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스 패치의 은밀한 특종-68화 (68/120)

#068

“미풍양속을 해치는 저질스러운 출판물을 찍어 내는 곳도 초대해 주시다니, 음지에서나 활약하는 하찮은 곳까지 굽어살피시는 폐하의 관대하심에 미천한 제국민이 엎드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일리의 말을 들은 데비는 당장 가서 에일리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냈다.

‘무슨 말을 해도 저렇게 기분 나쁘게 해?’

데비는 그쪽을 쳐다보았다가 에일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더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무어라 대답하는지 듣고 싶었지만 에일리를 쳐다보며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기 싫어서 먹을 것으로 눈길을 향했다.

“아하하하하. 폐하께서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시군요.”

에일리의 어색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황제가 에일리의 마음에 썩 들지 않는 대답을 해 주었나 보다.

테이블 위에 놓인 파티 음식을 구경하던 데비는 혼자 씩 웃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제국의 영광과 번영을 위하여.”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하나씩 맛보던 데비의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렇지. 짐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제국민들 하나하나와 소통하고 싶은 마음뿐이라오.”

에일리가 ‘미풍양속을 해치는 저속한 출판물’ 이야기를 방금 전에 했건만 오히려 황제는 이쪽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황제의 시선이 가슴과 중요 부위를 간신히 손바닥만 한 천으로 가린 것 같은 차림새의 ‘핫티스트 모델’들을 훑었다가 데비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옆자리에 있던 그레이가 벌떡 일어나 정중한 인사를 올리는 걸 보고 데비는 포크를 얼른 내려놓고 같이 격식을 차렸다.

『핫티스트』의 모델들이 핫티스트 사장의 손짓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화려한 밤무대의 한 장면 같은 춤을 잠시 선보였지만 그레이를 향한 황제의 시선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 이쪽 테이블이 『트러블썸』 지 편집부인가?”

데비는 황제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게 처음이어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프렛은 노련하게 그레이 역할을 수행하며 황제의 사소한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도색 잡지로 제국 최고 판매 부수를 자랑한다는 곳이군그래.”

황제가 『트러블썸』 지를 알다니 데비에겐 놀랍게 느껴졌다.

황제는 듣던 대로 은발에 금안의 날카롭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자였다.

웃으며 다가왔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편하지 않았다. 귀찮고 피곤한 것처럼 느껴지는 찡그려진 눈매가 더욱 그러했다.

늘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기는 프렛의 미소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표정을 감출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의 것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사장 바나바스 백작은 어디 있는가?”

그레이는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해외 출장 중입니다. 연회에 맞춰 귀국한다고 했는데 일정에 차질이 생겨 연회가 끝날 즈음에나 도착할 듯합니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흐음, 그렇군. 도색 잡지라니. 선황께서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출판물에는 자비가 없으셨던 걸로 아는데 짐이 즉위하고 나서 보니 이미 출판계에서 한자리 잡고 있더군. 수단이 대단한가 보네. 아무리 금지해도 이 정도의 입지라니.”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웃으며 하는 황제의 얼굴은 언제 어디선가 본 것처럼 그리 낯설지 않았다.

데비는 그게 신문에서 황제의 사진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진보다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라 실물을 본 느낌은 신선했다.

지금까지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이리저리 덕담을 하고 다니던 황제가 지금만큼은 눈빛을 반짝이는 것이 매우 강한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폐하의 자비와 너그러우심에 가능한 일이지요. 속물적으로 느껴지시겠지만 저희는 인간의 본능을 외면하지 않았을 뿐, 그 본능을 고급스럽게 밖으로 표현하느냐, 내면에 쌓아 두고 감추었다가 날것 그대로 드러내느냐의 문제는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이가 『트러블썸』 지의 정당성을 최대한 고상해 보이는 말로 포장해 대답했다.

“그나마 『트러블썸』 지가 가장 점잖은 척하는 잡지라지. 그런 잡지를 찍어 내는 사장이란 자와 담소를 나누고 싶었는데.”

황제가 오랫동안 말을 걸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황제는 금세 지나가 버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회에 파란을 일으켜 보게. 기대하겠네.”

