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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패치의 은밀한 특종-25화 (25/120)

#025

“갑자기 남자 친구는 왜요?”

데비는 바짝 긴장했다. 요 근래 그레이의 짜증이 심했다.

사소한 걸로 트집 잡아 갖은 짜증을 낸 건 기본이고, 지난 칼럼이 수준 미달이라며 유난히 마음에 안 들어 했다.

하지만 출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데비가 다른 칼럼을 써내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잡지에 실었다.

그토록 그레이가 트집 잡고 혹평한 것치고는 독자 반응이 좋았다.

애독자 엽서에 이번 칼럼은 개그물이냐는 말에서부터, 직장 내 불쾌한 현실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풀어서 더 감명 깊었다는 평도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가 뭐라 말할지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조목조목 따져 줄 테다!’

이렇게 독자 반응이 좋은 기사를 그가 트집 잡아 영영 묻어 버릴 뻔했으니까.

하지만 그레이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근래에 서먹서먹해졌었다.

“그런 걸 왜 물어보세요?”

데비의 말을 듣자 그의 얼굴에 온갖 난감하고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딱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었다.

막상 말하려니 부끄러운지 그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뜬금없이 남자 친구는 왜 묻고, 저 침묵은 또 무슨 의미인가.

그레이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로등 아래 두 남녀가 딥 키스를 하며 얽힌 뱀처럼 꿈틀거리다가 데비와 그레이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더니 더욱 으슥한 골목으로 도망갔다.

“남자 친구 있어, 없어?”

출판사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서며 그가 물었다. 그런데 데비와 시선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그저 출판사 문손잡이만 붙잡고 만지작거렸다.

“고작 그거 묻는데 왜 그렇게 망설이세요?”

보다 못한 데비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왜 하필이면 키스하는 남녀를 본 후에 그런 걸 묻는 걸까.

“사생활 간섭일까 봐.”

그가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잠긴 출판사 문을 열었다.

“그 정도 대답하는 게 뭐가 문제라고요. 없어요.”

“정말 없어?”

그가 확답을 받듯이 되물었다.

“없다고요!”

아직 그와 말을 주고받을 만큼 마음이 풀린 상태는 아니었다. 그만큼 그가 지난 칼럼에 둘러댄 온갖 트집이 마음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자꾸 물어보…….”

데비는 짜증스럽게 대꾸하려다가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이렇게 수줍어하는 건가. 설마, 남자 친구 있냐고 물어보는 게, 나한테 흑심이 있어서?

데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편집장이 내게 왜?

아냐. 아닐 거야. 절대로 아닐 거야.

나랑 편집장이랑 뭔가 감정적으로 엮일 만한 계기는 없었잖아.

데비는 애써 그렇게 부정했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칼럼 때문이지? 이렇게 퇴근도 못 하고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거.”

데비는 그를 한번 흘겨봤다.

뭐 언제는 그리 신경 써 줬다고 그래.

속으로 툴툴거리며 불 꺼진 출판사 안으로 들어갔다.

“밤늦게까지 취재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레이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미처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하군.”

데비는 어둠 속에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며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고를 닦달하던 그의 평소 태도로 보아 웬일로 미안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요?”

작은 불빛이 사무실 안에 드리웠다. 작은 마법 전등이었다. 크기는 작아도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이었다.

데비는 출판사에 돈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옛 시대의 마법 아티펙트가 있는 걸 볼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취재 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경호가 필요할 때가 있을 텐데 무심했던 것 같아.”

그레이의 말에 데비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걸 인제야 깨달으셨나요.”

그가 코트를 벗어 근처 옷걸이에 걸었다.

“다음번엔 취재할 때 내게 부탁해.”

“네?”

데비는 자신의 책상에 앉으려다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자비로 경호원 비용을 충당하긴 어렵겠지. 그러니 대신 나를 데려가라고.”

헉.

정말로 나한테 흑심 품었나?

데비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편집장이 내게 반할 포인트가 없는데… 대체 왜?

