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혼자 있으면 무서운 건 사실이니까.’
데비는 그렇게 위안 삼았다.
블레이크의 별장에 들어서자 별장지기 부부가 반갑게 데비를 맞이했다. 그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나타나 데비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보호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밝히지 않았으나, 데비는 그가 볼룹타스에서 일하던 안전 요원일 거라 추측했다.
그들은 데비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정도의 거리에 머물렀다.
이곳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참았던 졸음이 밀려왔다. 늘어지게 하품하는 데비를 본 별장지기가 그녀를 객실로 안내했다.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먼저 한숨 주무신 후에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생각해 보면 밤새 걸어 볼룹타스로 갔다가 그다음엔 출판사로 가서는 수사에 협조하라며 치안청에도 끌려갔다 오는 등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당연히 졸릴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로레인. 네가 죽었는데도 먹을 게 입에 들어가고 잠이란 걸 자야 하는구나.’
데비는 객실의 침대에 풀썩 몸을 던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렇지 않았던 일상의 모든 것이, 그녀가 없이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이 미안하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게 괴로워서 저절로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오히려 체력을 비축해야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한숨 자고 나서 맑은 정신으로 되짚어 보겠어.’
데비는 그대로 기절한 것처럼 잠들었다.
* * *
손.
로레인의 손.
조금만 더 뻗었으면 닿을 수 있었을 그 손.
눈앞에는 로레인이 있고 괴한들이 무언의 눈빛으로 협박하던 순간에, 조금만 더 뻗었어야 했던 손.
그 급박한 순간에도 ‘살고 싶다’라고 와락 매달려 데비를 끌어들이기보다, 제 발로 갈 테니 이 친구는 놔두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가던 로레인의 손.
바보야. 왜 그랬니.
그냥 나를 끌어들이지 왜 혼자 떠안고 갔어?
고작 열쇠고리 하나 맡기고는.
어떻게 이 순간조차 초연하게 웃을 수가 있어?
데비는 꿈에서 로레인을 따라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던 로레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그때처럼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안 돼. 제발 가지 마.
친해지고 싶었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너의 찬란함.
이제 조금 가까워졌나 싶으면 다시 어딘가로 멀리 사라지던 그녀는 어느새 데비의 곁에서 속삭였다.
― 나는 살아 있어. 걱정하지 마.
정말?
눈이 휘둥그레진 데비의 뺨을 그녀가 어루만져 주었다.
“로레인!”
데비는 벌떡 일어나 그 손을 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데비의 손에 붙들린 건 흰 장갑이었다.
“헉!”
데비가 고개를 돌리자 데비의 침대 곁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뭐 하는 거죠?”
그의 한 손에는 흰 장갑이 끼워져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맨손이었다. 그가 자신의 장갑을 돌려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안전하다 해서 별장으로 보내졌는데 당신이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면 이곳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군요.”
데비는 그의 침입에 불쾌해하며 그에게 장갑을 건넸다.
“당장 나가 주세요. 허락 없이 제가 있는 방에 함부로 드나들지 마세요!”
그녀가 화를 내든 말든 그는 태연하게 장갑을 착용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경황이 없다 보니 당신을 두고 갔죠. 로레인 양의 흔적을 따라잡느라.”
그의 말에 로레인이 꿈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로레인 살아 있어요? 역시 죽은 게 아니죠? 그냥 납치된 거죠?”
꿈에서 분명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데비는 잠깐 그녀가 죽었다고 착각하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지금 동부 치안청 시체 안치소에 있는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거짓말!”
데비는 강하게 부정했다.
“살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로레인의 구조를 요청하려 했다고요! 당신이 기절시키지만 않았어도!”
데비는 목구멍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로레인은… 로레인은……!”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슬퍼해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어설프게 위로하기보다 데비가 혼자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누가 죽더라도 슬플 것 같지 않았는데…….”
얼굴밖에 별로 아는 게 없는 친구의 죽음이라 해도 슬픔은 가볍지 않았다.
데비는 어떻게든 차분해지고자 애썼다. 머릿속에 로레인의 죽음을 전하던 엉터리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따위 기사가 진실이라고 사람들이 착각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막을 겁니다.”
“어떻게요?”
“이제부터 방법을 찾아야죠.”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격해진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데비는 이전부터 궁금해했던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객원 기자 에이비인가요?”
말없이 데비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마치 무방비한 상태로 있다가 바늘에 콕 찔린 것처럼.
“긍정한 걸로 여겨도 되나요?”
데비의 물음에 그는 침묵했다. 그러나 인제 와서 부정하기엔 그가 무의식중에 일으킨 반응이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의 신부님,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짝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흘러내린 눈물로 축이며 로레인의 마지막 말을 그에게 전했다.
“마지막 순간에 로레인이 제게 한 말이에요.”
데비는 손등으로 눈물의 흔적을 지웠다.
“대체 로레인이 어떤 일에 휘말렸길래 목숨까지 잃은 건가요? 로레인을 데려간 사람들은 또 누구고, 기사를 이따위로 내면서 덮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또 뭔가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임스 스트록과 골든게이트는 무슨 의미죠? 왜 로레인은 하필이면 마지막 말로 『트러블썸』 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구절을 택한 걸까요? 이유를 안다면 대답해 주세요.”
