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하녀들은 데비가 듣는 줄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떠들어 댔다.
“도둑 없었다는데? 없어진 물품도 없고.”
“하지만 프란시스가 황실 비고를 정리하다가 벽 너머에서 남자 목소리를 들었대.”
“세상에 어떤 도둑이 황실 비고에 숨어서 혼잣말을 해? 유령 아냐?”
“유령 맞나 보다! 웅얼거려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황제 폐하 목소리랑 비슷했대. 도둑이 폐하를 따라 할 리가 없잖아!”
“으악! 황제 폐하 목소리를 따라 하는 유령이라니!”
“그런데 시녀장이신 마그리트 백작 부인은 폐하께서 유령도 아니고 쓸데없는 소리 하면 다들 처벌하겠다고 하셨어. 황제 궁의 소리가 울려서 보석궁에 들리는 것일지 모른다고 말야.”
“하. 말도 안 돼. 황제 궁하고 보석궁하고 거리가 얼마나 먼데.”
“그럼 도둑이었을까?”
데비는 직감적으로 그 하녀들이 매우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냐, 일리 있어. 마그리트 백작 부인께서 고대 마법 진이 작동하던 시절엔 황제 궁하고 보석궁하고 같이 붙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그러셨었어.”
“에이, 말도 안 돼. 그렇게 가까우면 마그리트 백작 부인부터 왔다 갔다 해 보시라지.”
데비는 언젠가 읽었던 황궁의 유래와 역사에 대한 책을 떠올렸다.
아직 마법이 융성하던 시기에는 공간을 비트는 마법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고 했다.
거리상으로는 먼데 링크를 걸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쉽게 워프하는 마법 진을 영구적으로 새겨 두어 황족의 비밀 통로로 쓰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법이 남아 있는 곳이 그랑누아 대도서관과 케팔로스섬의 거대 등대 단 두 곳뿐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나마도 그랑누아 대도서관의 마법 진은 붕괴 직전이라 얼마 쓰지 못할 거라는 글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 그곳을 관람하러 여행을 떠나 보고 싶다는 소망도 함께 담아서.
즉, 고대엔 그런 이동 게이트가 존재했고 한때는 황궁에서도 쓰였다는 것.
‘혹시 내가 연 문이 그 이동 게이트이었던 거 아냐?‘
데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글로만 읽어서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만약 데비의 추론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연 쪽문은 이동 게이트였던 것이다.
장미궁은 황제가 귀한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개방한 궁전이었다.
거대한 정원이 있는 길을 지나 장미궁을 기준으로 좌측에 수정궁, 우측에는 선율궁이 있었고 장미궁의 뒤에는 대회랑이 연결되어 있었다.
대회랑의 다른 끝에는 보석궁과 황실 도서관을 낀 고요궁이 있었고 그 뒤에 황제 궁을 필두로 황후 궁, 황태자 궁, 황태후 궁 등등이 있었다.
걸어서 직선으로 통과하는 데에만도 반나절이 꼬박 걸린다고 하는 이 황궁 터는 고대로부터 황제의 혈통이 바뀌었어도 궁전만은 옛것을 보수하거나 리모델링해서 그대로 이어져 왔었다.
데비는 이동 게이트를 통해 제자리로 되돌아와 수정궁 주변을 기웃거리며 혹시 모를 블레이크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데비가 왔다 갔다 하며 귀신 소동이 일어난 탓인지 경비병 수만 늘어나 굴뚝 쪽으로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프렛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게 먼저야.’
데비가 장미궁으로 다시 돌아오니 마술 공연이 이제 막 끝나 무대 정리가 한창이었다.
데비는 키마이라 공연의 여성 보조자가 입었던 옷을 단숨에 뒤집어쓰고 관계자인 척 무대를 가로질러 다가갔다.
그러고는 급한 소식을 알리는 것처럼 그에게 귓속말로 블레이크의 부재와 쪽문의 존재를 알렸다.
