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8 - 위대한 검도부로 오라
무탈한 하루가 여러 번 지나가고, 주말을 앞둔 금요일. 볼일이 있다며 등교하자마자 학생회실로 가는 미유키와 찢어지고 운동장을 거닐던 나는,
“어!? 마츠다 선배!”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교문 밖에서부터, 히요리가 손을 마구 흔들어대며 들어오고 있었다. 같이 다니게 될 친구와 함께 말이다.
그나저나 마츠다라니. 성씨와 이름을 합쳐 부르지 않아서 서운하다. 히요리만의 특색 있는 호칭으로 불리려면 조금 더 친해져야하려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발랄한 히요리와는 달리 상체를 꾸벅 숙이는 공손한 인사를 하는 그녀의 친구. 예전에도 생각했듯, 예쁜 애 옆엔 예쁜 애가 같이 다니는구나 싶다. 가슴은 조금 작지만.
두 사람은 사복차림이었다. 제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모양. 치마 기장은 줄였을까? 히요리는 굉장히 외향적이지만 그렇다고 발라당 까진 사람은 아니니까, 아마 새로 샀을 거다.
어깨 위로 한손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준 나는, 그녀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양쪽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안녕?”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반말. 순간 실수를 한 게 아닐까 걱정스런 마음이 일었지만, 히요리나 그녀의 친구는 이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안녕하세용. 지금 수업 들어가는 길이에요?”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었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너흰 왜 왔어? 오늘 뭐 있대?”
“동아리 소개 한다길래 들러서 보려고 해요.”
동아리 소개라... 확실히 어제 렌카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었다. 오늘 오전에 비어있는 1학년 교실에서 소개를 해줄 예정인데 간단한 설명만 할 거라서, 빈말로 나는 빠져도 괜찮다고 했지.
“어디에 관심 있는데?”
“저희는 일단 대부분은 다 둘러볼 생각인데, 수영부랑 궁도부에 특히 더 관심이 있어요.”
“그래? 둘 다?”
“그렇기는 해요. 하지만 수영부는 여름에 정식 수업으로도 들을 수 있어서 고민 중이에요.”
기본적으로 발랄한 히요리인 만큼 체육계 동아리에 관심이 더 큰가보다. 만화부나 영화감상부, 이런 쪽도 잘 맞을 텐데. 아니면 바리스타부도 어울릴 것 같다.
“선배는 어느 동아리에요?”
이어지는 히요리의 물음에 이를 드러내며 웃은 내가 대답했다.
“난 검도부야.”
“아 진짜요? 미호도 검도부 얘길 잠깐 했었는데.”
미호는 지금 히요리의 옆에 있는 친구의 이름이었다. 성씨는 분명 미츠시마였다. 긴가 민가 했었는데 히요리가 직접 언급하니까 이제야 생각이 난다.
“관심 있으면 1-D반으로 가면 돼. 거기서 소개할 거야.”
“그래요? 알겠습니당.”
목소리가 원래부터 좋은데 저렇게 끝부분을 상큼하게 올리니까 더 좋게 느껴진다. 듣기만 해도 가버릴 것 같은 기분이야.
대화를 더 하고 싶지만 오늘은 이 정도만 하자. 관심이 아예 없는 것까진 아니지만, 지금은 그냥 아는 후배를 대하는 정도가 딱 적당하다. 또한 동아리 소개만 보고 가는 건 아닐 테니까, 점심시간에 한 번쯤은 더 만날 여지가 있겠지. 그리 생각한 내가 말했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잘 구경하다가 가라.”
“넹. 안녕히 가세요.”
담백한 작별인사와 함께 히요리와 헤어진 나는, 앞서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이제 오냐?”
“콜록.”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인기척에 놀란 건지, 아니면 대답을 한 건지. 여느 때처럼 기침을 뱉어낸 빵녀의 옆으로 다가간 내가 물었다.
“같이 매점 들렀다가 갈래?”
“켁...!”
“그래. 너 근데 햄버거 같은 것도 좋아하냐?”
“콜록! 콜록!”
기침의 강도를 크게 가져가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빵녀. 너무 격하게 싫다고 하니까 괜히 무안해진다. 햄버거 패티 위에 하얀 소스를 뿌려 넣고 먹게 하면 그것만큼 꼴리는 게 없는데, 아쉽다. 이건 렌카한테 시키도록 하자.
**
“마츠다 군.”
1교시가 끝나고 책상에 엎드려있던 나는, 미유키가 내 등을 마구 흔들자 좀비마냥 힘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왜.”
