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스 패치의 은밀한 특종-63화 (63/120)

#063

난데없는 메릴의 호출에 의아했지만 데비는 퇴근 후 술집 라비앙로즈에 들렀다.

“오랜만이에요, 데비 존스 씨!”

바텐더 알렌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요즘 하도 얼굴 보기 힘들어서 단골집을 다른 곳으로 바꾼 줄 알았어요.”

알렌이 눈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흘겨보았다.

“일이 많았어요. 그러는 알렌 씨는요? 어쩐지 살이 빠진 것 같은데요.”

“하하. 그래 보이나요?”

알렌은 그저 웃기만 하더니 데비에게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메릴 오스몬드 씨께서 예약하신 좌석입니다. 파라솔과 테이블 벤치가 있는 옥상 문 열쇠 여기.”

데비는 그 열쇠를 받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비밀스럽게 부른 걸까?’

난데없이 로레인 추모 모임이라니.

데비는 계단을 올라가다가 옥상에 채 가기도 전에 계단 밑 빗자루 따위를 넣어 두는 작은 창고의 문이 쓱 열리는 바람에 기겁했다.

“쉿! 이쪽이야.”

메릴이었다. 데비는 손에 쥐었던 열쇠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메릴이 손짓하는 대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작은 창고 벽면은 손으로 밀자 빙글 돌아 다른 통로로 연결되었다.

“아……!”

그곳엔 탁자 하나와 벽장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문서가 꽂혀 있었다. 정보를 모아 두는 곳으로 보였다.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데비 존스 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탁자에 걸터앉은 프렛과 처음 보는 얼굴의 몇몇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 VIP와 교제 중이시라죠. 앞으로 그분의 알리바이에 깊게 관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비가 쳐다보고 있자 프렛은 다른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데비라고? 오랜만이야. 말하지 않으면 몰라보겠어.”

한 남자가 반갑게 손을 들었다. 그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눈을 갸름하게 뜨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기억이 번뜩 되살아났다.

“혹시 스티브? 카지노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던……?”

정답이 맞았는지 그가 환하게 웃었다.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걸.”

스티브는 여전히 주근깨투성이였지만 순박한 눈매에 주먹코가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카지노 딜러라는 직업과는 잘 매치가 되지 않았지만.

“다들 나더러 역변의 아이콘이라고 하던데.”

스티브가 쑥스러운지 머리를 문질렀다. 가장 작고 볼품없었던 소년 스티브가 지금은 190에 육박하는 거구가 되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메릴이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못 알아봤을 거야.’

반가움에 마냥 기뻐할 새도 없이 데비는 그 옆의 키 작고 빵모자를 눌러쓴 안경남을 발견했다.

테리움의 동창생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살폈지만 어쩐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대체 얼마나 고생했길래…….

섣부르게 인물을 추측했다가 상대가 실망할 것 같아서 고민스러워졌다.

“이쪽은 로난 마르티니.”

스티브가 그 안경남의 어깨를 툭 치고는 어깨동무했다. 데비는 기억을 더듬다가 화들짝 놀랐다.

“로난? 사만다의 오빠 로난 맞아요?”

그러자 로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때는 그랬었지. 이제 사만다는 죽고 없지만. 폐렴이었어.”

사만다의 안부를 물으려던 데비는 한발 늦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혹시라도 오해하거나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게 사인까지 밝혔으나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때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향 친구와의 잡담은 회의가 끝난 다음에 하죠.”

프렛의 채근에 다들 탁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다들 프렛과의 이런 만남이 처음은 아닌 듯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데비가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두어 명은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가 봐도 힘깨나 쓰는 근육질의 험상궂은 남자와 그와는 대조적으로 빛도 못 보고 공부만 한 것처럼 허여멀건 안경남이 데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프렛이 입가에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들여다보고 있던 보고서를 정리했다.

“우리는 주로 VIP의 보조를 맡고 있죠. 설마하니 VIP께서 도둑질에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까지 안 걸리고 남의 집 담을 타 넘었다고 믿고 계시진 않을 테고.”

아무래도 프렛이 말하는 VIP란 블레이크를 일컫는 것 같았다.

“우린 각자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메릴 오스몬드 씨는 무희와 접대부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모아 주고 있고 스티브 안톤 씨는 카지노를 드나드는 고객들이 넘기는 정보를, 로난 마르티니 씨는 우리의 작전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프렛이 설명할 때마다 호명된 자는 손을 살짝 들고 데비와 시선을 맞췄다.

“이쪽은 사채 시장 쪽 동향을 파악해 주고 있는 빌과 회계 분석 전문 에클레어 마르시아스. 클라렌스 후작가가 망하라고 매일 밤 저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랄지.”

프렛은 정리한 보고서를 한쪽에 내려놓고는 한 팔로 턱을 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평소 같으면 각자 제게 따로 연락을 받으셨겠지만 이렇게 함께 얼굴을 보게 된 건 앞으로 더욱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섭니다.”

프렛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데비를 향한 시선은 어쩐지 조금은 서늘했다.

데비는 그 묘한 위화감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느낌 탓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우린 공식적으로는 일찍 죽은 어느 아가씨를 위해 추모비를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인 겁니다. 마침 데비 존스 씨는 숙녀분이 기억에 잊히지 않게 책을 집필 중이시라죠. 그래서 이 상황을 적극 활용할 겁니다.”

