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312화 (311/313)

Chapter 312 - 비오는 날, 나무 아래 #3

“옷이 다 젖었잖아. 그러다 감기 걸린다.”

“그래용?”

그래용은 뭐가 그래용이야. 몸을 떨고 있으면서. 히요리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준 나는, 밝은 미소를 짓는 그녀가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예쁘다. 이런 와중에도 장난기가 있는 얼굴이 무척 어울린다.

“미츠시마는?”

“미호요? 교무실에 불려갔어요.”

“왜?”

“저도 잘 모르겠네요. 오면 알아봐야죠.”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네. 교정을 조금 둘러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확 쏟아져서...”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근데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얼굴을 쳐다보면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시선이 가고... 그렇다고 아예 쳐다볼 수는 없으니 참 딜레마가 크다.

“선배는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주차장에 가다가 네가 있길래 뭐하나 해서.”

“그래요? 부활동은 끝났어요?”

“그렇지. 너는 동아리 정했어?”

“아직이요.”

“궁도부나 수영부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했는데, 오늘 실제로 가서 보니까 그렇게까지 끌리진 않더라고요.”

검도부로 오라고 말하고 싶다. 검은 빛이 도는 남색 도복을 입은 그녀가, 펑퍼짐한 바지 자락을 휘날리며 도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렌카와 치나미에게 훈계를 듣고 뾰로통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

“검도부도 갈까 고민을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몸을 쓰는 건 힘들 것 같아서요.”

몸을 쓰는 게 힘들다? 나중에 나랑 신나게 써야 하는데, 벌써부터 앓는 소리를 하면 어떡하니. 이어지는 히요리의 말에 수긍한 내가 물었다.

“몸이 편한 게 좋아?”

“머리도 편한 게 좋아요.”

그래, 그래. 너답다. 라는 말을 삼킨 나는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후 다시 강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산 씌워줄 테니까 건물에 들어가 있자. 미츠시마도 그쪽에 있을 거 아니야.”

“앗, 그럼 감사히 쓰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한 히요리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마치 청춘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한걸음을 크게 내딛어 내 지척까지 다가왔던 것이다.

그에 순간 깜짝 놀란 내가 턱을 뒤로 빼자, 히요리가 큼지막한 눈을 더욱 크게 뜨더니 자신의 가느다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턱 두 개 됐당. 저 조금 떨어질까요?”

왜 저렇게 담백한 말투로 말하는 거야, 사람 당황스럽게. 나 외에 다른 사람한테 이런 장난을 치면 혼날 줄 알아.

“아냐. 당황했을 뿐이야. 가자.”

“넹.”

그렇게 나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히요리와 함께 운동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아카데미 건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히요리의 팔이 스쳐지나가면서 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히요리가 가디건을 입고 있어서 아쉽다. 지금이 여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청춘 감성을 한껏 느낄 수 있을 텐데.

“선배, 저 배려한다고 우산을 기울여주실 필요는 없어요.”

흙밭인 운동장에 고인 물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발을 크게 앞으로 내딛은 히요리의 말. 그녀의 머리 위치를 따라 우산의 중심을 옮겨주던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거 아닌데.”

“진짜요?”

“어. 나도 웅덩이 피하느라고 그런 거야.”

“흐음...”

미심쩍은 듯 눈을 게슴츠레 뜬 히요리가 고개를 돌려 운동장 바닥을 바라보았다. 내 주변에 물웅덩이가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려는 것 같은데, 호의는 그냥 호의로 받아들여주면 안 되냐?

“웅덩이는 없는 것 같은데...”

“그래...?”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구나.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찰나, 히요리가 깔깔거리더니 허공에 한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에요.”

아까 성큼 다가오면서 내 당황한 반응을 즐기려는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우리 히요리는 장난을 너무 좋아하는구나.

히요리는 남들에게 이런 장난을 많이 치는 편이었으나, 나와는 아직 거리감이 많이 있어서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서로의 사이가 내 예상보다 더 가까워진 것 같다.

하긴, 방학 때 카페에서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게 되었다는 우연까지 겹치고, 여러 번 마주쳤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친해지는 속도가 빠르겠지. 기분이 좋긴 하지만 자만하지는 말자. 히요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혹시 제가 이러는 게 싫으시다면 언제든지, 가감 없이 말씀해주세요. 제가 생각이 없어가지구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잘 파악하지 못하거든요.”

히요리의 당부에 피식한 내가 대답했다.

“아냐. 나도 그런 장난 좋아해.”

“아 진짜요? 근데...”

“근데?”

“아니에요.”

뜸을 들이다가 말을 얼버무리는 히요리의 입은 근질근질한 게 딱 보였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나한테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우려하는 모양이다. 히요리와 함께 건물 입구에 들어선 나는 우산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해봐.”

“으음... 선배는 장난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장난을 잘 받아주실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에요.”

장난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잘 받아줄 것 같다. 이건 즉, 장난을 잘 안 칠 것 같다는 말과도 상통했다.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얘길 돌려서, 포장해서 한 거다.