데비의 말을 들은 프렛은 그녀를 끌고 무대 옆으로 내려왔다.
“잘못하면 우리 모두 붙잡힐 겁니다.”
키마이라의 가면을 쓴 프렛이 낮게 속삭이는 말에 데비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하지만 데비 존스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정궁에 만찬관으로 이어지는 이동 게이트가 있다는 뜻이로군요.”
기괴한 까마귀 가면 때문에 프렛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프렛은 손끝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일이 묘하게 흘러가는군요.”
아직 철수 중인 키마이라의 마술 쇼 무대 장치 하나를 벽면에 밀어붙여 사람들의 시야가 차단된 것을 확인한 데비는 자신이 처음 이용했던 문을 프렛에게 보여 주었다. 프렛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 눈엔 안 보입니다.”
데비는 프렛의 손을 끌어당겨 쪽문의 손잡이에 가져갔지만 데비에게는 피부에 닿는 손잡이가 프렛의 손은 그냥 통과시켜 버린다는 걸 깨달았다.
데비는 말 대신 문을 살짝 열어 그 너머를 프렛에게 보여 주었다. 프렛은 그 밖을 재빨리 내다보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데비에게 문을 닫으라고 손짓했다.
“이상하군요. 그분이 붙잡혔다면 황궁 안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없을 텐데.”
“어쩌죠? 이렇게 철수해 버리면 그분 혼자 황궁을 탈출할 수 있을까요?”
데비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프렛은 데비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키마이라의 쇼가 끝났으니 적어도 한 시간 이내에 모두 황궁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우리에겐 플랜 A 말고도 플랜 B가 있습니다.”
푸드드득!
그때 장미궁에서 마술 쇼에 관련된 기물을 철거하느라 열린 문틈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프렛이 팔을 뻗자 까마귀는 잘 훈련된 것처럼 그의 팔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까마귀의 발에 누군가가 칭칭 감은 검은 리본을 풀자 까마귀는 푸드덕거리며 다시 날아 어디론가 날아갔다.
마치 어느 방향으로 따라오라는 것처럼.
프렛의 고개가 황제 궁 쪽을 향했다.
* * *
“제기랄!”
블레이크는 나갈 방법을 찾아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적어도 황제가 다시 개인 서고를 움직였을 때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문제는 그 뒤로 황제가 단 한 번도 서고를 찾지 않았다는 거였다.
“망할!”
어쩐지 ‘통증 치료실’에 죽치고 앉아 유흥거리만을 찾더라니.
처음에는 자신이 침입한 걸 알고 일부러 트랩을 사용해 자신을 가둔 건가 싶었다.
서가 내부는 넓었고 아주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이 있었지만 전혀 밝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가 어두운 곳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데에 있었다.
무덤에 갇혔던 그 순간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하는 암흑은 그에게 있어 가장 기피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입술을 짓씹어 피 맛이 났다.
블레이크는 공포에 숨이 막혀 헐떡거리면서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미치기 싫으면 방법을 찾아내, 에이비.”
블레이크는 혼잣말이라도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무언가 말을 걸고 대답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적막과 어둠에 잠식당할 것 같았다.
“벽을 부수면 곧바로 경보가 울리겠지. 날카로운 쇠붙이가 있어도 마찬가지일 거고.”
―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블랑셰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 제 아비의 목숨을 갉아먹고 태어난 사악한 것.
― 숨죽이고 죽은 듯 조용히 살아.
클라렌스 후작이 비틀린 입매로 내던진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 당신 하나 살자고 버려진 그 수많은 목숨값, 어떻게 감당할 거죠?
언젠가 프렛이 했던 말도 아프게 되풀이되었다.
― 똑바로 해내지 못하면 제일 먼저 당신을 죽일 겁니다.
블레이크는 품에서 휴대용 주머니칼을 꺼냈다.
땡그랑!
손이 미친 듯이 떨려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안간힘을 써서 다시 주워 들었다.
