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왜요! 사장님 아니면 그 느낌을 어떻게 내요!”
데비의 항의에 그레이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눈언저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전문 모델 뒀다 뭐 해. 그들의 전문 분야를 빼앗을 셈인가? 얼마가 되었든 원하는 모델 섭외해 볼 테니까 사장님은 제외해. 그게 그분의 뜻이야.”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미리 단언하십니까?”
“물어보지 않아도 반드시 거절이야. 심심하면 직접 사장님께 가 보든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레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 * *
“프렛, 벌써 가는 거니?”
그를 불러 세우는 여인의 목소리는 나른하고도 교태로웠다.
“오늘도 커피 한 잔으로 늦은 오후까지 버텨야 합니다.”
“저런.”
“핑계가 아니라 진심으로 바쁩니다. 어제 숨도 아껴 쉬어 가며 일한 결과로 부인과 함께할 수 있었지만 원래 달콤한 걸 먹는 시간이 그렇잖습니까. 일할 때의 하루는 긴데 부인과 함께 있으면 언제 이렇게 날이 밝아 버리는 건지.”
목 부분의 와이셔츠 단추를 채운 프렛이 자신을 향해 뻗은 손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입맞춤이 황홀한 듯 바라보고 있던 귀부인은 그의 입술이 손등에서 떨어지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예쁘게 보이려고 애쓰는 몸짓이었으나 실상은 그다지 우아하지도, 고혹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프렛은 꿀이 떨어지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바나바스 백작이 자네를 지나치게 혹사시키는구나. 얼마를 주고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만두고 나오면 안 될까?”
귀부인은 프렛을 진심으로 아끼는 것처럼 말했다.
“남편이 가진 사업체 중 작은 거 하나 떼서 네게 운영을 맡길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 지금보다는 더 자주 만날 수 있지 않겠어?”
그녀의 말에 프렛의 입가에 아주 짧은 순간 비웃음이 걸렸지만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진심을 덮어씌웠다.
“저는 바나바스 백작의 동업자입니다. 그러니 바쁜 일상은 따지고 보면 다 제가 벌인 일이고 스스로 불러들인 고난입니다. 하지만 부인의 다정하신 말씀에 제 마음이 위로를 받는군요.”
프렛은 그녀의 양 볼에 작별의 입맞춤을 해 주며 끌어안았다.
“부인께 누가 되지 않도록 보는 이가 없을 때 조용히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이 호텔의 모든 것은 부인을 위한 것이니 편히 쉬시다가 언제든 호텔 종업원을 불러 정리를 맡기십시오.”
정중히 인사하고 뒤로 물러나려는 프렛을 보며 귀부인은 이불을 끌어당겨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감쌌다.
“배웅하지 마십시오. 누워 계셔도 괜찮습니다.”
웃는 얼굴로 조금씩 멀어지는 프렛에게 귀부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우리 언제 또다시 만나게 되는 거지?”
“매주 수요일 모임에는 항상 인사드리러 가고 있으니 그때라면.”
프렛의 말에 귀부인이 안심했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럼 그때 봐.”
그녀는 프렛의 예쁜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느라 작별 인사하는 동안 그녀가 베개 밑에 숨겨 놓았던 열쇠를 프렛이 비누에 꾹 찍었다가 제자리에 되돌려 놓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사랑해. 내 진실한 사랑은 남편이 아니라 프렛 너야.”
밖으로 나오자마자 프렛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랑. 사랑이라.
언제 들어도 사랑이란 참으로 값싼 단어였다.
연극 무대나 노래에서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누군가의 착각’ 내지는 ‘누군가가 원하는 환상’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사랑으로 말하자면 나만큼 많은 고백을 받은 사람도, 말해 준 사람도 없을 테지.
그녀는 카지노에 자주 출입하는 남편을 둔 여인이었다. 남편이 가산을 탕진하는 사이 프렛과 밀회를 즐기는 걸로 헛헛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프렛이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단 하나, 남편을 도박 빚으로 묶어서 마음대로 써먹기 위함이었고 그 남편은 샴발리 백작의 거래처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프렛은 자신이 잘생기고 매력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성별을 불문하고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사람은 지금도 널려 있었다.