“나나세 선배가 찾으셔. 동아리 관련 얘기래.”
“엉?”
“저기.”
미유키가 가리킨 뒷문을 보니, 과연 치나미가 미닫이문 밖으로 자신의 분홍분홍한 머리카락과 자그마한 얼굴을 쏙 뺀 채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을 크게 뜨고는 날 빤히 바라보는 모습이 무척이나 웃기다.
안에서 보면 정말 귀여운데, 바깥에서 보면 무척 웃긴 포즈를 취하고 있겠지? 그 증거로 복도에 있는 학생들이 치나미를 보며 킥킥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이 비웃음이었다면 죄다 뺨따구를 갈겼을 텐데,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치나미의 귀여움에 취한 포근한 웃음이어서 봐준다.
뒷목을 벅벅 긁은 나는, 그런 행동은 하지 말라는 미유키의 훈계를 알겠다는 대답으로 넘기며 치나미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어제는 잘 잤어요?”
“네. 후배님도 강녕하신가요?”
“예... 뭐... 그렇죠. 근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뭐가요?”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거요.”
“아하.”
가벼운 감탄사를 터뜨린 치나미가 내 앞에 똑바로 서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동복을 입은 치나미도 예쁘지만, 여름에 반팔을 입은 그녀가 보고 싶다. 청량감이 가득 느껴졌었는데 문득 그리워진다.
“동아리 관련 얘기라고 하던데... 뭐죠?”
“아... 다름이 아니라, 2교시가 끝나고 잠깐 저와 렌카를 도와주실 수 있나 해서요.”
“동아리 소개 때문인가요?”
“넷. 후배님께서 계셔주시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부장은 저더러 빠지라고 하던데.”
“그것은 진심이 아닐 거예요. 렌카는 후배님과 함께 동아리를 소개하는 일을 저만큼 기대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후배님은 매니저시잖아요. 검도부의 건승을 위해 함께 힘을 써야지요.”
“듣고 보니 일 리 있는 말이네요. 2교시 후 1-D반으로 가면 될까요?”
“네.”
“도복 차림으로 가야 하나?”
“아니요.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와 렌카도 이대로 갈 거라서요. 참, 교무실에 가셔서 학생주임님께 동아리 홍보 차 3교시를 빼겠다고 하면 검도부로 전화를 하실 텐데, 감독님이 허락해주실 거예요. 결석 처리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알겠습니다.”
“좋아요. 복숭아 젤리 드실래요?”
마이 안주머니에서 귀여운 포장지를 꺼내는 치나미. 그것을 받아든 내가 방긋 웃었다.
“미유키랑 같이 먹어도 되죠?”
“앗, 하나자와 후배님께는 이미 드렸는데요.”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미유키가 책상 서랍에서 몰래 복숭아 젤리를 꺼내 빵녀와 부반장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왜 저렇게 조심조심 먹는 거지? 누가 빼앗아갈까봐 그런가? 그런 건 절대 아닐 텐데... 아마 치나미가 맛있는 것이니 몰래 먹으라고 해서 저러는 건가 싶다.
미유키도 은근히 엉뚱한 구석이 있다. 아니면 치나미의 엉뚱함이 옮았거나. 뭐가 됐든 두 사람이 더욱 친해진 것 같아 보기 좋다고 생각한 내가 치나미를 내려다보았다.
“잘 먹을게요.”
“그래요. 그러면 2교시 후에 뵈어요.”
“예, 들어가세요.”
어린이집 선생님마냥 깨발랄하게 양손을 흔든 치나미는, 떠나면서 마주치는 모든 후배들에게 인사를 해댔다.
예의가 참 바른 치나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복도를 지켜보던 나는, 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에 젤리를 올려놓았다. 그러자 미유키가 슬쩍 손을 뻗어 젤리를 가져가려고 했지만, 내 손에 제지당해 아쉬워했다.
먹어보니까 마음에 들었나? 이러다 미유키도 복숭아에 물들어버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예전에는 다른 과일로 타락시키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타락을 당해버리게 생긴 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
“넌 왜 오고 난리야?”
1학년 복도에서 날 마주치자마자, 렌카가 저런 소리를 해왔다.
“난 오면 안 돼요?”
“빠지라고 했잖아.”
“안 빠지기로 했어요.”
“.... 그러든가.”
좋으면서 왜 틱틱대는 건지... 혹시 예비 신입생들 앞에서 설명을 하는 사이 엉덩이를 때려달라고 저렇게 개기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용기에 큰 찬사를 보내주지.