급하게 움직이려던 블레이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어두운 공연장에서 가만히 손잡아 주던 어느 손을 떠올렸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옭아매어서 차라리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다.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던 상냥한 손.
그 손과 함께라면 어둠도 참을 만해지던 사소한 그 어느 날.
“나 때문에 그들이 곤란해지면 안 돼.”
그들이 제시간에 오지 못하는 그를 찾아 나섰다가 체포당해서는 안 된다.
블레이크는 심호흡을 하며 주머니칼에 힘을 주었다.
그 날카로운 날이 접혀 있다가 펼쳐지는 순간, 황제 궁 안에서 날붙이가 감지되었다.
“……!!”
무기 감지기는 황궁 내에서 칼날을 감추지 않는 한 계속해서 침입자의 존재를 경고하는 마도구였다.
날카로운 경보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경보가 이곳에서 울렸습니다!”
경비병과 친위병들이 황제의 개인 서고 앞까지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 서고는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황제와 동행하지 않는 한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흐음. 또 경보기가 오작동한 건 아닌가? 정비도 하지 못한 지 꽤 오래되었으니.”
황제가 귀찮다는 듯이 서고의 문을 열었다. 열쇠가 된 것은 그의 인장 반지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색하겠습니다. 폐하의 안전을 지키는 데에 있어 작은 방심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황제가 안으로 들어가 거만하게 고갯짓을 한번 하자 뒤에 도열해 있던 친위병들이 안으로 들어와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가는 이게 전부입니까?”
친위병들의 대장이 묻자 펠릭스는 대답 대신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스릉.
육중한 마찰음과 함께 접혀 있던 벽 너머의 숨겨져 있던 책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팍!
그 순간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뿌연 연기가 서재 안으로 삽시간에 퍼져 시야가 흐려졌다.
“독이다! 폐하를 보호하라!”
친위대는 저마다 황제를 몸으로 감싸며 느닷없는 공격에 대비했다.
“콜록! 콜록!”
그 와중에 누군가가 무언가를 밟자 시야가 더욱 하얗게 가려졌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연기를 들이마시지 마라!”
더 많은 호위들이 황제의 서고에서 벌어진 변고에 삽시간에 몰아닥쳤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달려오던 기사단장이 무언가를 밟고 순간 몸의 균형을 잃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발에 밟힌 건 소분된 밀가루 포대였다.
“밀가루?”
황제를 감싸고 있던 친위대원들은 모두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허옇게 변한 상태였고 그들이 온몸을 던져 감싼 황제 역시 밀가루가 일부 묻어 있었다.
“이게 독이었으면 너희는 모두 처형감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이건 명백한 암살 시도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있던 자는 모두 밀가루가 묻었다! 범인도 밀가루가 묻었을 테니 흔적을 찾아라!”
기사단장의 말에 다들 다급하게 흩어져 수상한 흔적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밝혔다.
“저쪽에 흰 가루가 떨어져 있습니다!”
친위병 하나가 조금 떨어진 복도에서 흔적을 찾아내고 소리쳤다.
기사단장이 그 소리를 듣고 서고 밖으로 달려 나갔으나 이상하게도 흔적을 알려 준 친위병이 먼저 나서기보다 가장 뒤에서 그를 따라 나오고 있었다.
기사단장은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서고에 있던 모든 이가 흰 가루 범벅이었는데 그 친위병만 밀가루가 소매 일부에만 묻어 있었다.
그런 것에 비해 얼굴과 어깨 쪽에만 밀가루를 심하게 뒤집어쓴 모습이 어색하다는 생각이 한 박자 늦게 떠올랐다.
뒤를 돌아보자 친위병은 몸을 틀어 기사단장과 복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이! 거기! 너! 이름은 뭐고 몇 조에 속해 있지?”
대답 대신 친위병은 계속해 걸었다.
기사단장이 화난 얼굴로 친위병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마치 예상했다는 듯 친위병은 마구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