데비는 지금 이 순간 프렛이 웃으며 말하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책에 나오는 얼굴 모르는 누군가의 일을 인용하듯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우린 그 추억을 곱씹으며 유골 가루가 뿌려진 강가에 술도 좀 뿌리고 추모비 건립을 위한 모금도 할 예정입니다. 가급적이면 사업 진행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티 나게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보니 프렛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웃던 로레인처럼.

하지만 로레인의 웃음과 프렛의 웃음은 다른 느낌이었다. 그 차이점에서 무언가 이질감이 일었지만 데비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슬픔을 갈무리하는 방법은 다르니까.

프렛 님이라 해서 슬픔을 모르는 건 아닐 거야. 로레인이 죽었을 때, 범인을 뒤따라 끝까지 추격했던 건 프렛이었으니까.

“이렇게, 개별 연락을 허용하는 이유는 제가 현장을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자선 바자회 때 저도 한번 정체를 폭로당했고 VIP께서도 지난번 아크로폴리스 호텔의 화재 일로 활동에 제약이 걸려서 말이죠.”

프렛의 말에 데비는 출장 나가 버린 블레이크를 떠올렸다.

― 조만간 밀입국해서 황제의 탄신 연회를 틈타 잠입할 거야.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성인용 물품을 탐방하고 온다는 명목하에 그분께서는 보여 주기식 해외 일정을 강행할 겁니다. 더불어 저는 저대로 동선을 노출하고 다녀야 하니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몸통 겸 머리의 일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정기적으로 모임은 매주 금요일 이 시간으로 하죠.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 드립니다.”

내용은 이미 블레이크에게 짤막하게나마 들었던 부분이어서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VIP께서 황궁 비고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후 황궁의 경비 체계는 대폭 바뀌었습니다.”

프렛이 보드에 현재 바뀐 체계에 대해 메모하며 설명했다.

근위대와 경비병의 교대 시간이나 배치 인원, 배치 장소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전에 블레이크는 귀족 인명부를 확보하기 위해 문헌 수장고에 침입했다가 문헌에 손댔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황궁 비고에서 가장 꽁꽁 싸매져 있는 물건을 훔쳐서 달아났는데 그게 천변의 가면이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마도구 감지기가 황궁 비고와 황제의 주변에만 설치되어 있어 경비가 허술해 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한 황실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곳곳에 마도구 감지기를 설치했다고 했다.

“그때야 운이 좋아서 탈출을 쉽게 했죠. 수재가 나서 황궁 곳곳이 침수되어 난리 난 데다 천변의 가면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겁니다.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거든요.”

마도구 감지기만 문제가 아니었다.

블레이크가 가야 할 곳이 황제 궁의 황제 개인 서고였기에 마도구 사용에만 제약이 생기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 궁에는 무기 감지기까지 설치되었기 때문에 날카로운 날붙이가 달린 도구를 꺼내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새로이 바뀐 경비 체계 때문에라도 그 어느 때보다 조력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황궁에서는 이전엔 문제가 생기면 해당되는 순찰조가 모든 것을 책임졌지만 지금은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발생 장소로 담당 순찰조가 간 후 가까운 다른 조에서도 동시에 지원 나갑니다. 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허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자 에클레어 마르시아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한 군데로 순찰병이 몰린다?”

데비는 뭐가 허점이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어서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에클레어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프렛은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죠. VIP께서 원하는 건 황궁 비고가 아니라 황실 서고에 잠입하는 거죠. 하지만 경보가 엉뚱한 곳에서 울린다면 오히려 서고 쪽으로는 배치 인원이 줄어드는 셈입니다.”

프렛은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VIP의 궁내 체류 기간은 여유롭게 사흘. 여러분께서는 각종 방법을 동원하셔서 경비병의 신경을 교란해야 합니다. 그때마다 VIP께선 혼란을 틈타 이동을 하실 거고요.”

그 말에 메릴이 손을 들었다.

“왜 사흘씩이나 여유를 두고 이동해야 하나요? 이전에 침입했을 때는 속전속결로 이동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질문에 프렛은 말 잘했다는 듯 칠판에 메모를 해 나갔다.

황궁의 입구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데에 걸린다고 알려진 시간과 실제로 횡단해 보니 걸린 시간을 적었는데 그 차이가 명백했다.

“생각보다 황궁이 더 넓었죠. 외부에 알려진 면적보다 실제 내부가 더 넓습니다. 잠입해 보니 작게 보이는 정원 따위가 기괴하게 넓어서 작전 시간이 다 일그러졌던 건 여러분도 다 아실 테고. 우리의 VIP께서 그때 탈출한 건 운이 더럽게 좋아서였다는 걸 잊지 맙시다.”

황궁 비고의 그 많은 물품 중 천변의 가면을 훔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하지만 두 번 다시 황궁에서 쓸 수 없는 방법이 되었다.

“그러니 이번엔 여유롭게 사흘의 기한을 둘 겁니다. 탄신 연회 전날, ‘탄신 연회’, ‘출판인들의 밤’. 이렇게요. 어차피 그때와는 달리 장비에 제한이 걸려서 빠르게 작업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교란 계획을 머리를 모아 함께 짜내십시오.”

프렛은 자신이 생각해 낸 여러 가지 경우를 칠판에 적었다.

“물론 하나하나 황궁 밖으로 쫓겨나기까지 각종 심문을 받겠지만 자백을 막아 주는 약물은 제가 미리 지급할 겁니다.”

프렛은 품에서 황실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하나 꺼냈다.

“출판업의 국가적 장려 차원에서 열리는 ‘출판인들의 밤’이라는 행사입니다. VIP께서는 이 행사를 통해 편집장 그레이로 변장해 데비 존스 씨와 함께 궁 밖으로 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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