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2 - 호텔 라피아
아무리 원인제공을 유도부원이 했다지만, 싸운 건 싸운 것이다. 때문에 나는 화가 난 고로 감독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그의 반응은 이해가 갔다. 무도를 수련하는 사람이 신입생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대련이 아닌 싸움을 벌였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호되게 혼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형식적인 면이 들어가 있어 다행이었다. 감독 또한 치나미가 욕을 먹은 게 화가 난 모양인데다, 부장인 렌카가 내 편을 들어주고, 싸움도 더 크게 벌어지지 않아서 훈계 정도로만 넘어갈 생각이었나보다. 내가 지금까지 매니저 일을 성실하게 잘 해왔던 것도 감독의 저런 태도에 한몫했겠지.
그렇게 부실을 나오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치나미와 도시락을 먹겠다는 렌카와 헤어진 나는, 잠깐 와보라는 미유키의 메시지를 받고 교실로 향했다. 텅 빈 2-A반 안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외투를 여미며 몸을 앞뒤로 느릿하게 흔들고 있는 미유키가 보인다.
“왔어? 이리 와.”
내 자리를 톡톡 두드리는 미유키. 웃는 낯으로 유혹을 하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 그녀의 말대로 자리에 앉은 내가 물었다.
“왜.”
“오늘 동아리 설명회가 있었던 1학년 복도에서 사고가 하나 일어났다던데...”
왜 점심시간에 부르나 했더니 역시나 알고 있었구나. 3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 벌써 소문이 퍼진 건가? 아니면 한 학생회의 귀에 소문이 들어갔고, 그 학생회 임원이 문자 같은 걸 돌리기라도 했나? 뭐가 됐든 대단하다.
“검도부랑 유도부가 싸웠대. 이거 마츠다 군이랑 관련된 거지?”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나랑 관련됐을 거라고 생각하냐?”
“교무실에 설명회 때문에 빠진다고 말했잖아. 검도부 설명회를 하는 사람들은 부장인 이노오 선배랑 매니저인 나나세 선배, 그리고 마츠다 군밖에 없잖아. 관련이 없으면 이상한 거 아니야?”
“검도부에 입부하고 싶은 신입생들이 사고를 친 거일 수도 있지.”
“말이 많아지는 걸 보니까 싸운 게 마츠다 군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겠네.”
“.... 그렇긴 한데...”
“내막은 대충 알긴 하는데... 이게 건너건너 들린 소문 같아서 마츠다 군의 입으로 들으면 더 좋을 것 같아. 그러니까 설명해봐.”
미유키의 표정엔 설명을 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나름 착실하게 변한 내가 싸움을 벌일 정도라면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그런 믿음도 있는 것 같다.
예전 미유키의 반응과 지금 반응을 비교해보며 큰 격세지감을 느낀 나는, 그 사건을 모두 설명했다. 그러자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미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야?”
“어.”
“알았어.”
의외로 쉽게 넘어가려는 듯한데... 진짜 이걸로 끝인가? 반신반의한 나는 미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끝인가...?”
“끝인데. 혹시 뭔가 모자라? 혼내줘?”
어떤 식으로 혼내준다는 걸까. 물론 미유키는 설교를 상정하고 말한 거겠지만, 난 다르게 받아들이고 싶다. 여왕 미유키가 날 착정하는 모습... 왠지 궁금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나나세 선배한테 욕을 한 사람한테 따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먼저 공격을 한 거잖아.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주먹다짐을 한 건 아니고, 더 싸우지도 않았고, 주변 사람들한테 사과까지 했으니까... 잘했다고 봐.”
잘했다니... 폭력을 무척 싫어하는 미유키가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발언이다. 근데 사실 따지려고 먼저 붙잡으려던 게 아니라, 애초에 싸울 목적으로 그런 거였는데... 이건 조용히 하고 있어야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더 싸우라는 뜻은 아닌 거, 마츠다 군이 더 잘 알 거라고 믿어.”
이어지는 미유키의 자애로운 말을 들으니 마음이 싱그러워진다. 역시 미유키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알아.”
“그럼 됐어. 검도부랑 유도부가 사건을 조용히 덮고 싶어 하지만, 이 일은 학생회에까지 들어갈 거야. 아마 마츠다 군의 이름이 또 올라오니까 진지하게 일을 다루긴 할 텐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인과관계가 분명해서 큰 징계는 없을 테니까.”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흠칫한 내가 물었다.
“징계를 받긴 받는다는 소리네?”
“그건 모르는 일이야. 요새 학생회에서도 마츠다 군에 대한 평가가 좋거든. 잘하면 그냥 경고로 넘어가게 될 수도 있어.”
“징계 받게 되면 네가 어떻게 막아주면 안 되냐? 이제 2학년 되니까 권력도 생겼을 거 아냐.”
“그 말을 들으니까 더더욱 가만히 있고 싶은데.”
“그래?”
“응.”
“그럼 취소.”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내 표정을 본 미유키가 황당해하더니, 이내 풉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따라 굉장히 사랑스러운데, 지금 당장 한 판 해야지 안 되겠다. 그런 다짐으로 주위를 둘러본 내가 말했다.