조금 충격적이다. 내가 히요리를 너무 어려워하나? 예전에도 생각했듯, 공략 난이도 최상이라는 그 글귀에 지레 겁을 먹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로 재미가 없는 건가? 그런 거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

뭐가 됐든 후배 히로인을 대하는 건 처음이라서 갈피를 못 잡는 면이 있는 듯하다. 히요리는 사근사근하게 다가오는데, 내가 어려워하니까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본다.

나도 편하게 히요리를 대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어렵구나, 어려워. 이럴 때 렌카의 엉덩이를 두드리거나, 치나미의 엉덩이를 만지거나 하며 화를 풀어야하는 건데... 아쉽게 됐다.

“왠지 부정적으로 들리는데...”

“아닌뎅.”

“맞는 것 같은데.”

“좋은 뜻으로 한 말인뎅.”

“그러냐? 그럼 됐고.”

“의심하는 거예요?”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가 했던 말을 따라하는 히요리를 보니, 첫 단추를 이상하게 꿰매었다는 느낌이 든다. 상상이상으로 나를 더 살갑게 대해주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얼굴 때문인가? 아니면 우산을 씌워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가?

왠지 한 수... 아니, 세 수 정도까지 진 것 같다. 이러다 히요리의 장난감이 되어버리는 거 아닐까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벼운 장난을 치고 싶은, 그런 타격감이 좋은 장난감 말이다.

그래도 그런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다면 잘 된 거지. 나중엔 내가 역으로 장난을 칠 수도 있고, 밤에 혼내주면 되니까 오히려 좋다. 테츠야처럼 기분 나쁜 쭈구리만 되지 말자.

“아니라고.”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화 안 냈다. 근데 너 그렇게 있으면 안 추워? 여벌 제복이라든지 뭐 없어?”

그 말에 히요리가 빗물로 인해 피부에 딱 달라붙은 자신의 제복을 살폈다. 내가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젖은 가디건을 벗는 그녀. 덕분에 히요리의 잘록한 허리라인과 더불어, 보기 좋게 굴곡이 져있는 갈비뼈까지 드러나며 눈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게끔 만들었다.

“여벌 제복은 집에 있고... 새 가디건은 라커에 있어요.”

얘는 남자 앞에서 경계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정조 교육이 절실하다, 절실해.

“그럼 빨리 가지러 가야지 뭐하는 거야?”

몸을 돌린 내가 얼른 올라가라며 계단 쪽으로 손짓을 하자, 히요리가 자그마하게 히히... 하는, 다소 음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샤워를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샤워실에 가든가 그럼.”

“어디 있는데요?”

“3층 올라가자마자 좌측으로 가면 교직원 휴게실이 나와. 거기 안에 있으니까 해.”

“마음대로 들어가도 돼요?”

“젖어서 샤워만 하겠다고 하면 될 거야.”

“그렇구나... 근데 샤워해도 입을 옷이 없는데... 알몸에 가디건만 입을까요?”

일부러 내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구나. 간접적으로 야한 말을 해서 반응을 즐기려는 게 틀림없다. 진짜 야한 일은 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발칙하도다. 벌써부터 이렇게 대해줘서 기쁘긴 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미츠시마한테 빌리든가.”

“미호도 없어요.”

“그럼 드라이기로 간단하게 말려.”

“시간 오래 걸리잖아요. 날 어두워지면 귀신 나와요.”

“안 나와.”

“궁도부 3학년 선배가 그랬는데? 선배는 귀신 안 믿어요?”

“안 믿어. 이제 가라.”

“선배는 왜 안 가세요?”

“미유키 만나려고.”

“하나자와 선배님이요?”

“어.”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학생회라 학생회실에 있어.”

“그렇구나... 이제 진짜 갈게요. 미호부터 만나야겠당.”

“전화로 하면 되지 않나?”

“그럴까요?”

“그래. 그리고 제발 좀 가...”

일부러 곤란한 말투가 묻어나오게끔 하자, 히요리의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어요. 우산 씌워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번에 매점에서 맛있는 거 사줄게요.”

“그래라.”

이제 장난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히요리는 더 이상의 말꼬투리 잡기 없이 내게서 멀어졌다. 발소리가 점점 희미해져가고, 곧이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낀 나는 조심조심 고개를 돌렸다. 히요리가 날 놀리기 위해, 멀리서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허나 히요리는 주위를 살펴보아도 없었다. 괜한 망상을 했구나. 창피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벤트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주도한 게 아니라 히요리가 다 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만족스러운 하루였다고 생각한 나는, 히요리의 제복과 가디건에서 떨어진 물기를 내려다보며 저걸 따라갈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변태 같은 생각은 그만하고, 청춘의 감성이나 느끼자.

아직 복도에 남아있는 레몬의 잔향. 콧속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그 향기에 저도 모르게 피식한 나는, 미유키가 있는 학생회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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