황제는 『트러블썸』 지 관계자들이 앉은 테이블 쪽을 마지막으로 장미궁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이제 연회의 주요 일정이 끝났으니 출판업자들이 만찬을 마저 즐기고 담소를 나누다 퇴장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사실상의 파장이었다.

그러나 빨리 연회장을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식도 훌륭했거니와 업자들끼리 나눌 이야기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악부터 바꿉시다.”

제국출판협회장이 지휘자에게 한마디 건네자 정중하고 격식 있던 음악이 빠른 템포의 긴박감 넘치는 음악으로 바뀌었다.

몇 곡의 음악이 끝나고 난 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의 마지막 순서는 ‘마술사 키마이라’의 쇼입니다. 부른다고 아무나 볼 수 없는 도도한 마술사의 특별한 공연이 곧 펼쳐집니다.”

무대 조명까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마술 쇼라니.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에 데비는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공연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핫티스트』 잡지의 모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마술 쇼의 시작을 반겼다.

데비는 자신의 옆좌석을 쳐다보았다. 그레이로 변장했던 프렛이 어느샌가 자리에 없었고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작은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그레이로 변장하는 데 필요한 가면과 가발, 의상이었다.

연회장의 조명이 보라색으로 어둡게 점멸했다.

그리고 강렬하게 쥐어뜯는 바이올린 선율과 황금색 조명을 온몸에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 건 까마귀 가면을 쓴 슈트 차림의 마술사였다.

“저자가 마술사 키마이라? 그런데 듣던 것보다는 등장이 평범한데?”

주변의 다른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속삭였다.

데비는 공연이 보고 싶었지만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에 화장실을 찾아가는 척 가방을 쥐고 조심스레 일어섰다.

“딱 한 번만 봐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더니,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구만.”

그 말에 데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무대를 쳐다보았다.

연회장이 본래 공연장은 아니었기에 갑자기 급조된 마술 공연 소품들이 배치되자 어수선한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첫 시작부터 공중 부양 마술인가?”

“평범한 시작이네.”

“보통 공중 부양은 쇼의 맨 마지막에 피날레처럼 하지 않나요?”

“공중 부양은 인기 한 번 끌었더니 너도나도 다 해서 좀 식상하지 않나요? 키마이라도 공중 부양 마술을 한다는 말을 듣진 못했는데요?”

“그럼 키마이라는 뭘 하죠?”

“기다려 봐요. 조금 더 보다 보면 뭔가 대단한 쇼를 구경할 수 있을지도?”

마술사가 사람들이 대놓고 떠드는 소리에 긴장했는지 둔한 몸짓으로 마술봉을 빙글빙글 휘젓자 누워 있던 미녀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생각보다 마술 쇼가 별로네. 우린 마술 보러 연회에 참석한 건 아니잖아. 중요한 행사는 다 끝난 거 아니야? 이제 돌아가도 되는 거지?”

“상장과 표창장 수여식은 다 끝났으니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리끼리 즐겨 봐야 황궁에서 불편해서 뭘 해?”

“그래도 마지막 공연은 보고 가야 하지 않겠어? 즐겁게 식사하라고 황실에서 자리를 마련해 준 건데.”

마술사는 훌라후프를 공중에 뜬 미녀의 몸에 통과시켜 가며 아무것도 없다는 걸 증명하는 시늉을 했다.

“에이. 저런 마술은 많이 봤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마술사의 귀에 고스란히 들렸다.

그러자 진땀을 흘리고 있던 마술사가 미간에 힘을 빡 주며 다음번 마술 소개를 유난히 더 크게 외쳤다.

“이번의 마술은 탈출 마술입니다! 목숨을 걸고 물이 든 수조에서 탈출하는 묘기죠.”

마술사가 조수의 도움을 받아 온몸에 사슬을 칭칭 감고 자물쇠를 채웠지만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렇게 인터뷰하자고 따라붙어도 어디론가 뿅 하고 사라져서 결국 허탕 치게 만드는 걸로 명성이 자자하던 키마이라라더니. 김빠지네.”

“신비주의 컨셉은 좋긴 한데 너무 정보가 없으니까 꼭 사람들이 지어낸 헛소문 같단 말이죠.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열심히 탈출 마술 준비를 했지만 그가 뭘 하든 관심 없는 관객들을 보며 마술사가 더욱 허둥거렸다.