“미우라는 어디 갔어?”
“먼저 밥 먹으라고 했어. 야한 생각하지 말아줄래? 여긴 교실이야.”
내 눈빛을 읽어낸 미유키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확 달려들어 미유키의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린 내가 그 사이로 몸을 들이밀자,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내가 진짜로 교실에서 하려 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마, 마츠다 군...! 미쳤어? 진짜 안 돼...! 무조건 들키고 말 거야...!”
“문 잠가놓으면 되지.”
“창문 있잖아...! 커튼도 없단 말이야...!! 하, 하고 싶으면 다른 데서 해...!”
하는 건 된다는 뜻이네. 요 며칠간 하지 않아서 미유키의 욕구도 상당히 쌓여있었던 것 같다.
“다른 데 어디.”
“옥상...! 옥상이라도...”
“거긴 추워.”
“그, 그럼 화장실...”
“거기가 더 위험할 것 같지 않냐?”
“체육실 창고...!!”
자주 애용하던 곳이라 임팩트가 없긴 하지만 그나마 안전하긴 하다. 정말 조급해 보이는 미유키의 다리를 천천히 붙인 나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미유키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똑바로 일으켜세웠다.
“그럼 창고에 가는 걸로?”
“.... 근데 짧게 해야 돼... 오후수업이 체육인 학생들이 들어오면... 그리구 뒷정리도 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알았어. 다 할게.”
“응...”
그렇게 미유키와 교실을 나선 내 입에서 돌연 웃음이 새어나왔다. 당장에라도 할 것처럼 굴다가 얌전히 체육실로 가는 모습이 웃겨서였다.
미유키도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다소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상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내에서 관계를 가지면 죄책감이 서려있는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지금은 그런 기색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미유키의 옆에 딱 달라붙으며 보폭까지 맞춘 나는, 그녀와 함께 교정을 나갔다.
**
‘이건 뭐야?’
부활동 시간. 부실로 간 나는 여러 앳된 학생들이 바깥에 마련된 책상에 서있는 치나미에게 팜플렛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어림잡아 스무 명은 되어 보인다. 남녀 비율이 반반인데... 다 입부하려는 사람들인가? 여자야 렌카가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는 왜 이렇게 많을까. 땀 냄새가 나서 싫다. 다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학생들의 사이를 지나가던 나는,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앗, 후배님. 오셨군요.”
날 발견하고는 양손을 흔드는 치나미.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내가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무후후... 검도부 입부 희망자들이에요. 후배님께서 오늘 보여주셨던 처신이 아주아주 좋았던 것 같아요. 소문이 전 우주까지 퍼져버렸답니다.”
유도부원을 딱 제압만 하고, 주변에 사과를 했던 일을 말하는 건가보다. 당연히 사과해야할 일도 좋게 봐주다니, 세상이 왜 이리도 삭막해졌을까 싶다.
그래도 내가 남자답게 행동하긴 했나보다. 설명회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이렇게 올 정도면. 렌카한테 예쁜 애만 받으라고 말하면 진짜로 혐오하려나?
“정말 죄송하지만 금일 준비된 팜플렛이 다 떨어져버렸어요. 다음에 들러주실 때 많이많이 준비해놓을 테니 양해 부탁드려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 치나미가 주변에 저런 말을 하자, 이목이 확 쏠렸다. 상큼발랄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매니저... 딱 남자들이 선호할만한 상이다.
거기다 렌카까지 있으니 아름다운 선배를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입부하려는 가능성도 있을 테지. 어쩌면 지금 이 신입생들의 폭증은, 내가 아니라 렌카와 치나미 때문에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봄 학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불순한 마음을 가진 것들이 많아지는구나. 전부 눈알을 파버려야겠다.
“후배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자신의 등 뒤로 손을 감춘 치나미의 몸이 기우뚱했다.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이다. 미유키는 집에 일이 있다고 했으니 오늘은 치나미와 시간을 보내야겠다.
“오늘 저녁에 거길 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가 어딘가요?”
“라피아요.”
“느엣...!?”
러브호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치나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자신의 분홍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린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씀은...?”
“마사지를 좀 해드릴까 싶어서요. 혹시 오늘 시간 돼요?”
“되, 되기는 하는데요...”
“그런데?”
“렌카와 함께 케이크를 먹기로 해서...”
그렇다면 렌카도 함께 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자. 죽어도 안 가겠다며 고집을 부릴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부활동을 하는 동안 여러 교육을 통해 반쯤 강제로 설득시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찬 생각을 해본다.
“저도 낄 수 있나요?”
“앗... 당연히 오셔도 돼요...”
“그럼 끝나고 같이 가는 걸로? 부장에게는 제가 얘기해놓겠습니다.”
“네... 그러면 일단 그렇게 약속을 잡는 것으로 할까요...?”
“예.”
“좋아요... 그러면 저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요...”
마사지를 받기 전의 마음의 준비인지, 야한 일 전의 준비인지 모르겠다. 둘 다인가? 우리 치나미는 순진한 변태니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벌써부터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느낌을 받은 나는, 신입생들을 보내고 치나미를 도와 책상을 부실 안으로 옮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