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3 - 동류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하지?”
요 위에 늘어져있던 미유키의 한숨. 학생회 일이 많이 바빴나보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만지작거리던 내가 물었다.
“학생회에서 뭐했는데?”
“이것저것 했어. 방학 때 있었던 문제들이랑, 요주의 학생들을 살펴보고...”
말끝을 흐린 미유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과거를 되새겨보듯 아련해진 상태였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는 모양이었다.
“나도 요주의 학생이냐?”
“아냐. 신입생들 중에서만 확인하는 거지.”
“진짜?”
“요새는 이야기도 안 나와.”
그건 좀 실망이다. 나는 관심이 받고 싶은데. 안경잡이 학생회장은 잘 있을까? 요새 러브 코미디의 서브 주인공마냥 양갈래머리를 하던데, 붙잡고 후배위를 하면 딱 좋을 것 같다.
히요리가 치마를 짧게 입은 건 미리 말해야할까? 아니, 그러지 말고 모른 척을 하자.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가 히요리가 어떻게든 사실을 알게 되면 호감도가 떨어지잖아.
“오늘 비도 와서 그 가게에 가려고 했는데, 네가 피곤하다니까 가면 안 되겠다.”
“뭐래... 거길 가야 내가 힘을 내지.”
“그런 건가?”
“그런 거야.”
“언제 갈래?”
“지금도 괜찮고... 늦게도 괜찮고.”
“자고 갈 생각인가보네.”
“으음...”
고개를 한쪽 방향으로 기울인 채 어쩔까 고민하는 미유키가 너무나도 예뻐 보인다. 당장 하고 싶지만 피곤하다니까 참자.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미유키의 입이 열렸다.
“아마도?”
“뭔 아마도야. 그냥 자고 가라.”
“왜? 운전하기 귀찮아?”
“어. 귀찮아 죽겠다.”
심드렁한 척하는 내 태도에 배시시 웃는 미유키. 귀찮다는 말이 전혀 진심이 아님을 진즉 눈치챈 그녀가 말했다.
“집에 갈래. 태워줘.”
“그래.”
“사실 안 갈 거야.”
“알아.”
시답잖은 말장난조차도 왜 이렇게 재미있을까. 미유키도 나처럼 생각할까? 표정을 보니 그렇게 보인다.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가 누운 내가 말했다.
“그래서, 신입생들 중에서 요주의 인물은 있었어?”
“음... 몇 명 있긴 해. 안 좋은 소문이 도는...”
안 좋은 소문이라? 그렇다면 히요리는 그 안에 포함되어있지 않을 거다. 사간문제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전 학교에서 불량했던 애들?”
“응. 학생회장 선배가 그러셨는데, 한 명은 진짜 엄청난 문제아래.”
“어지간히 싸웠나보네. 걔는 추첨제로 들어온 애겠지?”
“맞아. 근데 편견은 갖지 않아보려구.”
나 때문이구나. 예전에 비하면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개과천선해진 날 보고 색안경을 끼지 않으려는 모습... 보기는 좋다.
하지만 그 문제아라는 놈은 쉽게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닐 거다. 사람은 변하기 힘들거든. 나는 진짜로 영혼과 몸이 변했지만 그놈은 아니잖아. 놈이 어느 정도의 문제를 일으키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나랑 비슷할 경우 학을 떼면서 퇴학시키려고 하겠지.
“이제 가자.”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내가 물었다.
“어딜? 라멘 집?”
“응. 나 오늘 피곤하니까...”
“차까지 업고 가면 되지?”
뒷말을 대신한 내게 방긋 웃어보이는 그녀. 자신의 양팔을 허공에 쭈욱 뻗어, 손가락을 사르르 흔들며 빨리 일으켜달라고 재촉하는 모습이 귀엽다.
그런 미유키의 얇은 손목을 잡고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일으킨 나는,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아 등을 가리켰다.
“업혀.”
그에 미유키가 지렁이마냥 꿈틀거리더니 손을 어깨에 올리고 상체를 등에 가져다대었다. 다리는 여전히 요 위에 올려놓은 채 있는 그녀를 향해, 내가 말했다.
“이러면 어떻게 업냐?”
“어떻게든 업어줘.”
“손이라도 닿을 수 있게 좀만 더 붙어보든가. 목에 팔 둘러.”
“힘들어.”
알아서 해달라는 게 마치 아기 같다고 생각한 나는, 무릎을 천천히 피면서 미유키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미유키가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바닥에 디뎠고, 이후 내게 폴짝 뛰어올랐다.
개구리마냥 다리를 내 허리에 감은 미유키가 무어라고 칭얼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나는 그녀를 데리고 거실 미닫이창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
“나 또 가봐야 돼. 오늘 혼자 수업 잘 들을 수 있지?”
다음날, 차에서 내린 미유키의 물음. 목소리가 너무 나긋해서, 어린이집에 등원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깨발랄한 선생님처럼 생각되어지는 치나미와는 다르게, 미유키는 약간 근엄하면서도 성격이 좋은... 그런 선생님 같다.
“내가 애냐? 알아서 들을게.”
“애처럼 말하는데 뭘...”
킥킥거린 미유키가 내 등허리를 토닥이더니,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어제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날,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라멘을 먹었더니 기분이 좋나보다.
오늘은 왠지 느낌이 괜찮다고 생각한 나는, 만나는 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혼자 건물로 향했다. 그러다 저 멀리서부터 교문으로 들어오는 히요리를 발견했다.