데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레이와 얽혀 딱히 좋았던 기억이 없었던지라 남자 친구 없음을 핑계로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려고 하는 그의 태도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헨리에타에게 차인 게 불쌍해서 잘해 줬더니 설마 나한테 반한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절대로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데비는 그레이가 남자 친구 없음을 핑계로 자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오다가 어느 날 그대로 애인이 되어 버리는 상상을 했다.

어딜 가서나 그를 상사처럼 어려워하며 모시고, 무얼 하든 그가 트집 잡는 모습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욱. 상상만으로도 토 나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따라온 그가 말했다.

“그 칼럼을 맡긴 책임이 내게도 있으니.”

데비는 미간을 좁혔다. 대외적으로 칼럼이 데비의 인터뷰로 이뤄지는 건 줄로 알고 있을 뿐, 데비 자신이 몸을 직접 던져 칼럼 내용을 실제로 체득했다는 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런데 그가 저렇게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칼럼과 책임을 운운하니 가슴이 뜨끔했다.

설마 칼럼 내용이 내 실제 체험이란 걸 간파한 건 아니겠지?

쓸데없이 예리해서 늦게 출근하고도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 있는 그였다.

그레이와 동행하다니!

그러면 내 칼럼의 비밀을 편집장에게 들킬 거야.

이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충격이었다! 그가 남자 친구 역할을 은근슬쩍 꿰차려고 하는 것도, 칼럼의 정체를 간파하게 될 것도 모두 두려웠다.

“호… 혼자 다니는 게 편해욧!”

데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지금처럼 위험한 순간에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그가 긴 한숨을 토해 내며 이마를 문질렀다.

“오늘, 데비 존스 양이 취객들 사이에서 혼자 서 있는 걸 보고 반성하게 되었어.”

그레이는 목에 두른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 두어 개를 끌렀다. 그 모습이 매우 지쳐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풀이 죽어 보였다.

“편집장님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반성이라뇨.”

그 말을 들으며 그레이는 다리를 꼬고 등을 의자 등받이에 파묻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반성할 수도 있지. 데비 양을 가혹한 조건에 서명하도록 내몬 건 나니까.”

밤이 되니 뭔가 감상적인 기분에 숨어 있던 양심이라도 재발견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레이에게서도 술 냄새가 나긴 했다.

반성이라니. 절대로 그레이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였다. 평소 안 먹던 술을 먹어서 그도 감성이 말랑해진 걸까.

“아… 그러세요?”

데비는 파들거리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켰을 때마다 데비가 반항하면, 그는 계약서를 들먹이며 권력과 돈의 힘으로 데비의 의견을 묵살하곤 하지 않았던가.

그런 주제에 원고를 어찌나 꼼꼼하게 들여다보는지. 문장을 고치고 또 고쳐 다듬다가 정체성에 혼란이 오도록 만든 것도 그였다.

“남자 친구도 없다며. 그러면 오해 사지 않겠지, 앞으로 취재 때마다 불러.”

억! 당신 자체가 오해를 만듭니다.

“괜찮습니다. 편집장님 바쁘시잖아요.”

데비는 애써 그의 의견을 돌리려 했다. 식은땀이 마구 흘렀다.

“바쁘지 않은데?”

그가 책상에 한쪽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채 노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출판사에서 제일 바쁘신 분 아니에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음… 딱히? 출근도 제일 늦게 하잖아. 일은 직원들이 하고 나는 검토만 하고.”

“아니에요! 가뜩이나 취재 일정이 들쭉날쭉한데 그걸 어떻게 편집장님이 맞춰서 따라오시겠어요.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잘해요.”

“내게 작성 내역 허가받아서 가는 거야. 나만큼 일정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가 반드시 ‘예스’라고 대답하라는 듯 상황을 자꾸 몰아갔다.

“아니, 아니, 정말 아니에요. 오늘도 건국제 퍼레이드 취재하러 갔다가 즉흥적인 기회로 퍼레이드에 참여한 무희들이랑 갑작스러운 인터뷰 자리를 만든걸요. 비록 건수는 못 올렸지만.”

