 나는, 안에서부터 들어오라는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문을 열었다.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훅 하고 들어오는 약품 냄새... 왠지 정감이 간다.

“어디가 아파서 온 거니?”

원형 의자에 앉아있던 양호선생이 날 쳐다보며 저런 물음을 해왔다. 흰 가운, 그 안에 입고 있는 블라우스로도 감추지 못하는 풍만한 가슴은 여전하구나.

“응? 너구나?”

날 알아본 듯한 양호선생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반가운 기색도, 싫은 기색도 없는 저 무덤덤한 얼굴을 쾌락으로 덧칠해주고 싶다.

“안녕하세요.”

“안녕. 오랜만이네.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어?”

“아파서 온 건 아니고, 그냥 인사드리려고 와봤습니다.”

“굳이?”

굳이라니... 이 몸이 친히 행차하였으니 반가운 척이라도 해야지, 너무 정이 없잖아. 벌점을 1점 부과하겠어요. 5점이 채워지면 음탕한 암컷으로 만들 거예요. 그러고 보니 날 알아볼 때도 너라는 호칭만 썼는데, 이름은 기억하고 있을까?

양호선생의 잘 정돈된 책상 위에 비타민 음료를 하나 올려둔 나는, 그녀가 무어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작년에 신세를 많이 져서... 이거라도 드리고 싶어서요.”

그러자 양호선생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성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음료가 든 유리병을 들어올린 그녀가 감사를 전해왔다.

“고마워, 잘 먹을게.”

내가 표정에 사심을 드러냈다면 절대 받지 않았겠지? 만약 양호선생이 히로인이었다면 공략 난이도는 얼마나 될까. 그런 궁금증을 삼킨 내가 히죽 웃어보였다.

“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양호실을 나서려는데,

“잘 가, 마츠다.”

등 뒤에서 양호선생의 호의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긴, 하도 사고를 쳐댔으니 모르는 게 이상하겠지.

그렇게 양호실을 나온 나는 1학년 복도를 지나치다가, 게시판을 보고 우뚝 멈추었다. 동아리 홍보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벌써 제작한 건가?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이 보기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축구부, 야구부, 배구부, 농구부, 유도부, 복싱부, 궁도부 같은 체육계 동아리부터 시작해서, 경음악부, 취주악부, 미술부 같은 예술계 동아리의 포스터도 있다. 다양한 센스가 들어간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헌데 왜 벌써부터 붙인 거지? 1학년이 자신들이 다니게 될 교실을 보러 오면서 구경하라는 뜻인가? 검도부는... 아직 없는 것 같다.

게시판을 쓰윽 둘러보곤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한쪽 구석에 분홍분홍한 무언가가 타 포스터에 가려진 채 붙어있자 멈칫했다. 색감이 왠지 복숭아 같다고 생각해서 그 위에 붙은 포스터를 슬쩍 들추어보니,

‘허...’

[검도부를 구경하러 오시면 맛있는 복숭아를 제공해드려요!] 라는 짤막한 문구와 함께, 여러 복숭아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검도부의 홍보 포스터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치나미가 제작했다고 알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가려져 있어서 못 봤던 거였구나. 근데 검도부에 오면 복숭아를 제공한다는 건 대체 뭐지? 관련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싶다.

포스터 중앙엔 렌카가 호면을 쓰고 시합에 참가한 모습이 보였고, 하단에 지금까지 참가했던 대회와 입상목록이 주르륵 나열되어있기도 했다.

검도라는 무도에 대해 간략하게, 그리고 흥미를 끌게끔 설명이 덧붙여있기도 해서, 상당히 튀긴 하지만 홍보라는 목적에서는 벗어나지 않은 포스터라 할 수 있었다. 치나미가 나름 머리를 싸맸네. 기특하다.

그런데 타 동아리 놈들이 치나미가 정성들여 만든 홍보물을 가렸다. 그게 정말, 정말정말정말 괘씸하다. 치나미가 이걸 봤다면 상처를 받겠지.

입술을 삐죽 내민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후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치나미의 포스터를 가렸던 유도부와 농구부의 포스터를 걷어내고 주머니에 꾸깃꾸깃 집어넣었다.

홍보 같은 건 안 해도 인기 많은 동아리이면서, 치나미의 개성 있는 포스터를 견제하기 위해 매너 없는 짓을 하는 것들... 복수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다.