그가 작정하고 누군가를 목표로 삼았을 때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특정 멘트, 특정 매너, 특정한 이벤트.
몇 번이고 식상하게 반복해도 사람들은 쉽게도 넘어왔다.
마음에도 없이 누군가를 유혹하고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그의 마음은 마모된 지 오래였다.
사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뭔지도 몰랐다. 항상 사람들은 그의 허락 없이 제멋대로 다가와서 제멋대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가 떠나갔으니까.
그의 기분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으니 딱히 만남과 헤어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새벽 어스름을 밟으며 나온 프렛은 비밀 공방에 들러 비누에 박힌 열쇠 자국을 복사해 달란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곳이 제집인 양 부엌을 뒤져 간단하게 토스트 한 조각을 먹고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늘 가지고 다니던 가방에서 의상을 꺼내 갈아입고 그레이의 얼굴이 되어 출판사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가도 되지만 오늘따라 왠지 걷고 싶어 아침햇살을 받으며 길거리를 가로질렀다.
“찾았다!”
그 순간 시꺼먼 무언가가 그레이에게 후다닥 뛰어들었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프렛은 몸을 틀었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스친 무언가는 뛰어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해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것은 오랫동안 거리를 배회한 유기견의 털처럼 너절한 누더기 뭉치의 꼬마였다.
몇 번은 더 굴러 길거리의 온갖 먼지를 온몸에 휘감고 나서야 멈춘 아이는 씨근덕거리며 일어섰다.
“피했어?”
너무 더러워서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를 듣자 프렛의 얼굴에 경악의 기색이 떠올랐다.
“왜 날 피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찾아왔는 줄 알아?”
그러나 그레이는 아이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다.
“누구지?”
아이는 씩씩거리다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더니 기어코 얼굴에 시꺼멓고 긴 얼룩을 남기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앙!”
아침나절이라 출근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그레이와 아이를 향했다.
그레이는 당황해서 주춤주춤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아이가 더 큰 소리로 빼액 소리 질렀다.
“아빠! 날 버리지 마!”
프렛은 펄쩍 뛰었다.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리야?”
“아빠! 내가 잘못했어! 밥도 조금만 먹을게. 때려도 괜찮으니까 버리지만 마!”
도망치려는 프렛을 향해 아이가 우렁차게 외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워졌다.
* * *
“으아아앙! 우앙! 흐아앙!”
데비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출근하다가 가까이서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 근처는 모두 사무실 아니면 상점이라 애가 울 만한 데가 없는데?”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선명해지는 울음소리에 데비는 출판사에 들어서면서도 연신 두리번거렸다.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문이 반쯤 열린 편집장실을 향해 있어 데비의 고개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인상을 구긴 채 골치 아프다는 듯 책상에 앉아 있는 그레이와, 그 옆의 의자에 앉아서 빽빽 울고 있는 더러운 사내아이가 보였다.
딱 봐도 구걸하다 온 아이 같았다.
울면서도 연신 주변 눈치를 살피는 게 가짜로 우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이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배에 힘 빡 주고 울어 재끼니 건물이 흔들릴 정도였다.
데비는 귀를 손으로 막았다가 떼어 봤지만 전혀 차이가 없었다.
“와, 쪼꼬만 게 목청 봐라. 엄청난 성량이네.”
“쟤는 누구예요?”
“편집장님 말씀으로는 헨리에타의 아들이래.”
“헉!”
데비는 눈을 크게 떴다.
“헨리에타의 아들이 왜 여기 와 있어요?”
“한때 편집장님이 사귀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데비가 옆자리의 벤자민에게 물으면 물을수록 아이가 더 크게 울었다.
“아빠아! 아빠아!”
이를 무시하려고 애쓰는 그레이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설마… 편집장님 숨겨진 아들이에요?”
