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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300화 (299/313)

Chapter 300 - 긍정적인 업보

“왜 저희 부매니저 님을 핍박하시는 건가요! 앗! 그대의 얼굴... 알겠군요! 이번에 3학년으로 올라가는 다른 반 동기지요? 유도부 도복을 입고 계시는군요! 방금 그대가 한 행동, 유도부와 학생회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치나미의 엄한 말투를 듣던 나는 새어나오려는 폭소를 간신히 참아내었다. 다른 게 아니라, 그녀가 유도부원을 부르는 호칭 때문이었다.

면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친우님’, 없으면 ‘학우님’이라고 상대에게 예를 갖추던 치나미가 저놈에겐 ‘그대’란다. 치나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웃겼다.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호칭을 쓰니까.

철부지지만 마음은 따뜻한 어린 황녀가, 충성스런 가신을 궁중암투에서 보호하기 위해 손발을 걷고 나서는 것 같은... 지금 치나미의 모습은 약간 이런 느낌이었다.

“넌... 나나세잖아?”

바로 치나미를 알아보는구나. 그녀가 유명하긴 한가보다. 하긴, 말투와 행동이 굉장히 특이한데 소문이 나지 않으면 이상하겠지.

치나미의 신랄한 비판에 잠시 당황해하던 유도부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도부 설명회가 있는 1-D반의 학생들이 창문까지 연 채로 벽에 다닥다닥 붙어 이쪽을 구경하고 있고, 복도에서도 시선이 집중된 상태.

그 광그가 발을 빼려는 기색을 보이려고 했다. 그때, D반에서 렌카가 나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놈이 치나미에게 언성을 높였다.

“우리 포스터를 버린 것부터가 잘못이라고는 생각 안 하냐?”

잘못이 우리 쪽에 먼저 있다고 가스라이팅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치나미는, 근육만 들어찬 유도부원의 술수에 당연히 넘어가지 않았다.

“포스터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너희 검도부가 우리 유도부의 포스터를 갖다 버린 것부터 사과하라고.”

“네에?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건가요!”

나이긴 한데... 포스터 사건은 입 닥치고 있어야겠다. 치나미의 귀에 내가 했던 짓이 들어가면 화낼 것 같아.

“저희 부원들이 그러한 일을 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지만, 아주아주아주 만약에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지요! 그렇다면 그에 대한 증거를 가져왔나요!?”

이어지는 치나미의 말에 말문이 턱 막힌 유도부원의 입이 다물렸다. 그러자 치나미가 더더욱 화난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증거도 없이 저희 부매니저의 소중한 뺨에 폭력을 행사하신 건가요! 그대는 아주 못된 사람이로군요!”

“.....”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 되리라고 생각했을까? 놈이 일단은 물러나기로 마음먹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우리만 들으라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상상이상으로 더 또라이였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벤트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도복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유도부원이 내가 이렇게 나올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덩치에 걸맞지 않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날 마주보더니 제복 마이의 옷깃을 붙잡고 힘을 실었다.

순식간에 옆으로 쏠리는 중심. 메치기 기술 중 하나인 빗당겨치기를 시도하고 있다.

바지 안에 넣어놓은 와이셔츠가 확 뽑히면서 순간 몸이 붕 뜨려고 했으나, 침착하게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며 역방향으로 무게중심을 바로잡으니 다행히도 버틸 수 있었다.

“어?”

설마 넘어가지 않을 줄은 몰랐던 듯 눈이 커지는 유도부원. 그의 놀란 탄성이 당혹스럽게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어어...?”

셔츠를 잡고 있는 유도부원의 팔 소매와 가슴 깃을 움켜쥐어 비튼 내가, 깃을 잡은 손을 떼어내 놈의 겨드랑이에 확 걸고 들어 올리며 중심을 흩트려놓았기 때문. 기술을 쓰기 전의 기초 동작인 기울이기였다.

내 자세가 한팔업어치기로 이어지는 동작임을 눈치챈 유도부원이 되치기를 시도하려 했지만, 내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업어치기를 하는 척 상대방의 가슴팍으로 들어간 나는 몸을 돌리려다가,

“흡!”

반격을 하려는 상대방의 스탠스를 이용하여 균형을 무너뜨렸고, 곧장 자세를 완전히 낮추고 한쪽 다리를 상대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밀어 넣었다.

턱.

“억?”

뒤이어 기울이기와 동시에 다리를 접어 종아리를 걸자, 엑스트라 특유의 천박한 비명을 토해내는 유도부원. 놈의 큰 몸집이 바닥에 쳐박히는 건 한순간이었다.

쿵-!

그대로 등부터 떨어진 유도부원의 몸. 다른 메치기보다 호쾌하진 않았지만, 훌륭하게 들어간 안뒤축감아치기였다. 나보다 더 큰 덩치를 가진 놈이 목석마냥 벌러덩 넘어져버릴 정도로.

진짜 대련이었으면 한판 감이었다. 물론 내가 유도를 배웠던 적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저놈이 지금처럼 방심하지 않은 상태였더라면 통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여기서 굳히기까지 들어갈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심판도 없는 상황이라 놈이 정신을 차리면 역으로 뒤를 잡혀 조르기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엉망진창이 된 제복 와이셔츠를 대충 정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도부원을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

놈의 팍 찌푸려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다. 검도부 부매니저가 유도 기술로 자신을 자빠뜨린 것이 창피한 모양이었다.

내가 왜 곧장 죽통을 갈기지 않고 유도 기술로 상대를 제압했을까 싶었는데, 자존심이 팍 상한 듯한 저놈의 덜떨어진 면상을 보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내 입장에서 그림은 아주 좋았다. 뒷감당은 해야겠지만.