앞으로 매일매일 와서 유도부와 농구부의 포스터만 지워버려야겠다. 이 외에도 다른 동아리가 검도부 포스터를 가리면, 그 동아리 포스터도 복수 대상에 추가해야지. 이제야 잘 보이는 치나미의 포스터를 쳐다보며 씨익 웃은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

“다들 주목해줄래?”

점심시간. 교탁 앞에 선 미유키가 왁자지껄 떠드는 학생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자, 교실 안이 금세 조용해졌다.

“고마워. 1학년 복도 게시판에 붙어있는 동아리 홍보 포스터를 훼손하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왔어. 우리 반엔 그런 사람이 전혀 없을 거라고 믿지만, 전달사항이니까 얘기하는 거야.”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뗀 지 3시간밖에 안 됐는데 그 사이에 신고를 받고 공문을 내린다고? 학생회의 일처리가 참 빠릿빠릿하다.

전달사항을 말해주고 자리로 돌아온 미유키가 내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리고는 조용히 날 불렀다.

“마츠다 군.”

“엉?”

“알아들었어?”

“뭘.”

“포스터 훼손하지 말라는 거.”

“왜 나만 콕 집어서 말하냐? 사고 쳤을까봐?”

미유키의 눈에 호선이 그러졌다. 아무래도 교탁에서 얘기할 때, 내 몸이 움찔한 걸 보았나보다. 지금 내가 짓고 있는 평온한 표정 안에 숨긴 일말의 찔끔함 또한 읽어낸 것 같다.

스윽.

어쩔까 고민하던 나는 미유키가 구겨진 포스터 두 장을 내밀자 입맛을 다셨다.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미유키가 우연히 발견했나보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순순히 실토했다.

“검도부 포스터가 저 포스터로 가려졌길래.”

“그렇다고 다른 포스터를 걷어버리면 어떡해. 나나 다른 학생회한테 말하면 되지. 그럼 포스터를 훼손하지 말라는 공문이 아니라, 가리지 말라는 공문을 대신 썼을 텐데...”

미유키의 목소리가 서서히 엄해져왔다. 신사답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은 내게 화가 난 건가본데... 당연하긴 하다.

“미안. 나나세 선배가 시간을 쪼개가면서 열심히 만든 게 가려져서 화났어.”

고개를 살며시 내리깐 내가 사과를 하자, 미유키가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해해. 근데 앞으로는 조금만 더 순하게 생각해볼까? 그럴 수 있지?”

“어.”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봐줄게. 타 동아리의 포스터를 가리는 건 분명한 잘못이기도 하니까, 오늘 중으로 각 동아리한테 전달할 거야. 그러니까 또 떼면 안 돼.”

“가리지 말라고 했는데 가리면?”

“그럼 오늘처럼 막 구기지 말고, 조심히 떼서 옆에 붙여놔. 그 뒤에 나한테 말해. 알았지?”

마구마구 찢어버리려고 했는데, 미유키가 미연에 방지해버리는구나. 하긴, 딱 미유키가 싫어할만한 철없는 행동이긴 했다. 예전이었다면 화를 낼 정도로.

그럼에도 경고 같지도 않은 구두경고만 주고 넘어가주는 건, 유도부와 농구부에 포스터 여분이 있어서인 이유도 있을 테지만... 그것보단 날 정말 많이 좋아해서라는 이유가 더 크겠지.

“알았다.”

“응.”

내 대답에 만족한 미유키가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동계 제복 바지를 살살 쓸어 올리는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거기서부터 솔솔 올라오는 간질간질한 감각을 느끼며 하체를 늘어뜨린 나는, 미유키의 나긋나긋한 훈계를 더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

“후배님! 어떤가요!?”

내 눈앞에 자신이 만든 포스터를 보여주는 치나미. 짜잔! 하며 양손을 내미는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 포스터는 이미 봤지만, 여기서는 모른 척해야겠다.

“오늘 나온 건가요?”

“네!”

“몇 장이에요?”

“일단 5장 정도만 만들어봤어요. 1학년 복도 게시판에도 붙여놓았답니다.”

“엄청 적게 만들었네요?”

“지금은 그냥 견본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공식 포스터는 후배님과 함께 제작하고 싶어서요.”

“포스터 제작을 저희 둘만 해도 돼요?”

“감독님께서 포스터는 매니저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물론 다른 분들의 의견도 물어보겠지만, 지금은 저희 둘이서 고민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런가요? 그럼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평가를 부탁드리고 싶군요.”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치나미가 내민 포스터 한 장을 받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앞서 보았을 때도 생각했었지만, 이 정도면 객관적으로 봐도 충분히 잘 만들었다.