무언가 대답할 듯 말 듯 고민하기만 하고 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대답하지 않을 거면 저 혼자라도 진실을 파헤칠 거예요.”
그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로레인의 억울함은 반드시 풀어 드릴 테니 기다려 달라 하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친구가 죽은 이상 어떻게 깊게 개입하지 않을 수가 있죠?”
“로레인은… 샴발리 백작에게 접근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 시도가 발각되어서 보복을 당한 거고요. 샴발리 백작을 비호하는 누군가가 손을 써서 지금 모든 증거를 지우고 있습니다.”
“샴발리 백작?”
데비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누구죠?”
귀족이나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데비가 샴발리 백작에 대한 궁금증을 보이자, 그는 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라도 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이것 봐요. 제가 말을 한다 해도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더 깊게 알지 않는 편이 당신에게 이롭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지면 돼요!”
“포기하시죠.”
“싫어요! 로레인을 이런 식으로 묻어 버릴 수 없어요! 가슴에 묻어 버린 사람은 저희 부모님으로도 충분해요!”
데비는 발갛게 물든 눈가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몰라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죽는다는 게 뭔지! 열심히 살았는데도 남들이 뒤집어씌운 구정물에 더러워지는 기분이 뭔지!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더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는 게 얼마나 참담한지!”
성벽에 매달려 버린 부모님.
늘 자식 보기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않겠다던 나의 부모님.
사소한 청탁 하나 받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시던 부모님이 반란 역도라니.
세상에 불만이 많은 불순분자였다면 애초에 성실하게 살 이유조차 없지 않았나.
반란 주동자의 딸인데 황명으로 구제되어서 고급 학교까지 나온 은혜를 뼛속 깊이 새기라던 말을 들으며 숨죽여 살아온 지난날들.
같은 아픔을 공유하며 살아왔을 로레인은, 어딜 가나 사람들 사이를 조화롭게 중재해 주던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멋진 꿈도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
그런 로레인이 창부?
스토커 손에 죽어?
“적어도, 그 죽음에 합당한 사유라도 달려야 할 게 아닌가요? 이딴 식으로 덮어 버리면 로레인은 뭐가 돼요? 누가 알아주죠?”
데비의 호소에 고개 숙인 그의 어깨가 보일락 말락 하게 들먹였다.
그 감정이 폭발하지 않게 갈무리한 그가 다짐을 굳힌 듯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샴발리 백작은 클라렌스 후작의 오른팔입니다. 이번에 무언가 일을 벌였고, 로레인은 거기에 말려든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뜻밖의 인물평에 데비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저도 구체적인 내역은 잘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이 목격한 걸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로레인은요… 프렛 님에게 꼭 전해 달라고 한 게 있었어요. 지금 프렛 님은 어디 계시죠? 그 마지막 말은 프렛 님에게 직접 전하고 싶어요. 지금 어디 계신 건가요?”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그게… 지금 당장 나타나기 곤란한 곳에 있어서…….”
‘역시…….’
그 망설임에서 데비는 그가 프렛이 변장한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한 셈이지만, 반대로 데비가 물은 것에 대해 부정하지도 않았다.
‘침묵의 또 다른 말은 긍정이라지.’
게다가 로레인을 직접 뒤풀이 자리에 데려다줄 만큼 친밀한 사이면서도 로레인의 고백을 거절한 그였기에 미안해서 저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로레인의 죽음을 끝까지 파헤쳐 주실 건가요?”
데비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제야 데비는 그에게 로레인이 남긴 열쇠고리를 건넸다.
그가 프렛이라면 누구보다도 로레인의 죽음을 끝까지 파헤쳐 줄 이유가 충분했다.
그래서 데비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그에게 다 털어놓았다.
“그 치안관. 범인을 알아봤나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인상착의를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특정 직업군이 유추되는지를 묻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우리 잡지사에서 패션도 다루기 때문에 아는데 로레인이 걸쳤던 건 분명히 더플코트예요. 두께가 두껍고 가슴 주머니에 금박 자수가 있는 모직 제품이요.”
데비의 말에 그가 중얼거렸다.
“해군이군요.”
“네?”
“그 금박 자수가 혹시 월계수가 둥글게 깃발을 감싼 형태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데비의 말에 그가 대꾸했다.
“거친 모직 더플코트는 해군에서 보급하는 군용 코트니까.”
“에이. 설마요. 해군인 거 다 드러나는 코트면 그걸 입고 로레인이 광고하듯 도망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로레인이라면 힌트를 남기려고 일부러 걸치고 나왔을지도요.”
데비로부터 넘겨받은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무엇인지 아세요?”
열쇠도 없는 열쇠고리.
용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그것을 받아 든 괴도는 손바닥으로 맞잡더니 서로 반대 방향으로 손목을 회전시켰다.
끼릭.
그러자 아무리 봐도 구조를 알 수 없던 열쇠고리의 한쪽 면에서 열쇠 끝부분이 톡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