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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99화 (298/313)

Chapter 299 - 위대한 검도부로 오라 #2

“어서 오세요, 예비 신입생 여러분. 저는 검도부의 매니저인 나나세 치나미라고 해요. 복숭아는 맛있으신가요?”

““네에...””

음음... 치나미의 장래희망은 뭘까? 지금만 보면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생각된다. 군중들을 인솔하는 능력이 타고 난 것 같다.

“드시면서 저희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저희 예보니 아카데미 검도부는...”

치나미가 친절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이, 렌카가 자신의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는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나미의 설명이 끝나면 너도 한 마디 해.”

“내가 왜.”

“하라면 해.”

“할 말이 없는데?”

“그냥 좋은 말 생각해서 하면 되잖아. 그게 어려워? 징계 내리기 전에 해.”

“왜 까불어요? 혼날래?”

“.....”

찔끔한 렌카가 내게서 한 발자국 정도 떨어졌다. 대놓고 교육을 할 수 없는 장소에서 기어오르는 경향이 강해졌는데, 깜찍해서 좋다. 그렇다고 봐주지는 않겠지만.

“그럼 지금처럼 바보 같은 표정 말고 쪼개기만이라도 하고 있어.”

“쪼개라고요? 말 예쁘게 안 할래요?”

“.... 웃고 있어. 천박하게 웃지 말고 그냥 잔잔하게...”

“알았어요.”

렌카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설명을 끝마친 치나미가 뒤를 돌아보며 활짝 웃더니 렌카에게 교탁 앞에 서라며 손짓을 했다.

“자, 저희 검도부의 부장인 이노오 렌카 친우님. 이쪽으로 오셔서 한 말씀 해주세요.”

“알았어. 잠깐만...”

고개를 끄덕인 렌카가 교탁 가운데에 서서 몇 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매니저가 잘 설명을 해주어서 짧게만 하겠습니다. 저희 검도부는 부원 간의 우애가 아주 깊고, 딱딱한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통해....”

수평적인 관계 좋아하시네. 자기 자신이 가장 수직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면서.

어쨌거나 렌카가 말하게 하는 건, 검도에 진심인 여자들을 거의 확실하게 데려올 수 있는 좋은 전략이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부활동 자체를 검도부만 할 생각이었겠지만, 그래도 냉랭해 보이는 렌카의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덜어지면 좋지.

“특별한 교육이 없는 날은 선배 부원들과 감독의 관리 하에 매일 자율대련을 하고 있어요. 실력이 나날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신입생이든 아니든 충분한 면담을 통해 적합성을 판단하고, 명단에 넣습니다. 딱딱한 동아리가 절대 아니니 마음 편하게 들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렌카는 연설 같은 건 하면 안 되겠다. 딱딱한 동아리가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가 지금 제일 딱딱하게 말하고 있어서 듣는 사람들이 어색해하고 있잖아. 그래도 진심만큼은 잘 전달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렌카가 검도부에 대해 설명을 끝마치자, 치나미가 날 흘끗 쳐다보더니 흥미로운 눈을 하고 있는 신입생들에게 말했다.

“다음은 저희 부매니저 후배님의 차례인가요? 간단하게 한 마디 부탁드리고 싶군요.”

부매니저라는 직책이 있었나? 오늘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그냥 치나미의 말마따나 딱 한 마디만 하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그 말에 렌카의 얼굴이 일순 뚱해졌다. 자신의 요구에는 콧방귀를 낀 내가, 치나미의 요구엔 순순히 따르니 복장이 터지나보다. 그러게 평소에 잘 대해주든가. 렌카의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알게 모르게 씨익 웃은 나는, 교탁 앞에 서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해보았다.

“음...”

치나미와 렌카가 설명을 한 직후인 터라 할 말이 없다. 그냥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고 끝내야 하나? 뭔가 임팩트가 없어 보이는데...

상큼발랄한 매니저, 뻣뻣하지만 마음씨 좋은 부장이 있다면 듬직한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컨셉을 잡으면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렌카가 빨리 하라는 듯 등허리를 살짝 꼬집자 움찔했다.

“검도부에 와서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나 치고는 아주 얌전한 대사를 했다. 이 정도면 뭐... 무난하겠지.

“그렇군요. 저희 부매니저 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랑으로 맞이해주실 생각이시군요. 각오의 한 말씀, 잘 들었어요.”

내 말을 멋대로 변형한 치나미가 1차 설명회를 마무리했다. 예비 신입생들에게 일일이 조심히 들어가시라며 인사를 한 그녀는, 나, 그리고 렌카와 함께 책상 위에 놓인 빈 그릇을 정리했다.

그렇게 2차 설명회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잠깐 밖으로 나와 뻐근한 몸을 풀었다. 그때,

“어? 마츠다 선배!”

때마침 설명회가 끝난 교실에서 나온 히요리가 날 발견하고는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손에 물이 그려진 팜플렛을 들고 있는데, 수영부 설명회에 들렀었나보다.

그나저나 예전에도 느꼈지만 우리 히요리는 목청이 참 크구나. 주변 눈치를 보지 않는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구석구석 다 예쁠 수가 있지? 보면 볼수록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미호와 함께 내게 다가온 그녀가 물었다.

“여기서 뭐하세용?”

“검도부 설명회 하느라고.”

“응? 선배도 설명회에 참석해요?”

“맞아. 매니... 아니, 부매니저라서.”

“아 진짜요? 매니저였어요?”

“매니저가 아니라, 부매니저.”

“그거 그거죠 뭐. 저 지금 검도부 설명회에 가려던 참인데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지. 가서 복숭아 먹어.”

“복숭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히요리, 그리고 미호. 뜬금없이 복숭아를 언급하니 의아했나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2차 설명회 준비를 끝낸 치나미가 나와 날 부르려고 했다.

