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스 패치의 은밀한 특종-42화 (42/120)

#042

데비는 용기를 모두 쥐어짜 그에게 물었다.

“저는 프렛 님이 객원 기자 에이비 님인 줄 알았는데요.”

“아닙니다.”

데비의 눈동자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프렛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렇게 충격받은 얼굴을 하실 필요까지야.”

그는 프렛 님이 아니야.

불길한 기분이 엄습해 왔다.

이렇게 나른하고 교태로운 눈빛이 아니야.

출판사 내부를 잘 알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 옷을 항상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하게 입고 묘한 체 향을 지닌 사람.

날카로운 기사를 작성할 수 있을 만큼 지성을 갖춘 사람.

그러니까, 대체 누구란 말야?

벤자민 기자님이나 루이스 팀장님은 아니야. 그분들 글 스타일이 있는데. 우리 잡지사에서 날카로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데비의 뇌리에 떠오르는 건 그레이였다.

설마, 편집장님이 그 사람인 건 아니겠지.

결벽에 가깝게 옷을 구김 하나 없이 입는 출판사 내 인물은 아무리 떠올려도 그레이밖에 없었다. 데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그레이라면 오늘 사장과의 데이트에 가라고 일찍 보내 주기까지 하지 않았나.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어… 제가 실수한 겁니까?”

프렛이 데비의 표정을 살피더니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 난감한 얼굴마저 사람을 홀리는 듯 묘한 마성을 띠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정말 그레이 편집장님이 흰 장갑의 괴도이면 어떻게 해?

나 회사 어떻게 다니지?

데비의 얼굴이 시시각각 카멜레온처럼 붉어졌다 파래졌다 희게 질렸다를 반복했다.

심지어 칼럼을 검수하기까지 한 사람인데!!

“멀미…입니까?”

프렛이 운전하며 데비의 안색을 자꾸만 살폈다.

“속이 울렁거릴 땐 사탕이라도 입에 물고 있으면 조금 나아집니다.”

프렛은 한 손은 운전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 든 레몬 사탕 상자를 꺼내 흔들었다.

곧 데비의 입 안에 사탕 한 개가 쏙 날아들었다.

“여기서 데비 양이 돌아간다고 하면 저로서는 오히려 반길 만한 일입니다만.”

“어째서요?”

“저도 솔로인데 사장님만 솔로 탈출이라니.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제게도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준다면 모를까. 사장님은 뭐든 저와 발맞춰 나가겠다고 약속했었는데 혼자 뛰쳐나가면 눈이 시리거든요.”

“무슨 일인데요?”

“비밀입니다.”

프렛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아. 보란 듯이 배신하고 데이트를 하시겠다니… 이대로 가로등이라도 들이받고 못 가게 하고 싶지만 뇌물을 받아서 그것도 못 하겠군요. 잘 먹겠습니다. 사실은 레몬 맛 사탕을 무척 좋아합니다.”

프렛은 한 손만 써서 묘기에 가깝게 레몬 사탕 상자를 손끝으로 뱅그르르 돌리더니, 살짝 던졌다가 잡는 순간 사탕 상자를 털듯이 열어 그중 하나를 입으로 던져 넣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손만으로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데비는 방금 고민하던 것도 잊고 손재주에 홀려 멍하니 그의 손만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별거 아닙니다.”

데비는 언젠가 출판사 직원들이 말한 ‘프렛이 분위기를 잘 띄운다’라는 말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진짜 신기해요. 전 두 손으로 상자를 여는 것도 가끔은 쉽지 않던데 어떻게 그렇게 하죠?”

데비가 그의 손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데비의 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데비는 영문을 몰라 몸을 움츠렸다.

그는 데비의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는 듯하더니 딱 소리와 함께 맨손에서 붉은 꽃 한 송이를 피워 내 데비에게 툭 던졌다.

“이런 잔재주 말이죠?”

데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트릭을 알면 별거 아니에요.”

다가오는 손은 분명히 빈손이었다. 데비가 그 꽃을 신기한 듯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피자 그가 말했다.

“자, 이제 다 왔네요. 내리실 시간입니다.”

어느새 뮤지컬 극장 앞이었다. 그제야 데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참. 난 고민 중이었지.

데비가 데이트할 기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프렛, 여기는 어쩐 일이지? 난 베젤에게 맡겼는데.”

기다리고 있던 블레이크가 차 곁으로 다가왔다.

“일이 있어서 제가 대신 모셨지요. 즐거운 데이트 되십시오.”

프렛은 묘한 비음이 섞인 밝은 목소리로 손을 한번 흔들었다.

그리고 둘만 남겨졌다. 데비는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그는 작정하고 차려입었는지 차림새가 화려했다. 평소에도 잘 입고 다니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그의 슈트는 더욱 세련되어 보였다.

구두며 시계 포켓으로 살짝 비치는 손수건이며 타이 핀에 부토니에까지 모두 한 세트로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데비는 그의 빳빳한 소매 깃과 칼라를 쳐다보았다.

사장님도 편집장님처럼 구김 하나 없이 단정한 차림이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한 번 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내 눈을 피하는 거지?”

데비는 심각한 표정으로 프렛이 준 꽃송이를 만지작거렸다.

객원 기자 에이비가 그레이 편집장님이나 사장님 중 하나라면 둘 다 끔찍한데…….

그러자 그 꽃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블레이크가 휙 빼앗아 어깨 너머로 던졌다.

“보나 마나 프렛이 준 거로군.”

“앗! 선물이!!”

그제야 데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신경 쓰지 마. 사방에 똑같은 꽃 잔뜩 뿌리고 다니는 녀석이니까.”

그가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었다.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이 장갑이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라면.

