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9 - 그해 봄
“나쁜... 새끼...”
침대에서 숨을 헐떡이던 렌카의 지친 욕설을 무시한 나는, 치욕스러워하는 그녀의 땀으로 범벅이 된 등에 진한 키스를 했다.
“아흣...!”
입술이 닿고, 그 사이로 혀가 내려와 피부를 핥는 느낌이 꽤나 좋았을까? 렌카의 코에서 쾌락이 섞인 콧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없이 늘어져있는 렌카를 놔두고 뒷정리를 끝낸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샤워기 소리는 끊겼지만 여전히 문이 닫혀있는 욕실. 혹시 치나미가 탕에 몸을 담그고 있기라도 한 건가 생각하던 내가 렌카의 허리를 툭툭 쳤다.
“스승님은 아직도 샤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방 하나 더 잡아줄게요.”
“.... 거기서 또 하자는 거야...?”
“아뇨. 씻자고요. 저랑 같이.”
“너, 너랑 같이...? 돌았냐 진짜...?”
“싫으면 말고요.”
“무조건 싫어...”
“알았어요. 잠깐 여기 있어.”
무덤덤하게 수긍한 나는 휴대폰으로 비어있는 객실 하나를 예약하고, 로비로 돌아가 카드키를 가지고 왔다. 그새 옷을 갈아입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TV를 보고 있는 렌카. 그녀에게 키를 내민 내가 물었다.
“스승님은요?”
그러자 카드키를 홱 낚아챈 렌카가 대답했다.
“아직 씻고 있는 것 같아. 이거 몇 호실이야?”
“키에 쓰여 있어요.”
“.... 그래.”
“여분 카드키 갖고, 다 씻고 다시 돌아오세요.”
“오, 왜...? 더 하려고...?”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또 하자는 이야기가 은연중으로 나오는데, 아직 만족스럽지 않은 건가? 우리 렌카의 변태력이 충만한 상태라 기쁘다.
“아뇨. 같이 돌아가야 될 거 아니에요.”
“아, 그렇지... 알았어...”
“방까지 데려다줄까요?”
“무, 뭐래...! 꺼져.”
“욕하지 말고.”
“.....”
흐느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렌카가 자신의 옷매무새를 잘 확인해보았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 방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욕실 문이 덜컥 하고 열리면서, 수건으로 온몸을 두른 치나미가 나왔다. 타이밍이 굉장히 공교로운데 우연일까? 그런 의심이 든 나는 밝은 낯으로 치나미에게 다가갔다.
“므흠흠... 안녕하세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사. 고개까지 꾸벅 숙이는 치나미에게 실소를 터뜨린 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넷...”
기력이 조금 회복된 것 같긴 한데... 이 어색함은 뭐지? 설마 싶었던 나는 치나미를 조금 떠보기로 했다.
“혹시 보셨나요?”
“헤엑...!?”
무엇을 봤는지조차 명시하지 않은 질문임에도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해하고 있다. 저 반응은 치나미가 렌카와 내 격렬한 관계를 엿보았다는 증거였다.
하긴, 렌카의 신음이 워낙 커서 치나미가 호기심을 안 가질 수는 없었을 테지. 그나저나 미유키와의 쓰리섬 때도 조금씩 옆을 돌아보던데... 우리 치나미는 관음증이 심하구나.
“봤군요.”
무감정한 사이코패스마냥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자, 침을 꼴깍 삼킨 치나미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무, 무무무무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느앗...? 후배님... 무서워요...”
“무서워?”
“.... 왜 이러시는 것인가요...”
더 장난을 했다간 치나미가 딸꾹질을 할 수도 있겠다. 표정을 편 나는 치나미의 젖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화장대를 가리켰다.
“앉아요. 말려줄게요.”
평소의 친절한 상태로 돌아온 내게 안도한 치나미가 기다란 콧바람을 내쉬더니, 종종걸음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어딘지 모르게 두근두근한 얼굴을 한 채, 거울을 통해 날 바라보는 그녀. 드라이기를 연결하고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에 송풍구를 가져다댄 내가 말했다.
“다음엔 부장이랑 같이 해요.”
“네엣...? 무엇을요...?”
“마사지요. 원래 오늘 같이 받기로 했었잖아요.”
“그, 그랬나요?”
“그럼요. 기억이 잘 안 나시나보네요?”
“앗, 네...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진 없고, 다음에는 꼭 같이 하는 걸로 해요.”
“그... 네에...”
치나미는 당장에라도 발을 동동 구를 듯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흘러내리려는 수건 때문이 아니라, 내가 렌카를 대할 때의 모습을 엿봐서 그런 것이리라. 자신에겐 다정다감하지만, 렌카에게는 상당히 강압적인 모습 말이다.
자신에게도 저러는 건 아닐까 우려스러운 건가? 아니면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건가? 표정만 보면 둘 다 같다. 치나미의 취향을 더욱 깊게 알아봐야겠다.
“근데 후배님... 저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요...”
이어지는 치나미의 말에 방긋 미소를 지은 내가 대답했다.
“금방 끝나요.”
“넷...”
얌전히 가슴팍에 두른 수건을 조절하는 그녀. 내일은 일요일인데, 렌카와 따로 만나서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않을까? 둘 모두 나와 친구가 관계를 가졌다는 걸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알게 된 마당인데 분명히 말을 꺼내겠지?