아쉬운 점은 딱 하나. 안뒤축감아치기가 다른 메치기에 비해 몸이 떨어지는 거리가 상대적으로 적어 크게 아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치나미에게 나쁜 말을 사용한 저놈을 어디 한 군데 부러뜨릴 목적으로 역동적인 되치기를 넣었어야하는 건데...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기술이 저거라서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대가리부터 찧어버리든가... 낙법 하나는 잘 쓰는 놈이라서 아쉽다.

그나저나 괜히 주판을 두드리다가 치나미만 욕을 먹었잖아. 앞으로 이런 놈들이 튀어나오면 이해득실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반으로 갈라서 죽여야겠다. 이렇게 해야 맞다. 나는 머리를 굴리면 안 돼. 일단 일을 벌여놓고, 뒷수습만 어떻게든 잘해보는 걸로 가닥을 잡자.

네 가족은 내가 다 빼앗을 거다. 부디 아름다운 어머니와 여동생, 혹은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두 명 있으면 더 좋고.

“둘 다 그만해! 뭐하는 짓이야 지금!”

한 호흡에, 눈 깜짝할 사이 이루어진 버티기부터 반격을 보며 벙 쪄있던 렌카가 나와 유도부원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짧은 시간동안 재빨리 머리를 굴린 나는 그냥 침묵했다.

유도부원이 욕을 한 건 치나미나 렌카,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있던 예비 신입생들이 들었다. 내 행동에 대한 명분은 신입생들이 만들어줄 거다. 애초에 치나미를 욕한 저놈 앞에서 핑계거리를 댈 생각도 없었다.

헌데 히요리가 가장 걱정스럽다. 그녀의 입장에선 내가 다짜고짜 폭력을 휘두른 것처럼 보이겠지? 이건 다른 날에 어떻게든 만회해야겠다.

그러한 생각으로 슬쩍 눈을 굴려 D반의 투명한 창문을 쳐다본 나는,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히요리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싸움 구경 같은 걸 좋아하나? 아니면 자신처럼 반골기질을 풀풀 풍기는 내게 흥미를 느낀 건가? 둘 다 아닐 텐데... 어쩌면 히요리는 유도부원이 중얼거린 욕을 들었을 수도 있겠다.

드르륵-!

유도부 설명회가 열리는 교실에서, 도복을 입은 유도부원들이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덩치가 커서 긴장이 되긴 하지만,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설명회에 온 사람들이라면 저놈처럼 다혈질이진 않을 테니까.

나와 싸운 놈이 유별난 엑스트라인 것일 뿐이다. 저들은 분명 자초지종을 잘 들어보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겠지.

저놈을 제지하긴 했지만 공격은 먼저 당했고, 욕 또한 저놈이 먼저 했다. 내가 꿀릴 일은 없었다.

순수하게 입을 떡 벌린 치나미의 손목을 잡고 등 뒤로 오게 한 나는, 떳떳하게 선 채로 유도부원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이노오?”

가장 선두에 선, 부장이 확실해 보이는 떡대가 렌카를 알아보았다. 직책이 같은 만큼 면식이 있는 모양. 그의 물음에 한숨을 푹 내쉰 렌카가 대답했다.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났어요. 자세한 건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네요.”

최대한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지만, 렌카의 말투는 꽤나 거칠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싸움의 원인이 누구한테 있는지.

“그래? 두 사람은 떨어뜨려놓는 게 좋겠군.”

유도부장의 인상은 사나웠지만,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저런 사람들은 대부분 공정하다. 무조건적으로 식구를 감싸지만은 않는다는 뜻이다.

눈살이 찌푸려질만한 캐릭터가 있으면 도덕적인 캐릭터도 있어야 밸런스가 맞지. 원래 클리셰라는 게 다 그런 법이다.

알겠다고 대답한 렌카가 주변의 예비 신입생들에게 정말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밖에 나가있어.”

솔직히 여기 있으면서 치나미의 상태를 살피고, 히요리를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가 아니다. 그냥 렌카의 말대로 하자. 대신, 위험인물인 저놈이 먼저 떠나는 걸 봐야겠다.

“저 사람이 나가는 거 보고 갈게요. 스승님이 걱정스러워서요.”

“저는 괜찮아요. 유도부 부장님께서는 저 자처럼 안하무인인 사람이 아니랍니다. 저분이 계시니 무슨 일이 또 생기지는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시고 매점에서 복숭아 우유라도 마시도록 하세요. 여기...”

지금까지 자신의 큰 눈을 끔벅거리던 치나미가 위로와 더불어 소정의 동전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목소리가 굉장히 나긋한데, 듣기만 해도 힐링된다. 그나저나 ‘저 자’라니... 곧 죽어도 친우님이나 학우님이라고 하기는 싫은가보다.

“마침 쟤도 나가네. 너는 반대쪽 복도로 가.”

뒤이은 렌카의 말에 나와 싸운 놈을 쳐다본 나는, 갈라진 신입생들 사이로 한 유도부원과 함께 나가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음음. 예전의 렌카였다면 날 혐오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타박했을 텐데... 지금은 치나미처럼 위로를 하고 있구나. 아주 기쁘다. 마음이 절로 부푸는 느낌이야.

나는 자리를 떠나기 전에, 높낮이가 일정한 톤으로 앞뒤, 그리고 D반의 신입생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불미스러운 일에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떳떳하다는 것과, 자신이 주변에 민폐를 끼쳤음을 잘 알고 있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정확히 그런 태도를 취한 나는, 묵묵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복도를 떠났다.

후배들 앞에서 싸움판을 벌였으니 학생회가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나? 주변에 증인들이 많은 터라 상황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긴 하겠지만... 해왔던 게 있어서인지 괜히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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