그 모습에 데비는 미간을 찡그렸다. 키마이라가 프렛인 걸 아는 이상 사람들이 키마이라의 험담을 하는 모습에 속이 상했다.

“말도 안 돼. 평소에 카드 마술을 얼마나 잘하는데 고작 저런 쇼를 보여 줄 리가 없어.”

평범한 마술사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쇼였다. 공중 부양 쇼나 탈출 마술 쇼가 흔하다지만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거나 쉬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마술사가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수갑 하나 더 둘러. 쇠사슬도 더 감고.”

사람들이 쇼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자 마술사가 한 말에 조수가 깜짝 놀랐다.

“하나 더 두르면 탈출할 시간이 빠듯해요.”

“기왕이면 무거운 추도 몇 개 더 달아 줘.”

“안 돼요! 위험해요! 마술사님!”

“사람들이 지루해하는 거 안 보여? 우린 좀 더 화끈한 걸 보여 드려야 한다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가소롭단 듯이 웃었지만 마술사는 비장한 표정으로 사다리 위로 올라가 자신의 키보다도 더 높은 수조에 뛰어들었다.

감긴 자물쇠와 사슬을 제시간 안에 풀지 못하면 그대로 익사하는 위험한 높이였다.

“목숨 걸지 마세요!”

조수만이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풍덩 소리와 함께 들어간 마술사는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소스라치게 놀라 버둥거리며 몸서리를 쳤다.

“연기라도 실감 나게 하고 싶은 건가?”

“저 자물쇠에 트릭이 있는 거잖아. 알고 보면 힘들게 푸는 척하다가 짜잔 하고 풀지만 실은 잠겨져 있지 않다든가, 쇠사슬인 척했는데 실은 늘어나는 재질이라든가.”

그러나 사슬을 풀어야 할 마술사가 사슬을 푸는 게 아니라 허우적거리며 오히려 가라앉는 모습에 사람들이 웃다가 점점 웃음을 잃었다.

“도와주세요! 사람 살려!”

질식해 가는 마술사 대신 조수가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 마술 쇼라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조수가 옆에 있던 철제 의자로 수조를 부수려고 수조 유리를 마구 쳤다.

그러나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철제 의자가 우그러져 튕겨 나갔다.

“경비병!”

보다 못한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며 소리 질렀다.

이 모습을 보던 데비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임무도 잊고 그쪽으로 뛰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데비의 손목을 잡았다.

까마귀 가면을 쓰고 검은 깃털이 둘린 목도리를 두른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낯익게 느껴졌다.

데비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까마귀 가면의 남자는 수조 뒤편으로 순식간에 옮겨 갔다.

쨍!

퍼버벅!

수조가 굉음을 내며 터지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파도와 함께 제일 앞에서 구경하던 관객들을 덮쳤다.

“꺅!”

비명을 지른 순간 물 대신 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크게 다칠 줄 알고 눈을 질끈 감고 두 팔로 얼굴을 가렸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물은 어디론가 가고 푸른 안개가 순식간에 관객들을 지나치며 하늘로 흩어졌다.

어느새 조명은 붉고 어둡게 내리쬐고 있었고 터져 나간 수조에서는 깨진 유리 조각 대신 수많은 사탕과 젤리가 주변으로 흩어져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사람들이 마술사가 있던 곳을 쳐다보자 어느새 쇠사슬을 벗어 던진 후였다.

같은 까마귀 가면이었으나 둔한 몸짓으로 허둥거리던 마술사가 아니었다.

푸드득!

순식간에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검은 깃털들이 수많은 까마귀가 되어 객석으로 일제히 날아들었다.

독수리만큼이나 커다란 날개가 펄럭이자 떨어지는 검은 깃털에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피했지만 까마귀들은 보란 듯이 공연장을 한 바퀴 돌더니 마술사를 향해 되돌아갔다.

어미 새가 새끼들을 두 날개로 품듯 망토를 펼쳐 그 까마귀들을 감싼 그가 망토를 다시 펄럭였을 때 까마귀들은 간 곳 없고 다시 그의 검은 깃털 목도리만 남아 있었다.

“지루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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