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스 패치의 은밀한 특종-38화 (38/120)

#038

“엇! 편집장님 나오셨습니까?”

그레이의 등장에 루이스 팀장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별일 없었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래서 고개를 홱 돌려 보니 데비가 그를 째려보다가 후다닥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로레인이 납치되던 날 중간에 제멋대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니 데비가 아직 그를 원망하리란 건 예상했던 바이지만.

‘그래도 째려보는 건 좀 억울한데.’

루이스가 허둥지둥 뒤따라와서는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그레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출간한 지난달 잡지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내밀었다.

“그만 가 봐.”

그레이는 루이스가 편집장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책상 한편에 잡지를 던져 놓고는 의자에 몸을 내던지듯 주저앉았다.

“후우.”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잡지를 쳐다보았다.

‘잠이나 자고 싶다.’

별로 살펴보고 싶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가 자리를 비운 와중에 남은 팀원들이 얼마나 일을 잘 수행했는지 채점해야 할 시간이었다.

무난했다. 딱히 재밌지도 그렇다고 실망스럽지도 않은 딱 중간 수준의 특집 기사와 언젠가 한 번쯤은 봤던 것처럼 식상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칼럼이 펼쳐졌다. 읽자마자 그레이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바텐더와의 화려하고 위험한 하룻밤.」

제목부터 불쾌했다.

경호원으로부터 보고 들은 바로는, 데비가 퇴근 후 라비앙로즈 술집으로 들어가더니 아침이 되어서야 나왔다고 했다.

‘바텐더라니. 순수하게 인터뷰로 칼럼 내용을 작성하라고 그토록 설득했건만 내 말을 무시하고 또 직접 경험하러 간 건가?’

갑자기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일었다. 그 와중에 눈까지 흐려진 그레이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 손등으로 눈을 쓱쓱 비볐다.

후우. 후우.

고작 두세 쪽짜리 글인데 읽기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편집장이니 무엇이 출간되어 나갔는지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데비가 말했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고. 그 둘을 분명하게 구별해 달라고.

「…문 하나를 넘어서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어둡고 흐리지만 황금색의 조명이 기다리고 있다.

테이블은 어느덧 저녁노을과는 다른 주홍빛으로 물들고, 바텐더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진열장의 술병은 보라색으로 빛난다. 그리고 친절한 그가 있다.

내가 누구든 상관없다.

손님으로 오는 당신은 오늘 충분히 수고했고 그 수고를 나는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으라 권한다.

등을 기댈 수 있는 편안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지만, 나는 바텐더와 눈을 맞출 수 있는 바에 다가간다.

그와의 대화가 흥미로워 한참 동안을 떠들다 보면 결국 대화를 주도하는 건 나라는 걸 깨닫는다.

그는 그저 웃으며 잠자코 들어 준 것에 불과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 줄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푹신한 소파에 앉은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어느새 우리의 시선은 보다 농밀해진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닿고, 내 시선은 굳게 닫힌 셔츠의 단추 하나를 푸는 그의 손에 이르렀다.」

후욱?

그레이는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개별 테이블과 소파가 있고 바텐더가 있는 바. 입구의 황금색 조명, 안쪽으로는 주홍색 조명과 진열장을 비추는 보라색 조명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알렌이 바텐더로 있는 술집 ‘라비앙로즈’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었다.

라비앙로즈에서 하루 외박했어도 거기에 깊은 의미를 두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익숙한 묘사가 나오자 그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데비가 수작 부리듯 웃음을 던지고 있는 걸 마주 보며 음흉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알렌이 눈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길을 허락했다.」

부우우욱!

그레이는 저도 모르게 그만 잡지를 반으로 쪼개 버렸다.

‘고문받는 것도 아니고, 안 읽으면 그만이지.’

그레이의 호흡이 가빠졌다.

‘어떻게 알렌이랑…….’

고작, 칼럼을 쓰겠다고 이렇게 몸을 함부로 내던질 수가 있나.

알렌이랑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지 않나.

