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1 - 긍정적인 업보 #2
“마츠다 선배!”
경사 진 돌덩이에 앉아 매점에서 산 복숭아 우유를 마시고 있던 나는, 반가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히요리와 미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2차 설명회가 끝나자마자 나온 건가? 시간상으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턴 나는 두 사람을 웃는 낯으로 맞이했다.
“설명회는 끝났어?”
“넹.”
“부장이랑 매니저는?”
“지금 3차 설명회 준비를 하고 계세요. 유도부와 관련된 일은 설명회 후에 얘기하려나 봐요.”
목소리가 평소와 같다. 먼저 날 부르며 다가온 것을 생각해보면 아까 일을 크게 담아두지도 않은 것 같다.
점수가 높아진 건 아니다. 히요리는 이런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사람이 아니니까. 나와의 관계가 거의 없다시피 한 지금은 철저히 중립적인 눈으로 잘잘못을 따지겠지. 따진 결과가 지금 이 평범한 태도일 테고.
다만 하나 좋은 건 이번 사건의 명분이 내 쪽에 있고, 내가 불의를 보면 나선다는 걸 히요리가 알았다는 점. 양아치 같은 성격이 아닌, 좋은 방향의 성격을 그녀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내막을 자세히 보면 여러 일들이 맞물려있었지만 말이다.
“어땠어?”
“매니저 님이 엄청 친절하시고 재미있으셔서 잘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미호?”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움찔한 미호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니... 네. 복숭아 맛있었어요.”
겁을 조금 집어먹긴 했지만, 날 바라보는 눈빛이 호의적이다. 얘는 약간 빵녀 과인가? 의외로 대화가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둘의 시선에 무안한 듯 뒷머리를 벅벅 긁은 내가 물었다.
“궁도부 설명회는 안 가? 관심 있다고 하지 않았나?”
“조금 쉬다가 가보려고 해요.”
“그래?”
“넹. 근데 그거 복숭아 우유죠? 맛있던데...”
히요리가 내 손에 들려있는 복숭아 우유를 알아보았다. 먹어봤나본데... 온 세상이 복숭아로 가득 차있구나. 치나미가 좋아하겠다.
“먹을래? 새 거 사줄게.”
“아니에요. 근데 괜찮아요?”
앞선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 친하지 않은 사이라면 이런 민감한 사건 이야기는 말하기가 꺼려지지 않나? 악의 같은 건 하나도 없는 맑은 눈동자로 궁금증을 해결하려드는데, 히요리답다.
“괜찮아. 너희들은?”
“저희야 구경만 했는데 당연히 괜찮죠. 근데 선배.”
“왜.”
“제복 찢어졌어용.”
“가슴팍에 이거? 나중에 수선하면 돼.”
“아뇨. 거기 말구 바지요.”
“응...?”
흠칫한 내가 아래를 바라보자, 과연 바지의 가랑이 부분이 터져 있었다. 이걸 왜 몰랐지? 두꺼운 팬티를 입고 있어서 그런가?
언제 찢어진 거지? 설마 내가 그놈이랑 싸우면서 이렇게 된 건 아니겠지? 아니다. 그랬으면 밖으로 나왔을 때 찬바람이 들어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을 거다.
혹시 가뜩이나 무리가 가있었는데 방금 돌덩이에 앉아서 찢어진 건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더 이상의 창피는 받고 싶지 않아.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서있으면 찢어진 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히요리도 살짝 삐져나온 실밥만 보고 말해준 게 분명하다. 빨간색 팬티... 들킬 뻔했다.
근데 우리 히요리는 굉장히 과감하구나. 보통 이런 걸 보면 모른 척하던데, 알려줄 줄은 몰랐다. 나 외에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지는 마렴.
“고, 고맙다.”
당황한 내가 감사를 전하자, 순수한 미소를 지어보인 히요리가 말했다.
“뭘요. 근데 그 상태로 수업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여벌 있으니까 갈아입어야지...?”
“그렇죠?”
“그렇지...”
왜 저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는 거야? 사람 무안하게... 히요리와의 이벤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통통 튈 것 같은 느낌이다.
“저흰 둘러볼 데가 더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그래, 잘 가.”
“넹. 혹시 선배는 매점 이용을 자주 하세요?”
“그러는 편이지.”
“빵도 좋아해요? 뭐가 맛있어요? 하나 추천해주실 수 있어요? 사먹으려구용.”
