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헨리에타의 막돼먹은 말로 인해 그레이가 얼마나 상처 입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가 하루빨리 나쁜 여자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기를.
데비에게 사기(?)로 계약서를 쓰게 만든 그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자신만만한 인물이었던가.
그랬던 그가 근래에 말도 없어지고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헨리에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한 것일지도 모른다.
* * *
떠들썩하게 먹고 마신 그날 밤이었다. 마지막엔 모두가 모닥불에 나란히 둘러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글로리 신문사에서 출간하려던 내용이 뭔지 알아?”
벤자민이 엉덩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어 두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 일하는 직원한테 부탁해서 한 장 빼냈는데, 이거 인쇄하려던 초판 대장이거든.”
벤자민 주변의 직원들이 우와아 하면서 몰려들었다.
“테리움 영지 반란 사건에 대해서 폭로하는 기사였나 봐.”
그 말을 들은 순간 데비는 가슴이 철렁했다. 테리움 영지 반란 사건이라면, 그녀의 부모님이 연관된 사건이었다.
당시 테리움의 영주였던 모건이 중앙 정부에 역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당시에 반란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데비의 부모님은 그때 돌아가셨다.
반란이 수습되면서 블레이크가 테리움 영지의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
자신의 역린과도 같은 일을 직원들이 이야기하자 너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사람들에게 과거를 말하기 싫었기에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모두가 돌려보고 옆으로 전해 주는 틈에 온전히 읽어 볼 기회가 왔다.
「기획된 모반.」
데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그녀도 이미 아는 사실이 쓰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의문점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아 조금 실망했으나, 그래도 이렇게 다시 언급해 준 게 어디냐 싶었다.
「모반의 전반적인 상황을 재수사하기 위해서라도 바나바스 백작을 소환해 재조사하길 바람.」
기사가 요구하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게다가 초판 대장이라 기사에서 제시한다던 증거물의 사진은 나와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데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기사가 그녀의 가장 아픈 기억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미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부모님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직장 생활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낳으셨고, 부모님께서 벌어 오신 돈으로 먹고 자랐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연행과 죽음에 어린 데비는 절규했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 반역에 가담한 부모가 세상에서 지워질 때 따라 죽는 것이 마땅한 운명이야. 그런데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살게 해 줬으니 한스럽다 탓하지도, 입 밖에 내지도 말아야지.
반역 사건으로 죽은 부모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부모의 죄를 물려받지 않는 길이라고 어른들이 말했다.
그런데 그 일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기사를 그 남자가 제공했다는 자체만으로, 눈이 번쩍 뜨이며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데비의 가슴이 더욱 크게 방망이질 쳤다.
괴도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그를 다시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았다. 새삼스러웠지만 그와의 첫 경험이 다시 떠올랐다.
가장 아픈 역린도 함께 떠올랐으나, 고마웠다.
그가 처음인 것도 감사했고 이 일을 물 위로 드러나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더욱 기뻤다.
심장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하아.
그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가슴이 더욱 세차게 뛰었다. 매 순간 매 호흡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데비는 이 기분을 시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얼른 수첩을 꺼내 몽롱한 기분에 취해서 발로 쓴 것처럼 흘려 썼다. 그래도 기분 좋았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진득하게 흘러내려 마음을 더럽히다가 비로소 시어가 된 순간. 그녀의 숨통이 트였다.
타닥타닥.
모닥불 곁에서 한밤중까지 버티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새벽이었다.
엣취.
다들 뒤엉켜 잠들었고 타다 만 모닥불이 거의 꺼져 가고 있었다.
추워서 눈을 뜬 데비는 손으로 제 팔뚝을 쓸어 보았다.
다들 최후의 1인까지 장렬하게 먹고 마시고 떠드느라 그 자리에서 차례로 엎어져 잠든 듯했다.
“저러다가 입 돌아가는데.”
데비는 별장 쪽을 쳐다보았다.
‘흐음. 비품실이라면 담요가 있지 않을까.’
추워서 덜덜 떠느니 찾으러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엣취.
다시 재채기한 그녀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몸을 문질러 체온을 북돋웠다.
담요를 꺼내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덮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쓱.
대충 비품실이 있을 거로 생각되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눈앞을 스쳐 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그녀는 홀린 듯 그 그림자가 스쳐 간 문을 열었다.
벌컥.
가면을 쓴 남자가 옷을 갈아입다가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헉!”
그가 몸을 비틀어 데비를 보고는 새된 소리를 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가면을 떨어뜨릴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잡았다.
“또 뵙네요.”
데비의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그는 출판사와 관련된 사람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절묘하게 다시 만날 리 없었다.
“여길 어떻게…….”
그가 더듬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문이 열려 있던데요?”
닫힌 문이었지만 잠겨 있지 않았으니 열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그녀의 눈도 향했다.