그는 씩씩거리며 찢어진 잡지의 단면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잡지가 저절로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 욕하는 칼럼에서조차 말했잖아. 사랑 없는 관계는 하고 싶지 않다고.’

그의 믿음을 배신했다. 데비가.

그는 세상을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텅 빈 눈으로 잡지를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분노에 차올라 두 동강 난 잡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박 찢었다.

* * *

“여기야, 여기!”

제인이 손을 번쩍 들어 반가워했다. 데비는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간신히 제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제인! 한참 헤맸잖아. 눈여겨보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를 뻔했어.”

“내가 말했잖아. 사람들 제일 많이 가는 방향으로 졸졸 따라오면 된다고.”

어느새 친한 친구처럼 스스럼없어진 제인은 메뉴가 적힌 종이를 데비에게 내밀었다.

“비싼 거 사 준다니까 굳이…….”

데비가 종이를 받아 들며 투덜거렸다.

“난 여기 음식이 제일 좋아. 싸고 푸짐한 데다 맛도 좋고.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이 바글바글하지.”

제인이 자랑스럽다는 듯 가게를 쓱 훑어보았다.

“와 보고 놀랐어. 밖에 줄이 길어서 음식은 먹지도 못하고 대기만 하다가 식사 시간이 다 지나갈 줄 알았거든.”

데비의 말에 제인이 쑥스럽게 웃었다.

“단골이라 미리 예약해 뒀어. 원래 예약 안 받는 시간대인데.”

“다행이야. 그럼 음식 추천해 줄 수 있어? 어느 게 제일 맛있어? 저렴해서 여기 있는 메뉴 다 사 줄 수도 있겠다.”

“아냐, 돈 아껴야지. 배불러서 다 먹지도 못해. 이 집 처음 와서 메뉴 고르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요리는…….”

“나 돈 많아! 사례한다니까. 고작 이 정도로 되겠어?”

데비는 미안한 표정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제인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고작 경험담 조금 들려 준 것뿐인데 뭘. 그런 건 맥주 한잔 기울이면서 심심풀이 삼아 할 수도 있는 건데 뭘. 돈 주고 인터뷰하면 오히려 내 경험을 그 값에 판 거 같아서 기분이 별로야. 난 이 정도의 보답이 딱 좋아. 어때, 이번 잡지 반응은?”

제인이 두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다행히 반응이 좋았어. 낭만적이었대.”

“낭만적?”

제인이 꺄르르 웃었다. 주문했던 요리도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치즈와 햄이 오븐에 구워져 먹음직스럽게 어우러진 빵과 큼직하고도 노릇한 닭요리의 냄새가 정말로 향긋했다.

“그래서, 알렌 씨랑 본격적으로 사귀는 거야?”

데비의 말에 제인은 귓불을 붉히며 눈을 새침하게 내리깔았지만 입꼬리는 기분 좋게 휘어져 있었다.

“칫솔이랑, 간단한 소지품을 알렌 씨의 집에 가져다 놓았어.”

“잘됐다, 정말.”

데비는 웃으며 기뻐해 주었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인을 찾아갔었다.

혹시라도 제인이 자신의 성 경험담을 값싸게 취급당했다고 불쾌해할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의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제인은 기분 좋게 응해 주었다.

‘덕분에 살았지, 마감도 무사히 넘기고.’

제인과 친해진 건 덤이었다.

“수도에 올라온 이후 늘 밥을 혼자 먹어야 했는데 너랑 같이 먹으니까 기뻐.”

“요즘 호신술 배운다면서?”

“퇴근하고 바로 30분만 투자하면 돼. 마침 체육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

“그래서, 로레인 건은 어떻게 되었어?”

“물증을 가져오래. 증언은 믿을 수 없다나. 위증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을 받는 건지 기억하라고 엄포를 놓더라.”

“하아. 짜증 나.”

제인은 분풀이하듯이 고기를 입에 잔뜩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뜻 모를 소리를 내며 입을 우물거렸다.