이만 간다고 하지 않았니? 왜 자꾸 터진 바지 쪽을 흘끔거리면서 말을 거는 거야. 자지 방향이 잘못 설정되어있는 것도 아닌데... 놀리는 건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꼴릴 것 같으니까 그만 봐라.
**
렌카의 메시지를 받고 1학년 복도로 간 나는, D반 입구에 서있는 치나미의 표정이 울상이자 식겁을 하며 달려갔다. 설명회가 끝난 한산한 복도를 가로질러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간 내가 물었다.
“왜 울먹거리고 있어요?”
혹시 그 유도부원이 보복을 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당장 놈에게 달려가서 죽음이라는 벌을 내려주도록 하리라.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치나미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예비 신입생 분들이 많이 오셔서... 복숭아를 다 못 나누어드리게 되었어요...”
“.... 그래요?”
“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갖고 올 걸 그랬어요...”
아니 뭔 복숭아가 다 떨어졌다고 저런 표정을 짓냐. 순간 놀랐잖아. 그래도 중요치 않은 일이라 안심된다. 치나미의 기준에선 심각한 사안이긴 하겠지만.
“후배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아까 몸을 쓰시면서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요?”
“예, 뭐... 저는 멀쩡합니다. 바지가 찢어지긴 했는데 갈아입었어요.”
“바지가 찢어졌다구요? 설마 그 자가...”
“아뇨. 그건 아니고... 매점 앞에 있는 큰 돌덩이에 앉다가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뭐가 되었든 그 자 때문이에요.”
모든 원인이 그놈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하늘을 뚫을 듯한 치나미의 분노! 하나도 무섭지 않고 귀엽기만 하다.
“부장은 어디 있죠?”
“유도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잘 풀릴 것 같아요. 두 사람 모두 이 일이 학생회까지 올라가는 걸 바라지 않아서요.”
“스승님께 욕을 한 그 놈... 아니, 그 자가 생각나 불편하네요.”
“그런 것보다는 후배님이 걱정이에요. 그런 파렴치한 자 때문에 후배님께서 징계를 받으시면 정말정말 슬플 것 같아요. 에휴...”
애늙은이 같은 숨을 토해내는 치나미.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무는 것으로 참아낸 내가 말했다.
“학생회까지만 이 얘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도 일이 잘 풀릴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으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복숭아 드실래요?”
“다 떨어졌다면서요.”
“후배님께 드릴 건 하나 남겨놓았어요.”
“그럼 같이 나눠먹을까요?”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음흉한 미소를 흘린 치나미가 D반으로 들어가더니, 복숭아 조각이 딱 하나 담겨있는 아주 자그마한 플라스틱 박스를 들고 왔다.
아포칼립스에서 간신히 식량을 구한 사람마냥 구석에 쪼그려 앉아선 남들 몰래 복숭아를 나누어먹은 우린, 때마침 렌카와 유도부장이 한 교실에서 나오자 무릎을 폈다.
“유도부 부장, 치바 타케시라고 한다.”
다짜고짜 날 보더니 자신을 소개하는 그. 치바라는 성씨는 빡세 보이는데, 타케시는 NTR을 잘 당할 것 같은 이름처럼 느껴진다.
“마츠다 켄입니다.”
“너희와 트러블이 있었던 부원은 일반 부원이었고, 실력이 좋고 싹싹하기에 중요한 포지션을 맡겼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앞으로 인성과 관련된 문제도 확실하게 검토하도록 하지.”
점잖은 사과는 물론 예방 대책까지 말하다니... 사람을 보는 눈이 별로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인물상이다. 근데 말투가 학생치고는 너무 중년인 같다. 슈프리 서클의 리더였던 사람도 저랬는데... 걔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난다.
“그 부원은 그대로 제명할 예정이다. 정말 미안하다.”
이어지는 치바 타케시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 내가 물었다.
“이번 사건은 어떻게 처리할 예정이죠?”
“이노오와 합의 하에 우리 선에서 딱 끝내는 것으로 했다만... 감독님들도 아시긴 아셔야하겠지.”
“그럼 더 바랄 건 없네요.”
“다행이로군. 그나저나 설명회에 왔던 예비 신입생 한 명에게 듣자하니 유도 기술을 썼다던데... 배웠었나?”
“옛날에요.”
“얼마나?”
“그냥저냥 오래 배웠어요.”
“취미로? 아니면 진지하게?”
눈빛이 호의적인 것 같은데 착각인가?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갑자기 저 사람이 유명한 농구만화의 빨간머리 주인공을 오랫동안 쫓아다니는 유도부 선배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건 왜요?”
“마침 비슷한 체급 인재 풀이 적어서 그러는데, 혹시...”