키도, 눈높이도, 손동작도.

데비는 소름이 오소소 일었다.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데비는 순간적으로 스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건가?”

그의 물음에 데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일하다 와서 조금 피곤한가 봐요.”

데비는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연장만 수십 개가 주르륵 모여 있는 이 거리는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첫 데이트를 계획할 당시 데비는 그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예약하기 힘들다는 공연 보기를 선택했고 블레이크는 보란 듯이 그럼 보고 싶은 공연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러자 데비는 잡지에 나왔던, 블레이크의 염문 상대들이 배우로 출연하는 공연을 정리해 ‘보고 싶은 뮤지컬’이라는 목록으로 만들어 블레이크 쪽에 전달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 채 하나를 고르자 데비는 자신이 꾸민 폭탄 같은 상황들이 어떻게 블레이크를 난감하게 할지 기대감이 차올랐다.

전 여친 앞에서 건전한 데이트가 될 리 없어.

데비는 데이트 자체보다 전 여친을 만난 그가 얼마나 흐트러질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VIP 좌석에 가서 앉은 순간 누군가가 다가왔다.

“블레이크!”

붉은 머리의 눈부신 미녀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데비는 팸플릿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주연 배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왔군요! 세상에나! 어두운 곳은 질색하더니!”

그녀는 남들의 이목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지 펄쩍 뛰듯이 블레이크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비비안, 그만! 일행이 있어.”

당황한 블레이크가 그녀를 떼 냈다. 데비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블레이크를 흘겨보았다.

비비안은 블레이크의 말에 데비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블레이크를 향해 교태로운 미소를 흘리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 덮칠 수 있을 때 바로 덮쳐야죠. 안 그래요? 웁-!”

비비안은 무대에 오르기 위해 한 진한 메이크업이 지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주둥이를 그의 뺨에 팍 찍었다.

하하.

데비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센 반응에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비비안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걸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비비안이 그를 덮쳤으나 그 입술이 닿은 것은 블레이크의 장갑이었다.

“장난은 그만. 순진한 아가씨가 놀라고 있지 않나.”

“너무해. 어떻게 한 번을 안 넘어가 줘요?”

비비안은 데비를 째려본 후 블레이크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꿀 같은 아르바이트였는데. 이젠 보수 안 줘도 응해 줄 수 있다구요. 저도 주연 배우 자리 꿰찬 지 오래라 오히려 제가 아르바이트 비용을 드릴 수 있어요.”

비비안은 입술을 삐죽이며 블레이크의 넥타이를 휙 잡아당겼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장갑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손수건으로 박박 문질러 닦을 뿐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쪽은 새로 고용한 알바?”

“직원.”

그 말에 비비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젠 직원까지 두고 일 시켜요?”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고.”

“칫.”

비비안은 삐진 척 코웃음을 치더니 데비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그만둘 거면 나한테 알려 주고 그만둬요. 내가 그 자리 꿰차게.”

“네? 무슨 말씀이시죠?”

데비는 비비안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주연 배우면 주연 배우답게 제자리로 가. 공연 시작 5분 전이야.”

냉랭한 블레이크의 말에 비비안은 가짜로 우는 시늉을 하더니 데비에게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새로 고용한 직원님, 일만 하지 말고 저 인간 꽉 잡아요. 확 때려눕혀서 끌고 가도 좋고.”

데비는 당혹스러웠다. 헤어진 전 여친과의 트러블을 기대했건만 고용주와 전 아르바이트생을 보는 듯한 풍경이라니.

심지어 비비안은 곧바로 무대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가는 중간마다 객석에 앉은 관객의 무릎에 걸터앉기도 하고 뺨에 키스하기도 하고, 포옹도 해 가며 천천히 지나갔다.

“무대를 보러 와 줘서 고마워요, 관객님.”

주연 배우의 살가운 스킨십에 객석이 온통 술렁였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퇴장하기 전까지도 그녀는 호들갑스럽게 손바닥에 입술을 찍은 후 사람들에게 훅 불어 날리는 시늉을 하며 감독에게 질질 끌려갔다.

그녀가 무대 뒤로 사라지자마자 뮤지컬의 막이 올랐다.

데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무대만 쳐다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채 데비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블레이크와 시선이 마주쳤다. 블레이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보고 싶었던 뮤지컬이라면서? 내 얼굴에 집중하지 말고 무대에 집중해.”

그의 말에 데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휙 돌렸다.

뮤지컬의 내용은 가난하지만 젊은 두 남녀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극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빠져들어 감상하던 중이었다.

쓰윽.

갑자기 블레이크가 움직였다. 공교롭게도 좌석을 짚고 있던 데비의 손이 그의 몸에 스쳤다.

데비는 그가 스킨십을 시도하는 줄 알고 화들짝 놀라면서 손을 반대쪽으로 치웠다. 그러나 그는 그저 다리를 반대로 꼬아 앉았을 뿐이었다.

둘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에헴.

데비는 헛기침을 하며 그 자세로 꼼짝하지 않고 있으려 했다.

그러나 점차 치우친 허리가 불편해져서 아까 짚었던 자리로 슬그머니 손을 다시 얹고 싶어졌다.

턱.

데비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에 닿은 건 시트가 아니라 그의 손등이었다.

데비가 불에 덴 듯 손을 번쩍 들자 블레이크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속삭였다.

“내 손이 잡고 싶었나? 잡아도 괜찮아.”

데비는 뻘쭘한 표정으로 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얹었다.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서 난감했다.

“손잡는 건 건전한 데이트에 들지 않나?”

그 말에 데비는 무릎 위에 얹은 손만 꼼지락거리며 각 잡고 뻣뻣하게 허리를 세워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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