“교무실에 말씀을 드리고 오셨나요?”
나와 렌카 사이에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치나미의 물음. 비소를 짓고 있다가 재빨리 표정을 푼 내가 대답했다.
“예. 3교시는 출석으로 처리해주겠다고 하네요.”
“다행이군요. 그럼 예비 신입생 후배님들을 맞이하러 가보도록 할까요?”
“그러죠. 근데 저희 셋만 가나요?”
“넷. 원래는 야마자키 선배님께서도 도와주시겠다고 했는데, 저희가 괜찮다고 했어요. 졸업반이라 바쁘신 분이라서요. 자, 이쪽이에요.”
복도 쪽에서부터 네 번째 교실 문을 여는 그녀. 본래라면 1-D반이라고 쓰여 있어야할 교실의 명패가 검도부로 바뀌어있는 게 보인다. 심지어는 명패 좌우에 복숭아 캐릭터도 그려져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해놓았을까? 나한텐 포스터와 관련된 걸 제외하면 이야기 자체를 안 하던데... 혹시라도 내가 귀찮아할까봐 우려한 건가?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해진다. 물론 렌카도 같이 만들었겠지만 다음엔 나도 치나미를 도와야겠다.
안으로 들어가서 서른 남짓한 책상 위에 포스터를 하나하나 올려놓은 우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복도를 쳐다보며 신입생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가 있는 교실의 앞, 그리고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신입생들이 들어가고 있는 모양인데... 왜 우리 쪽은 한 명도 없을까. 혹시 이쪽으로 오려는 신입생들을 타 동아리 놈들이 빼앗아가는 것인가? 그러한 생각을 하며 복도 밖으로 나가보려는 찰나,
“저... 안녕하세요? 검도부 동아리 설명회... 맞죠...?”
열린 뒷문으로 앳되어 보이는 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그에 반색한 치나미가 손수 그를 맞이했다.
“맞아요!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맨 앞줄에 앉도록 해요.”
“예? 아, 예...”
다소 특이한 치나미의 말투에 당황하는 남학생. 주뼛거리며 교탁 바로 앞의 자리에 앉은 그에게, 치나미가 집에서 가져온 복숭아를 일회용 그릇에 담아 플라스틱 포크와 함께 내어주었다.
“일단 이것부터 드셔보세요.”
“보, 복숭아네요...? 요새 겨울 복숭아가 나온다던데 그건가...?”
“아... 야마나시 현에서 나오는 동도(冬桃)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막 개발되고 있는 품종이라서 맛을 장담할 수 없어 따로 구하지는 않았답니다. 이건 제가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냉동해놓은 거예요.”
“그, 그런가요...?”
당황한 남학생이 책상 위에 놓인 홍보 포스터와 그릇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기가 검도부인지, 복숭아 연구부인지 헷갈리지? 그 마음 이해한다.
“10분만 기다렸다가 시작할 테니 시원한 복숭아를 드시면서 저와 담소를 나눌까요?”
“아, 예... 알겠습니다.”
“우리 신입생 후배님께서는 왜 검도부에 관심을 두셨나요?”
“그게...”
치나미와 렌카가 예비 신입생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학생들이 드문드문 들어오기 시작했다. 3분여가 지났을 땐 두 명이 추가로 더 들어왔고, 5분이 지났을 땐 여섯이, 그리고 설명을 앞둔 2분 전엔 일곱 명이 들어왔다.
솔직히 타 동아리보다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많이 올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는데, 내 기우였다. 렌카가 검도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해서 완전히 착각했다.
그새 추가로 두 명이 들어온 교실에서, 여자의 비율은 7 정도. 그녀들은 친절하게 복숭아를 내어주는 렌카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치나미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둘이었는데, 모두 체구가 작은 여자들이었다. 렌카만큼은 아니더라도 치나미 또한 유명하긴 한가보다.
날 보고 온 신입생들은 없나? 이래봬도 신문에 났던 몸인데... 서운해진다. 그래도 내 얼굴에 관심을 가진 여자들이 몇몇 보이기는 한다. 땀내 나는 남정네들보단 여자의 관심을 받는 게 더 좋긴 하지.
그런 정신승리로 마음을 다스린 나는, 복숭아를 담으며 뒷문을 흘끗거렸다. 히요리는 지금 수영부 설명회에 갔겠지? 동아리 홍보는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짧게 여러 번으로 나뉘어져있으니까, 2회차 설명회 때 이쪽으로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