“후배님! 이제 들어오셔서... 으응?”

그러다가 내 앞에 있는 히요리와 미호를 보고는 후다닥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검도부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순식간에 접근하여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는 치나미가 다소 부담스러웠을까? 흠칫한 미호가 소심한 투로 대답했다.

“네? 네...”

“아주아주 잘 찾아오셨어요. 저는 검도부의 매니저, 나나세 치나미라고 해요. 일단 들어오셔서 복숭아라도 한 입 하는 게 어떠실까요?”

또 다시 복숭아가 튀어나오자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 두 사람은, 치나미가 이리로 오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날 올려다보았다.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듯한 얼굴. 마치 사이비의 전도에 당해 미심쩍어하는 사람들 같다.

“들어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 설명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조금 남았거든.”

그러자 고개를 주억거린 두 사람이 치나미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말하니까 안심한 것처럼 보였는데 착각이겠지?

어쨌든 히요리는 검도부에 들어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부실의 분위기가 편안하다고는 하지만, 무도라는 특성상 어느 정도의 엄숙함은 기본 전제로 깔려있었으니까. 자유분방한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타 동아리의 설명회가 끝나면서 나온 예비 신입생들로 인해 왁자지껄해진 복도. 얌전히 뒷문에 서서 검도부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던 나는, 흰 도복과 검은 띠를 착용한 덩치 큰 남자가 오는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유도 도복을 입고 있는 놈인데... 치나미의 포스터를 가린 놈인가? 설명회에 참석한 놈이니만큼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저 빡빡머리를 찰싹 때려주고 싶지만 참자.

유도부원을 무시하며 몸을 풀고 있던 나는, 놈이 지나치면서 명백한 시비조로 말을 걸자 눈썹을 꿈틀했다.

“1-D반이 검도부였던가? 너 이름이 뭐냐?”

다짜고짜 공격적으로 나오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저놈을 포스터를 가린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저놈도 내가 자신들의 포스터를 제거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저놈이 저렇게 나오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나였다. 아니지. 이건 너무 양보한 거 아닌가? 애초에 유도부와 농구부가 검도부의 포스터를 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잖아.

나는 저런 태도를 보이는 놈에게 좋게좋게 숙이고 들어갈 만큼 선한 사람은 아니었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명찰이 채워진 위치를 눈동자로 가리킨 내가 말했다.

“명찰 안 보여?”

얼핏 거만해보이기까지 한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놈의 시선이 명찰로 향했다.

“마츠다 켄... 혹시 너 걔냐? 그 야쿠자 놀이하는 서클에서 사고 친 놈?”

아직까지 그 유치한 슈프리 서클의 꼬리표가 따라다니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만 내 의지로 그 서클에 들어간 게 아닌데, 조금 서럽다. 그래도 오랜만에 내 기억의 편린이 되새겨져서 감회가 새롭긴 하다.

과거를 들이밀어 할 말이 없어진 내가 침묵하고 있자, 놈이 코웃음을 치더니 물었다.

“네가 우리 동아리 포스터를 버린 놈이지?”

역시 알고 있었구나.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업어치기라도 당할 것 같다. 제발 저놈이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길 바라며, 내가 대답했다.

“아닌데.”

“아니긴 무슨... 검도부도 맛탱이가 갔구만. 저런 놈을 받아주고.”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대로의 말을 하는 유도부원. 설마 했는데 저런 한물 간 도발을 진짜로 할 줄이야... 웃기지도 않는다.

주인공이 소속된 곳이 아닌 체육계 동아리의 성질 더러운 다혈질 엑스트라는 안 나오면 섭한 뻔한 클리셰 캐릭터긴 한데... 도키아카는 럽코물이잖은가. 혹시 내가 검도대회에 참가한 이후, 스포츠가 주고 러브 코미디가 부인 스포츠물로 장르가 바뀌어버렸나?

그러고 보면 테츠야도 지금처럼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있긴 하다. 그 이벤트로 미루어볼 때, 역시 도키아카는 똥겜이다.

소년만화에도 안 집어넣을 한물 간 이벤트가 일어나는 게임이 똥겜이 아니라면, 어떤 게임을 똥겜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플레이한 내가 똥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지? 만약 힘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히요리의 호감도가 깎이는 걸 걱정해야할 판인데다, 신입생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며 징계까지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저 말까지 들어놓고 그냥 넘어가자니 그것도 좀 그렇다.

툭. 툭.

아주 큰 딜레마에 빠져 혼자만의 상념에 들어가 있던 나는, 뺨에서 느껴지는 다소 묵직한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유도부원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내 뺨을 딱 기분이 나쁠 정도의 힘으로 갈기고 있다.

엑스트라다운 행동을 하는 그. 정석적으로 가면 여기서 내가 반격을 해야 마땅한데... 이목이라도 쏠렸으면 모르겠으나, 유도부원이 자신의 덩치로 사람이 많은 부분을 가리고 있었기에 다들 관심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만약 이게 신이 안배한 이벤트라면, 우리 올드한 신은 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닛!? 지금 무엇을 하시는 건가요!!”

얌전히 당해주기만 하고 있던 나는, 이쪽 상황을 발견한 듯한 치나미의 진노한 목소리를 듣고 눈을 반짝였다. 아, 이건 치나미와 렌카가 어른스러워진 나를 칭찬하게 되는 클리셰적인 이벤트구나.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조금 뻔하긴 하지만, 곧 입학할 히요리도 이 장면을 보고 저 선배는 참을성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며 내면에 있는 내 점수를 올릴 가능성도 있을 테니까 나쁜 건 아니다. 나한테 무조건 이득이 되는 이벤트니까 가만히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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