애슐리가 어느새 다가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애 나이를 봐. 고작 2~3년 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어떻게 저런 큰 애를 낳아?”
벤자민의 말에 당장 폭발할 것 같던 그레이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어떻게 좀 해 봐요. 귀가 먹먹해요.”
애슐리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나는 골이 띵해.”
“일하는 데서 이게 웬 난리람. 보호자 없어요? 이대로 놔둘 건 아니겠죠?”
애슐리의 말에 벤자민이 의자를 돌려 앉았다.
“엄마가 죽었는데 보호자가 있을 리가……. 보아하니 애가 길에서 살다가 아는 얼굴 만나서 악착같이 쫓아온 모양인데.”
“그럼 이대로 저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해요?”
애슐리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치안관에게 인도해야 하나.”
그 말이 나오자마자 다 듣고 있었다는 듯 아이가 발버둥까지 치며 울어 댔다.
그레이가 괴로운 듯 편집장실에서 나오려다 헨리에타의 아들에게 붙들려 한숨을 쉬었다.
아이는 옷자락이 찢어질 정도로 세게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치안관 안 부를 테니 걱정 마라.”
“싫어! 싫어어! 으앙!”
“데비 양, 잠깐 이리 와 봐!”
“으앙앙앙!”
울음소리의 근원에 다가서자 귀청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 괴로웠다.
데비가 가까이 갈수록 아이가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더 키우는 게 빤히 보였다.
‘어린 게 영악하기까지 하네.’
확실히 아이는 가짜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찔끔 나오기는 했으나 악쓰느라 나온 눈물이지 슬퍼서 흘리는 건 아니었다.
헨리에타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아이는 그레이를 알고 있었고 그레이 또한 영 모르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데비는 흐트러진 셔츠 단추를 보고 그레이가 프렛이란 것을 눈치채고는 그의 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탕이라도 줘 보세요.”
그러자 그레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주변을 가리켰다.
그레이의 손짓을 따라 주변을 살펴보니 사탕이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던져져 있었다.
지저분한 것에 예민한 블레이크가 봤다면 당장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데비는 귀를 틀어막고는 그레이에게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며 물었다.
[언제부터 울기 시작한 거예요?]
[출근길에서부터 지금까지 쭉입니다.]
“흐음…….”
그레이가 짤막하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아이가 따라왔고 외면하려 했더니 울며 난리 쳐서 출판사로 데려왔는데 그레이가 제게서 멀어지려고만 하면 울더라는 것이다.
[몇 번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지금 이 상황에 이르렀지 뭡니까?]
그가 입 모양으로 알려 왔다.
[헨리에타의 아들 맞지만 대외적으로는 부리던 하녀의 아이로 되어 있죠.]
데비의 눈에 아이의 찌든 옷이 보였다. 하루 이틀이 아닌, 꽤나 오래전부터 노숙한 듯한 아이의 차림새와 떡 진 머리가 눈에 거슬렸다.
[아이를 돌봤다던 하녀는 어떻게 되었어요?]
[저야 모르죠.]
데비는 잦아든 울음소리에 뒤를 힐끔 보았다.
아이가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가 데비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다시 목청을 가다듬어 크게 울어 댔다.
아이가 쳐다본 쪽엔 열린 창이 있었다. 데비는 아이가 무엇 때문에 열린 창을 바라보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창가에서 맛있는 토스트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하!”
1층에 있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였다.
“잠시만 기다려요.”
아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데비는 얼른 카페로 가서 샌드위치를 주문해 갖고 올라왔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에 더불어 따끈하게 데운 베이컨과 달걀의 향이 오늘따라 데비의 코에도 맛있게 느껴졌다.
샌드위치를 사 들고 오자마자 아이의 시선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겁게 그녀를 향했다.
또각, 또각.
데비는 편집장실을 향해 일부러 천천히 걸어왔다. 점점 아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면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만 요란해졌다.
“먹고 싶니?”
데비의 말에 아이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더러우면 먹을 수 없는데. 어쩌지?
그러자 아이가 다시 빼액 소리를 내지르며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