어제 첫 날과는 달리, 히요리는 하루만에 무리를 만든 모양인지 미호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아니, 무리라기보다는 학생들이 알아서 히요리의 주위로 달라붙었다고 해야 옳겠지.
남자들은 없었다. 아직 개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앞으로도 외간남자를 멀리하도록 하렴.
히요리의 치마는 어제와는 달리 기장이 길었다. 등교할 때만 저렇게 입고, 교실에 들어가기 전이나 점심시간 즈음에 바꿔 입으려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사복을 가져와서 수업이 끝나면 바꿔 입든가. 제복이 마음에 든 건가? 그런 거라면 할 말이 없다.
말이라도 걸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히요리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날 발견한 그녀가 방긋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맡에서 손을 흔들었다.
무어라고 웅얼거리고 있는데, 입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많고 많은 학생들 중에서 날 정확히 발견하다니 기쁘구나.
눈빛에는 대놓고 날 반가워하는 기색이 서려있다. 어제 일이 참 고마웠나보다.
히요리의 그 행동에,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일행들의 눈이 날 주시하는 게 보인다. 저들끼리 무어라고 속닥거리는데, 거리가 꽤 있어서 들리지가 않는다.
새로 생긴 일행들이 마음에 안 든다. 예쁘긴 한데 불량학생 같은 기운이 풀풀 흘러. 상큼발랄한 히요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지로 혼내주어야겠다.
“기다려요! 가지 마!”
대충 인사를 하고 가려던 나는, 히요리가 냅다 뛰어오면서 언성을 높이자 걸음을 멈추었다. 은근한 반말을 섞었다.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방증이라 기분이 좋긴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렌카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다.
화가 나거나 아리송한 감정이 드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거다. 렌카한테는 조금 잘해주도록 하자. 그래도 꼬리 플러그는 써야지.
“왜.”
가까이 다가온 히요리에게 턱짓을 하며 묻자,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어보인 그녀가 매점 방향을 가리켰다.
“어제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했잖아요. 매점 가요.”
“오늘 사주려고?”
“그럼 다음에 사드릴까용?”
“아니, 오늘도 괜찮긴 하지만 난 사람 많은 거 싫어하는데...”
“사람? 아...”
고개를 갸웃하던 히요리가 뒤를 돌아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당연히 저희 둘만 가야죠. 선배는 제 친구들이랑 면식이 없잖아요. 아니다, 미호랑도 같이 갈까요? 선배도 아니까.”
“미츠시마만 따로 쏙 빼놓으면 친구들이 서운해 하지 않을까?”
“아, 그런가?”
자신의 부드러운 머리를 긁적이는 히요리. 내 말이 일 리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미호한테 말하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실래요?”
“그러든지.”
“근데... 으음...”
말끝을 흐린 히요리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날 살펴보았다.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왜 또.”
“아뇨. 어제랑 성격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누가? 내가?”
“넹.”
“어디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뭔가... 뭔가 기분이 좋은 것처럼도 보이고... 자신만만하게도 보여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해서 행동으로 옮겼는데, 이걸 바로 눈치챘구나. 역시 히요리는 감이 좋다.
나와의 첫 잠자리가 코앞에 다가와서도 그런 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디 두고 보도록 하자.
“어제는 비가 와서 기분이 다운됐던 거예요?”
이어지는 히요리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은 내가 대답했다.
“아니. 나 비오는 날 좋아해.”
“그래요?”
작게 입맛을 다시는 히요리의 얼굴엔 약간의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다. 놀리는 맛이 조금 사라져서 아쉽기라도 한 모양이지?
“미츠시마한테 말하러 안 가?”
“아, 맞다. 다녀오겠습니당.”
할 일을 상기시켜주니 옳다구나 한 히요리가 미호에게 가더니, 날 쳐다보며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매점에 가겠다고 하는 것도 꼭 날 봐야 하나? 또 사람을 당혹케 하는구나. 그러면 못써요.
얼마 지나지 않아 히요리가 미호와 일행들에게 나중에 보자고 큰소리로 말을 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이후 자신의 빨간 가방에서 가디건을 꺼내더니 가방끈을 내게 내밀었다.
“잠깐 가방 좀 들어주실 수 있어요? 옷 입게요.”
아주 자연스러운 히요리의 행동과 말투에 저도 모르게 가방을 받아든 나는 아차 했다. 방금 히요리에게 휘둘렸다. 그녀로서는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겠지만... 이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방심하면 순식간에 주도권을 내어줄 것 같아.
“감사합니당.”
특유의 말끝을 높인 말투로 감사를 전하고는 다시 가방을 받아드는 그녀.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말했다.
“가면 되나 이제?”
“네, 뭐 드실래요?”
“사주는 사람이 너니까, 네가 정해주는 걸로 먹을게.”
“그럼 스이츄 먹을까요?”
스이츄는 이번 학기에 매점에 들어온, 신 맛이 나는 캐러멜형 젤리를 말함이었다. 어제 학생회 일을 끝내고 온 미유키가 손에 들고 있던 걸 봐서 한 입 먹어봤는데 맛있긴 했다.
여자들한테 딱 인기가 좋을만한... 그런 맛이었다. 심지어는 레몬 맛이기도 해서, 히요리가 무척이나 좋아할 것 같다. 복숭아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치나미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지 뭐.”
“두 개 사드릴게용.”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자신의 어여쁜 검지와 중지를 쫙 펼쳐 내게 보여주는 히요리의 표정이 하도 개구쟁이스러워서 그러기 싫다. 실소를 터뜨린 나는 결국 히요리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그녀와 함께 매점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