“괴력의 소유자인가 봅니다.”
데비는 자신이 연 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빗장과 걸쇠가 보기 좋게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정말 손잡이를 밀었을 뿐이에요!”
그녀는 당황해서 문을 앞뒤로 살폈다.
“잠긴 걸 밀었으니……. 하아. 그만 됐고 문 좀 닫아 주시죠.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고 싶진 않으니.”
데비는 화들짝 놀라 문을 닫았으나 순간 쑥 하고 문손잡이가 빠져나와 손에 들려 버렸다.
그가 재빨리 다가와 문손잡이를 끼우고 문을 닫았다. 그러더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벽을 가볍게 주먹으로 쳤다.
“이렇게 쉽게 또 들키다니.”
그런 그에게 데비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보고 싶었어요.”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뭐라 말하려다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숨을 몇 번 들이켜고 내쉬면서 감정을 차갑게 가라앉힌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이 나옵니까, 지금?”
데비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날 목격했으니 증거를 없애 버리려고 지금 당장 해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경계심이란 게 전혀 없습니까?”
그가 분노를 눌러 담아 나직하게 읊조렸다.
“신고할까 봐 그러세요? 아녜요. 전 절대로 신고 안 해요.”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같은 출판사에 제 선배님이신 것 같네요. 선배님께서 잡히면 출판사에도 타격이 클 거예요. 이 출판사가 선배님의 근거지라면, 저 말고도 다른 조력자들도 있을 테죠. 선배님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분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갈 테고요.”
그 말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미 한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인 제가 왜요. 저는 여기서 꼭 성공해야 하는걸요? 저도 조력자로 여겨 주시면 안 돼요?”
그러나 가면 속의 남자는 경계심을 전혀 거두지 않았다.
“제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 믿는 거죠? 그저 도둑일 뿐인데.”
“술 마시다가 직원 하나가 어제 날짜로 발행하려던 글로리 신문의 초판 대장을 보여 줬어요. 선배님께서 그 폭로성 기사 소재를 준 장본인이라는 사실도 알고요. 그런데 그게 발행 안 된 거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데비의 말에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그 기사에 저도 관심이 있었으니까요.”
데비는 그가 자신의 진심을 믿어 주길 바라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저, 테리움 영지 출신이에요. 저희 부모님은 테리움의 영주가 반역죄로 처벌받을 때 조력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처벌당하셨죠. 그래서 고아로 자랐어요. 그런데 선배님께서 내려고 하신 기사 내용이 테리움 영지에서 갑자기 영주가 바뀌게 된 의혹을 제기한 거잖아요. 당연히 관심이 있을 수밖에요.”
그녀의 말에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조력자가 되게 해 주세요. 네?”
비웃음에도 데비는 간절했다.
“이봐요. 신출내기라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당신 도움도 필요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이타적인 관계 따윈 믿지도 않고.”
“아녜요. 의외로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요.”
“나와 얽힌 이는 곱게 죽지 못해. 그것 하나는 장담하지.”
그의 목소리가 유독 차갑게 들렸다.
“나와 관계되면, 당신은 내 존재에 대해 불어도 죽게 될 거고 그러지 않아도 죽게 될 거요. 하지만 나는 살아남겠지. 언제나 그랬거든. 그러니까 허튼 희망 품지 말고 그저 나를 모르는 척해.”
그러자 데비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모르는 척하는 대가라도 주세요.”
“뭐?”
어떻게든 그와의 연결 고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여기서 문을 닫고 나가면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 없는 사람일지라도 두 번이나 이렇게 마주쳤다면, 또다시 마주칠 계기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언가 출판사를 드나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 것 같았는데, 데비의 눈에 띈 이상 출판사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 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더욱 철저히 정체를 숨기게 될 게 불 보듯 뻔한데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왜 그를 다시 만나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은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그가 끝내주는 첫 경험 상대이고 그가 파헤치는 비밀이 뭔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딱, 일 년. 아니 이제 11개월 남았네요. 저는 싫든 좋든 여기서 열한 번의 칼럼을 더 써야 해요.”
“그런데?”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칼럼 쓰는 걸 도와주세요.”
데비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당신과 연관되기 싫다고 말했을 텐데.”
그가 딱 잘라 거절했다.
“첫 상대 따위에 의미를 둘 거면 나 말고 다른 상대를 택하지 그랬어. 난 개자식이라 정절 따위 몰라. 그냥 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이고, 내 주변에 있던 이들은 모두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졌지. 그러니까 딴 데 알아봐.”
데비는 얼굴이 화끈거리며 지독한 모욕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울면서 뛰쳐나가야 옳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이 오히려 그녀를 차분하게 해 주었다.
모닥불에서 사람들이 안줏거리 삼아 ‘테리움 영지’의 일을 언급했을 때 운명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