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아니면 프렛 님 주변이라든가, 사장님에게도.”
메릴에게 열쇠고리 이야기를 생략한 만큼 데비는 에둘러 물었다.
“중요한 이름이야?”
데비는 큰 기대 없이 물었다. 보아하니 메릴은 호텔에서 꽤 오래 일해 온 듯하니 작은 힌트라도 얻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샬로트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무언가가 이 주변에 있었는지 생각나는 대로 말해 줘.”
“음…….”
메릴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모자 가게 리나의 동생은 이름이 샬로트가 아니라 샤를롯이라 아닐 테고. 기억나는 샬로트는 하나뿐인걸. 프렛 님이 어릴 때 샬로트라는 이름의 다섯 살 터울 누나가 있었대.”
메릴의 말에 데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그 누나가 실종되는 바람에 찾으러 다니다가 본인도 인신매매 당해서 이 길로 빠졌다지 아마. 사장님의 눈에 띄어 지금까지 쭉 총지배인 일 하면서, 창부들 보면 혹시 샬로트라는 사람 아느냐고 묻곤 했었지. 지금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똑똑.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매니저님, 거기 계신가요?”
메릴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곤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데비, 미안. 내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나 봐.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데비는 그 말에 서둘러 자신의 명함을 메릴에게 건넸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출판사로 전화 줘.”
“데비 존스 씨? 카운터에 전화가 와 있더군요.”
호텔 직원이 데비에게도 말을 전했다.
“누가요?”
“출판사라던데요.”
데비는 그 말에 부랴부랴 카운터로 갔다.
"데비 양!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야 받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루이스 팀장의 열받은 목소리가 작렬했다. 취재하게 외근 나가도 되냐고 했을 때 허락한 게 자신이면서.
"사장님께서 한참 찾으셨잖아!"
“네? 사장님이 저를요? 지금 어디 계신데요?”
블레이크를 만나려고 호텔까지 찾아왔건만 엉뚱하게도 블레이크는 잡지사로 갔던 모양이었다.
왜 나를 찾아왔지?
* * *
데비가 출판사로 돌아올 무렵은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블레이크는 그레이로서 늘 앉아 있던 책상 위에 걸터앉아 창밖으로 저 멀리 비치는 황성의 첨탑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 사이로 푸른 지붕이 금빛으로 물든 광경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말렸어야 했어.’
생각해 보면 조짐을 읽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로레인이 프렛의 복수에 일조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던 때처럼.
― 프렛 님에게 저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온실의 화초가 아니에요. 저는 저만의 쓰임새가 있을 거라구요.
프렛에겐 클라렌스 후작, 나이젤에게 뿌리 깊은 원한이 있었다. 샬로트를 죽인 게 나이젤의 둘째 아들 에릭이라지만 그걸 덮은 건 나이젤이니까.
하지만 프렛은 곁을 내 달라 하는 로레인에게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고 했다.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도 자격도 없다고.
― 연인이 될 수 없다면, 동료라도 되고 싶어요.
프렛도, 블레이크도 그녀의 합류를 거절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렇게 우겼다. 그 마음만 고맙게 받고 그녀의 개입을 한사코 막았건만.
굳이 다른 스폰서를 구해야 할 필요가 없는 볼룹타스의 간판 무희인 데다 능력도 출중했기에 아쉬울 게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빌어먹을 자식이 로레인에게 스폰서 제안을 했다 해도 거절한 줄로만 알았다.
…은밀하게 그 요구에 응할 줄은.
샴발리 백작이 나이젤의 머리나 마찬가지라는 정보는 로레인 앞에서 흘리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정보를 손에 쥐고 있단 자만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설령 로레인이 엉뚱한 짓을 하더라도 소문에 민감하니 알게 될 거라고.
하지만 당사자인 로레인이 입을 꾹 다물자 아무도 몰랐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하아.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실제로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져서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도 마음의 통증이 더 심했다.
부상은 당시 데비의 말을 듣고 급습한 아지트에서 벌어진 격투의 흔적이었다.
프렛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간다며 그의 명령을 어기고 범인들을 따라가 소식도 끊겼다.
이젠 프렛만이라도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품에서 로레인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열쇠고리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달깍.
숨겨진 열쇠 면이 튀어나오며 로레인의 글씨가 분명한 흔적이 드러났다.
샬로트 -PB0859S1434
중앙은행의 시크릿 금고 열쇠이지만, 메모가 그 ID와 비밀번호는 아니다.
시크릿 금고의 경우 ID와 암호는 한 쌍의 대치되는 문장이었다. 문법을 귀족의 소양으로 여기는 만큼, 암호는 문법에 맞아야 했다.
ID는 ‘어둠의 등불’이라든가 ‘교활한 뱀’.
암호는 ‘세상을 심연에 빠뜨리리라’ 내지는 ‘대지를 타락시키리라’.
해석해 보면 ID는 꾸밈말과 명사의 구조, 암호는 목적어로 시작하여 이후 동사나 형용사의 형태로 서술어가 구성되어 있었다.
로레인이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데비가 전한 말.
‘신부님,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은 신부님이란 단어 앞에 꾸밈말이 하나 들어가야 ID와 암호의 요건에 맞았다.
그러니 이 메모는 다른 관점으로 봐야 했다.
샬로트. 프렛의 가슴에 한으로 남은 이름.
PB는 서류 넘버링 할 때 축약어 같았다. 소위 미해결로 남겨진, 귀족들의 치부나 마찬가지인 사건을 흔히 PB라 불렀다.