절대로 안 된다.

눈에 흙이 들어와도 그레이는 안 된다.

‘편집장님. 제가 당신을 챙기고 잘해 주려고 애쓴 건 헨리에타에게 차였다고 세상 끝난 것처럼 굴던 당신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였지, 당신을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

데비는 눈을 부릅뜨고 그에게 그리 외치는 상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즉흥적인 일이 잦은데 어떻게 편집장님하고 일정을 맞춰요?”

데비는 진저리를 치며 변명거리를 내뱉었다.

“아까는 내가 반갑지 않았어? 그런 표정이었는데?”

그레이가 정곡을 찔렀다. 아까 정말 1초 정도는 그를 만나 기뻤다. 1초를 제외한 모든 시간이 후회로 가득 차서 문제지만.

“아악!”

데비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레이가 놀란 표정으로 데비를 살폈다.

“왜 그래?”

차마 그와 동행하는 게 너무 싫어서 비명을 질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대답을 듣겠다는 듯 데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데비는 고전적인 핑계를 갖다 댔다.

“저기…….”

“뭐?”

“버… 벌레가 자꾸 얼쩡거리… 아니, 지나간 것 같아서…….”

“뭐? 무슨 벌레?”

그레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데비는 그가 다가올까 봐 얼른 책상 위의 책을 이리저리 들춰 보는 척했다.

“제가… 잘못 봤나 봐요. 그냥 기분 탓인가.”

“청소부에게 좀 더 꼼꼼히 살피라 해야겠군.”

그는 일어난 김에 데비에게 다가오나 싶더니 그녀를 지나쳐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 대고 데비는 용기 내어 말했다.

“동행은 감사합니다만 혼자 취재하는 게 더 편해요.”

하지만 그레이는 편집장실 안에서 뭔가 달그락거리면서도 동행하겠다 말했다.

“내 마음이 편치 않아.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괜찮은데…….

데비는 미간을 찡그렸다.

참 이상하게 그레이를 보면 자신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말하기가 힘들었다.

“편집장 명령이야.”

그가 결정타를 날렸다.

자기 뜻에 반대되는 대답을 하려 하면, 그 대답을 못 하게 이리저리 피해 가는 말을 하며 핵심을 싹 빠져나가는 데에는 도가 튼 인물이었다.

“차나 한잔하면서 생각해 보자고.”

“스읍-, 후우-.”

데비는 숨을 몇 번 반복해서 들이켠 후 편집장실에서 나오는 그레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숙취 해소에 좋은 차야.”

그는 능숙하게 직접 차를 우리며 허브차를 준비했다. 데비가 일어나 곁으로 다가와 그를 도우려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앉아서 쉬어. 가만있기 뭐하면 소파에 누워 잠깐 쉬든가.”

“괜찮은데.”

그레이는 데비의 팔을 잡아끌어 기어코 소파에 앉혔다. 누군가의 손을 잡기도 싫어하던 그가 데비의 소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다.

아까 걸어올 때 그레이의 팔짱을 먼저 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잠깐만 누워 있어.”

그가 데비를 눕히더니 자신의 코트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달그락달그락.

지금까지 긴장해 있어서 잘 몰랐는데 그레이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하암.”

역시 등은 바닥에 붙이면 안 되는 거였다.

종일 건국제 취재 다니느라 발품을 팔고, 밤엔 무희들의 모임에 가서 새벽이 되도록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졸음이 솔솔 왔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저항하며 데비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부릅뜨려 애써 보아도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쿨…….

그레이가 차 두 잔을 가져왔을 때, 데비는 이미 숙면에 빠진 후였다.

“하하…….”

그레이는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 테이블에 차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데비가 누운 소파 옆에 걸터앉았다.

이마 위에 그녀의 다갈색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제집처럼 꿀잠을 자는 모습이 어쩐지 괘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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