데비가 쳐다보았을 때 제인은 눈물을 조용히 삼키고 있었다.

“나한테도 참 고마운 친구였는데.”

제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만. 로레인이라면 아마도 먹고 힘내서 그 기운으로 진실을 밝혀 달라고 씩씩하게 말했을 거야. 그러니 더 이상 약한 소리 하지 말자.”

데비는 일부러 힘주어 포크로 고기를 찍었다.

“그래. 로레인이라면 그랬을 거야.”

데비는 식사를 이어 가며 제인이 기억하는 로레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간간이 수첩에 메모하는 걸 잊지 않았다.

…로레인이 모두로부터 잊히기 전에, 사람들이 기억하는 로레인의 모습을 글에 담을 거야. 적어도 글 속에서는 생생하게 살아 있게.

* * *

“루이스 팀장은 연극배우 카셀 아비올리 인터뷰 및 화보 촬영 건 책임지고, 벤자민 펠렛 씨는 신상 성 생활용품 사용기, 데비 존스 씨는 드랙 퀸 콘테스트 취재 건을 맡는 거 잊지 말고 결과물을 가져오십시오.”

다음 달 잡지 기획 회의가 끝나고 데비는 수선을 맡긴 스튜디오 촬영용 의상 소품들을 찾으러 일어섰다.

3층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2층 스튜디오에서 애슐리가 뛰쳐나왔다.

그런데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데비의 인사도 받지 않고 뛰쳐나가는 걸 보니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 듯했다.

살짝 열린 2층 스튜디오 안을 힐끔 들여다보던 데비는 교정 직원 에밀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 있어요?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일이 있긴 하지만… 말해도 되나.”

머뭇거리는 에밀의 곁에서 사진작가 블랙이 한마디 했다.

“라임 출판사 문예 공모전에 애슐리 양이 응모했었는데, 떨어졌어요. 글쓰기 기초부터 다시 배워 오란 혹평을 덤으로 받고. 그런데 애슐리의 소설과 비슷한 소재의 글이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로 올라 버렸지 뭡니까. 표절이라고 신고했는데 원문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고 표절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고 열받았어요.”

“네? 그게 말이 돼요?”

“애슐리 양은 열정은 넘치지만 작문이 좀 엉망이긴 해요. 그래도 주요 줄거리가 그대로 빼다 박은 듯 닮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거기다 원문 수준이 낮아서 소설이라 할 수 없는 산문이라고 되려 혹평만 들었으니 충격받아서 저래요.”

“대체 그 베스트셀러라는 책 저자가 누군가요?”

데비의 말에 사진작가 블랙이 책상에서 책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거요.”

데비는 그 책의 저자가 ‘에일리 플레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내 시를 도둑질하고도 모자라서 애슐리의 소설을 훔쳤구나.’

출간된 날짜를 보니 1년 전.

그간 애슐리가 빼앗긴 자신의 글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고소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애슐리 양의 원문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블랙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 놔뒀는지는 애슐리 양만이 알겠죠.”

데비는 그 옆에 있던 인정사정없이 구겨진 신문 쪼가리를 쫙 펼쳤다. 그곳엔 에일리 플레르의 사진이 아름답게 걸려 있었다.

“최종 판결, 표절 누명으로부터 벗어난 천재 문학가.”

“…아무나 글을 쓴다고 다 소설이 되지는 않죠. 적어도 기초 문법 정도는 제대로 익히고 글을 썼으면 하는 바입니다. 그런 습작하고 어찌 비교할 수 있나요? 세상에 비슷한 플롯은 널렸고, 앞날이 창창한 창작인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이를 읽은 데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바닥에서 라임 출판사 평판이 바닥이에요. 공모전 한다고 해 놓고 초보 작가들 아이디어만 쏙 빼먹고 버리기 일쑤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라임 출판사 사장의 형이 교육부 장관이라더군요. 높은 사람 비호를 받으면 다 그렇죠, 뭐.”

사진작가 블랙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데비는 애슐리의 일이 자신의 일처럼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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