0859는 관청 기호. S는 비밀 서류. 1434는 서류 번호.
미해결 사건을 처리하는 곳은 세 곳이었다.
치안청, 법원, 감찰원.
해석을 해 보자면 샬로트는 최종적으로 행방불명자, 생사 확인 불가로 처리되었다. 치안국에서는 브리핑조차 하지 않은 채 사건을 단순 가출로 처리했다.
하지만 샬로트의 문건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것은, 내부에서는 그 내역을 알고 대외적으로는 보여 주지 않을 누군가의 교환 카드나 마찬가지였다.
샴발리 백작은 클라렌스 후작의 그림자와도 같아서, 그가 망한다면 혼자 살아남을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로레인이 목숨을 걸고 가져다준 이 증거물에서는 샴발리 백작이 클라렌스 후작을 언젠가 날려 버리기 위한 문건을 작성하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견고해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갔다는 신호지.’
로레인…….
그 누구도 캐내지 못한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준 건 고맙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얻을 내용은 아니었다.
창밖으로 데비가 출판사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에 꽂힌 것인지 곧바로 오는 게 아니라 천천히 지나가는 마차 한 대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출판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편집장용 의자에 고쳐 앉으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대외적으로 다친 건 그레이이지 그가 아니었다.
그러니 최대한 괜찮은 척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아 올렸다.
그는 아픈 옆구리에 손을 얹고 욕을 내뱉었다.
“크흡.”
고작, 혼외자를 낳아 놓고 그 잘못을 쉬쉬하기 위해 친정에 온갖 혜택을 주면서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한 여인이 원망스러웠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국민이 아닌 혈연 몇을 위해 온갖 비리를 눈감은 그녀가 초래한 지옥이 붉게 타오르는 상상을 하며 블레이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세운 성 위에 저를 앉혀 주면, 고마워할 줄 아셨습니까?”
블레이크는 지금 이 순간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자신이라는 잘못 하나를 덮기 위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를 저주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똑똑똑.
편집장실 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들어오세요.”
블레이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데비를 맞이했다.
“절 찾으셨다고요?”
머뭇거리며 데비가 문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그녀는 그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길이 엇갈렸나 보군. 집사에게 연락받았는데 내 명함을 잃어버렸다지.”
블레이크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책상 위로 쓱 밀었다.
“루이스 팀장님께 들었어요. 그레이 편집장님께서 교통사고로 입원하셨다고요. 꼭 여쭤봐야 할 게 있는데 연락을 어디로 해야 할지 몰라서요. 사장님께 여쭤보려고 했죠.”
데비는 책상 위에 놓인 그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 화려한 금박이 박힌 명함이었다.
“칼럼 준비가 덜 되어서요. 이번 호 마감은 급하고, 한 번만 칼럼을 휴재할 수 없을까요?”
이전에 그레이가 줬던 명함이 생각나서 뒤집어 보니, 뒷면에 그레이의 이름이 없다 뿐이지 그전에 받은 것과 거의 유사했다.
“그런 문제는 편집장 대리와 협상해.”
블레이크는 원칙을 말했다.
“나는 출판사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으니까.”
문이 살짝 열린 틈새로 루이스 팀장의 시선이 마주쳤다가 사라졌다.
칼럼 휴재는 안 된다고 시위하는 듯했다. 데비는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데비를 보자 자신과 거리감을 두려는 묘한 태도가 느껴졌다. 그는 그녀와의 심리적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데 데비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그레이가 나인 걸 아는 거 같지도 않고.’
괜히 처음부터 특별한 지인들에게만 주는 양면 인쇄 명함을 데비에게 줬던 게 아니었다.
그때부터 자신이 블레이크이자 그레이라고 힌트를 줬건만. 지금도 여차하면 문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게 문고리를 잡고 서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도통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취재 핑계로 이것저것 묻고 다녔다며?”
벌써 호텔에서의 일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그만해. 프렛에게 맡겼으니까 알아서 하게 놔둬.”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데비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하지 말란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가요? 친구의 죽음인데요?”
블레이크의 눈에 그날의 로레인과 데비의 모습이 겹쳐졌다.
개입하지 말라는 말에 그러겠다 해 놓고 기어코 자신이 뜻한 바를 관철시키겠다는 눈빛이 그의 가슴을 찔러 왔다.
― 밤샘 연습을 할 거예요. 클라크와 밀드레드가 늘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로레인은 경호원이 곁에 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 샴발리 백작이 추근거린다던데. 그 인간은 점찍은 여자는 반드시 손에 넣고 말아. 특히나 프렛이 출장 중이니 더욱 조심해.
블레이크는 그렇게 말렸다. 그러나 로레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저를 탐내지 않는 남자도 있던가요? 아. 프렛 님만 제외구나. 후후.
로레인은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 저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어딜 가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잖아요. 또 추파를 보낸다면 그땐 도움을 요청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 연극 연습을 하러 간 줄 알았다. 하다못해 붙여 놓은 경호원들이 보고해 줄 줄 알았다.
그런데 경호원들은 그 보고를 누락했고, 로레인은 제멋대로 샴발리 백작을 만났다. 그게 바로 이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그날, 바크란 남작과 헨리에타가 로레인이 있어야 할 곳에서 나왔다.
경호원 클라크가 있어야 할 대기실 출입문 앞에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클라크에게 유사시 누르라고 달아 줬던 호출 신호용 배지가 바크란 남작의 가슴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블레이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