“특이하긴 하지만 홍보라는 취지에선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잘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여한이 없네요. 고맙습니다, 후배님.”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구경하러 오면 복숭아를 제공해준다는 대목 있잖아요? 복숭아는 일일이 제공하려고요?”

“물론이지요. 약속을 어길 수는 없잖아요. 오늘 냉동해놓은 복숭아를 갖고 와서 휴게실 냉장고에 넣어놓았어요.”

“.... 그래요?”

“네. 빼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뇨. 특색이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렇지요?”

“예.”

“후후... 그 말씀을 들으니 의욕이 더욱 솟아나는 것 같군요. 이럴 게 아니라 어디 조용한 곳에서 함께 아이디어를 고민해볼까요?”

내 손목을 잡아끌고 다소 넓은 건조실 안으로 들어간 그녀. 미리 널어둔 담요를 바닥에 깐 그녀가 냅다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맞은편을 팡팡 쳤다.

“자, 이리 앉아보세요. 함께 머리를 맞대보아요.”

열정적인 치나미의 모습에 피식한 나는,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치나미가 자신과 내 사이에 포스터를 옆으로 내려놓더니,

콩.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가져다대었다. 그리고는 내가 놀랄 틈도 없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팔짱까지 끼며 고민에 빠진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어떤 아이디어가 있을까요?”

머리를 맞댄다는 관용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웃기기도 하고, 깜찍하기도 하다. 엉뚱한 그녀의 행동에 속으로 대소를 터뜨린 내가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이런 쪽은 아예 몰라서... 지금 포스터도 좋은 것 같은데요.”

“흐으음... 신입생 분들이 입학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도 하니, 천천히 생각을 해봐도 좋아요.”

“그렇게 하죠.”

냅다 수긍한 나는 치나미의 골반을 잡고 앞으로 당겼다.

“엇...!?”

그러자 바닥에 평평하게 깔려있던 담요 중앙부분이 접혀지면서, 치나미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콧속으로 확 꽂히는 달콤한 복숭아 향을 맡으며 그녀의 말랑하고 잘록한 허리를 잡은 내가 말했다.

“포스터는 천천히 생각해도 되니까, 지금은 이렇게 있을까요?”

“그, 그래도 오늘 아이디어 하나 정도는... 앗...! 앗! 간지러워요...”

손끝에 힘을 줄 때마다 움찔움찔 떠는 치나미의 몸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벌써 눈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후끈한 콧바람을 내뱉는 그녀의 허리를 마사지하듯 꾸욱 꾹 누른 나는,

“후아...”

나른한 숨을 토해내는 그녀의 갈비뼈와 겨드랑이에 손을 가져갔다.

“므앗...!?”

그와 동시에 크게 펄떡이는 치나미의 몸. 그 틈을 탄 나는 양팔에 힘을 잔뜩 주면서, 그녀를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낫...! 후, 후배님...!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불안한 기색이 담긴 눈으로 건조실 문을 곁눈질하는 치나미의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내 몸을 그네 타듯 앞뒤로 느릿하게 흔들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문 잠가놔서 괜찮아요.”

“네엣...? 언제...”

“들어오면서 잠갔어요.”

“아하... 그렇군요...”

“납득했어요?”

“네에... 앗... 엉덩이...”

“왜요? 싫어요?”

“아, 아니요... 마침 그곳이 당기던 참이라서... 마사지... 를 해달라고 부탁드리려 했어요...”

치나미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지금처럼 야릇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납득을 빨리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데?”

“후배님의 아래가... 딱딱해지는 것 같은데요...”

자신만의 순진한 말투로 야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 건 덤. 간접적으로 피가 몰리고 있는 사타구니를 언급하는 그녀에게 나긋한 미소를 지어보인 내가 말했다.

“근육에 문제가 생겨서 그래요.”

“저, 저런... 큰일이군요...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까요...?”

“자연스럽게 나아집니다.”

“아하... 아앗...? 안쪽으로 손을 넣으시면 곤란한데요...”

“조금만 넣을게요.”

“그, 그러시다면... 알겠어요...”

내 목에 팔을 두른 치나미의 가랑이가 복부에 딱 달라붙었다. 제대로 흥분을 하고 있다는 증거. 실시간으로 뜨거워지는 그녀의 체온을 느낀 나는, 지금 여기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가늠을 해보며 치나미를 애무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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