은근슬쩍 본색을 드러내는 치바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가만히 있던 렌카가 대화에 난입했다.
“지금 뭐하는 거죠? 왜 남의 동아리 부원을 빼가려고 해요?”
“빼가다니. 부활동을 꼭 하나만 하라는 법은 없잖아.”
“무슨... 물론 규칙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매일 부실에 와야 하는 체육계 동아리를 하나 더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알아. 농담으로 해본 말이다.”
“.... 진짜 농담 맞아요?”
“그래.”
“하나도 재미없는데요?”
“그건 좀 서운하군.”
측은한 표정을 보니 진짜로 상처받은 것 같다. 렌카야, 사과해라.
유도부는 곧 복도를 떠나 자신들의 동아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렌카와 치나미는, 이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으려는 듯했다. 인과가 확실한 만큼 정당방위로 치려는 모양이었다.
일은 잘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히요리는 아니더라도 렌카와 치나미에겐 점수를 딴 것 같기도 하고... 혹시 그놈은 날 돋보이게 해주기 위한 신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아아... 죄송합니다, 신님. 당신의 저의를 의심하고 말았네요. 그렇다고 제가 그 새끼의 가족을 노리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 집안의 호적에서 놈의 이름을 파버리도록 만들 거예요.
“이제 어떡하죠?”
계단이 있는 복도에 선 내 물음. 치나미의 어깨에 묻어있는 먼지를 톡톡 턴 렌카가 대답했다.
“나는 감독한테 가볼 생각이고, 치나미는 수업 들어간대. 넌 어쩔 거야?”
“할 것도 없는데 같이 갈까요?”
“할 게 없는 게 아니라, 땡땡이칠 생각이잖아.”
“그렇다고 치고요.”
“마음대로 해.”
좋으면서 튕기기는. 가면서 혼내줘야겠다.
“그럼... 저 먼저 올라가보도록 할게요.”
하복부에 양손을 고이 얹어놓고 배꼽인사를 하는 치나미. 그녀에게 씨익 웃어준 내가 말했다.
“그 자랑 마주치면 바로 연락해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자는 지금 유도부로 불려갔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나중에 마주친다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제게 또 시비를 걸 만큼 머리가 모자란 자는 아닐 거예요.”
순진무구하고 착한 치나미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랄하다. 그만큼 그놈이 싫다는 뜻이겠지.
“그러면 다행이고요.”
“넷...! 그럼 이따가 뵈어요.”
치나미는 3학년 복도로 올라가면서 몇 번이고 날 돌아보았다. 자신을 위해 나서준 내가 크게 믿음직스러웠나보다.
이렇게 보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고 느낀다. 주인공에겐 뭐든 좋은 방향으로 이벤트가 생기는 법인데, 가끔 내가 주인공인 걸 망각한다는 말이지.
“야.”
렌카와 단둘이 부실로 가던 나는,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왜요.”
“너 운동 그만뒀다고 했었는데 그게 유도였어?”
“예.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그랬나...?”
“기억 못하는 거예요? 실망스러운데.”
“우, 웃기지 마...! 들은 적이 없던 거겠지...! 어쨌든 그만둔 이유는 뭐야? 부상?”
“알 거 없어.”
“아 좀...! 부상으로 인해 그만둔 거라면 몸을 쓸 때 조심해야하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야...!”
“몸을 쓸 때?”
“이, 이상한 생각하지 마...! 검도 이야기를 하는 거였어...!”
이상한 생각은 자기가 하고 있으면서 무슨... 혼자 제 발등에 도끼를 찍어놓고 내 탓으로 돌리려는 게 웃기다.
톡.
“흐익...!?”
운동장과 교정 사이의 잘 꾸며진 길을 가로지르며 렌카의 엉덩이를 두드린 나는, 그녀가 몸을 바짝 세우자 낄낄거리며 뒷일을 생각했다.
미유키는 이번 일을 알게 될 것이다. 유도부나 검도부는 말하면 비밀로 하겠지만, 예비 신입생들의 입을 단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 미유키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이긴 한데... 내가 먼저 이실직고하는 게 낫겠지?
그래도 마음이 편안하다. 미유키도 렌카와 치나미처럼, 이 일을 큰 사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이미지가 이렇게 중요해요. 불량했던 시절에 다툼을 벌이면 눈총이 날아오지만, 오랫동안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여주니 뭘 해도 사건이 긍정적으로 흘러가잖아. 굉장히 뿌듯하다. 인생은 잘 살고 봐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