오늘 아예 쓰리섬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다짜고짜 자지를 들이밀면 거부감이 큰 법이다. 특히 치나미의 반응을 보니 하지 않길 잘했다고 느낀다. 내가 렌카를 다소 거칠게 대해서 그런 반응이 나온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부디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의 쓰리섬에 대한 경계심과 거부감이 더욱 내려가길 바라며, 나는 조심조심 치나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말렸다.
**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가게 된 우리. 렌카와 치나미는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차 안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각자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겠지.
가장 먼저 치나미의 맨션에 차를 세우자,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린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리고는 마치 도망을 치듯 맨션 안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굉장히 창피해하는데, 치나미는 관계 후엔 항상 이랬으니 월요일이면 괜찮아질 것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라서 약간의 어색함은 남을지 모르겠으나,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평소대로 돌아올 테지.
맨션의 공동현관이 닫히는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뒷좌석에 앉아있는 렌카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앞에 타요.”
“.....”
그러자 말없이 차에서 내리더니 자리를 바꾸는 그녀.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까지 지켜보고 차를 출발시킨 내가 물었다.
“왜 말이 없어요?”
“.....”
“야. 말 안 하냐고.”
“아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치나미도 말 안 했잖아...!”
“나 심심해.”
“뭐 어쩌라고! 재롱이라도 떨라는 거야!?”
떽떽거리는 모습이 예쁘다. 알겠다고, 진정하라고 답한 나는 씩씩대는 렌카에게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집에 당도했다.
덜컥.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내린 그녀는, 인사도 없이 집 안으로 쌩 들어갔다. 치나미와 렌카, 절친한 두 사람이 보여주는 각기 다른 반응에 혼자 빵 터진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름의 수확은 있던 저녁이다. 돌아가면 또 혼자겠지? 그래도 예전보다는 외롭지 않아서 좋다.
**
“마츠다 군은 졸업하면 뭐할 거야?”
다음주 월요일,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 미유키가 뜬금없이 저런 질문을 해왔다. 인중에 펜을 가로로 얹어놓고 입술을 우물거리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내가 반문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냐?”
“그냥.”
졸업하면 너는 물론 렌카와 치나미, 그리고 히요리와 결혼 준비를 해야지. 모두와 혼인신고를 하고, 다 같이 우리 집에서 사는 게 목표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달려야한다. 라는 말을 참아낸 내가 말했다.
“너랑 있을 건데.”
“아니이...! 그건 당연한 거잖아 바보야.”
음음... 당연하다는 말이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릴까. 잠깐이라도 멀어지는 걸 상정조차 하지 않는 듯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실을 나온 나는 매점으로 향했다. 미유키가 좋아하는 젤리를 사고, 치나미와 렌카에게 줄 사탕 또한 몇 개 구매한 내가 운동장을 가로질러가고 있을 때,
“아! 마츠다 선배!”
저 멀리서 히요리가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오늘은 왜 온 걸까? 한 번 물어봐야겠다. 마주 손을 흔들고 그녀와 미호에게 가까이 다가간 내가 물었다.
“안녕. 오늘도 동아리 설명회야?”
“아뇨, 오늘 오리엔테이션이용.”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었구나. 아마 오늘을 마지막으로, 히요리는 봄 학기가 될 때까지 오지 않겠지.
“그래? 둘러볼 건 다 둘러봤어?”
“넹.”
“동아리는 정했고?”
“후보군을 추리긴 했는데, 아직 정하진 않았어요.”
“그렇구나.”
“다음에 볼 땐 봄 학기가 되겠네?”
“맞아용. 선배는 매점 다녀오시는 길이에요?”
“그렇지. 젤리 먹을래?”
“아니요. 아까 간식 많이 먹어서요.”
빨리 히요리와 친해져서 대화를 편하게 하고 싶다. 지금은 너무 딱딱해서 발기조차도 안 되는 것 같아.
“그래. 오리엔테이션은 언제야?”
“금방이에요. 아, 라임 아이디 알려줄래요?”
히요리... 지금 내게 먼저 들이대는 거니? 감격에 겨워 눈물이 막 나려고 하네?
물론 저건 지극히 형식적인 말이겠지만... 메신저 상으로라도 그녀를 관음할 수 있다는 게 어디냐. 매일매일 스토커처럼 프로필 사진을 엿보아주도록 하자. 솟구치는 벅찬 감정을 억누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히요리는 물론,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미호와도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한 나는, 이제 가야겠다고 말하며 밝게 손을 흔드는 히요리에게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해주고는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현 상태에서 바라던 목표는 대부분 다 이루었나? 몇 가지 남아있긴 하지만 이건 전부 신중하게 접근해야할 영역이니까... 당분간은 얌전히 미유키, 렌카, 치나미와 겉으론 평범하게, 하지만 뒤에서는 야릇하게 지내야겠다.
그러한 다짐으로 아카데미 생활을 한 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춥지만 내겐 따뜻하게 느껴졌던 겨울의 날씨가 싱그러운 봄바람에 의해 씻겨나가고... 짧다면 짧고, 길다 하면 긴 겨울 학기가 끝났다.
그리고 나는, 겨울방학보다도 짧은 봄 방학동안 세 사람과 따로 자주 만나거나, 가끔씩은 한꺼번에 만나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큰 사고 없이 무탈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봄 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