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스 패치의 은밀한 특종-91화 (91/120)

#091

에일리 플레르는 지금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오전 내내 전화통만 붙들고 있는 모습에 라임 출판사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나오는 족족 사 재끼라고요. 베스트셀러 한두 번 만들어 봤어요?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요?”

출판사 직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일리 플레르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자 그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직원들은 다들 무언가 바쁜 것처럼 허둥거리며 모르는 척했다.

“저, 이번 달은 둘째 치고 저번 달 월급도 못 받았는데 밀린 월급은 언제쯤…….”

그중 한 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에일리에게 물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월급을 줄 거 아니에요? 지금 우리 출판사가 이번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고 있는 거 알아요, 몰라요?”

“사장님, 사장님 바꿔 달라는데요?”

“어딘데!”

에일리는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게 하고는 다시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갚아. 갚는다고! 순수 문학 하는 출판사들 사정 몰라서 그래요? 그러지 말고 원금 상환일을 조금만 더 미뤄 줘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면 알도 거위도 끝장이란 거 알죠? 당신은 지금 거위 배를 가르려고 하는 거라고요. 두고 봐요. 이번 작 예감이 좋아요. 반드시 수익 난다니까?”

에일리와 말을 더 해 보고 싶어 서 있던 직원이 에일리에게서 도저히 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숨을 쉬며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원래 라임 출판사는 이렇게 자금난에 허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부터 이상하게 벌이는 일마다 손해가 나서 아슬아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특히나 사장이 물러나고 딸인 에일리가 경영에 손대면서부터 문제였다.

자금의 상당 부분을 자신이 출간한 책을 서점에 팔았다가 직원들을 시켜 싹쓸이하듯 사들여서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일에 낭비해 버렸다.

사면 사들일수록 손해에 악성 재고가 되어 창고에 가득 차 있는 그녀의 책들은 다른 책이 들어올 공간마저 틀어막고 있었다.

“길버트 씨가 사장 하실 때가 좋았지. 적어도 월급은 안 밀렸잖아. 딸이 저렇게 회사를 말아먹고 있는데 걱정도 안 되시나?”

“정치에 손대면 삼대가 망한다고 했는데 그냥 하던 일이나 잘하시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하원 의원에 도전하겠다고 난리실까.”

“주변에 바람잡이들 끼어들면 그러게 되어 있어. 예전부터 길버트 씨가 떠받들어지는 걸 되게 좋아했잖아.”

직원들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에일리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다음 전화를 받았다.

“뭐라구요? 도색 잡지 화보가 제 신작에 나오는 문장을 통으로 베꼈다고요? 그 정신 나간 출판사가 어디예요?”

날카로워진 에일리는 여전히 한 손으로는 수화기를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가까운 직원을 불렀다.

“가까운 서점에 가서 『트러블썸』지 이번 달에 낸 화보 한 권 사 오세요.”

직원은 에일리가 심부름값을 주길 바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뭘 하고 서 있어요? 당장 가서 사 오라고요!”

에일리의 고함에 직원은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머, 정말이네? 내 문장 베꼈어!”

직원이 서점에 갔다가 예약제라 살 수 없다는 말에 화보집을 샀다는 주변 사람을 수소문해서 간신히 빌려 왔다.

“이건 모욕이야. 이런 더러운 사진으로 내 글의 품격을 떨어뜨리다니!”

“일부러 그런 걸까요?”

직원이 미간을 찡그리며 출판사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전에 자기 소설 표절당했다고 소송 건 여자가 이 출판사 직원 아니었어요?”

직원의 말에 에일리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밉살스러운 출판사에 짜증 나는 얼굴이 둘이나 있었다. 하나는 애슐리. 또 다른 하나는 데비.

“흥.”

에일리는 그 얼굴들이 떠오르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이것들이 보란 듯이 날 물먹이려고 그런 거야? 법적으로 안 되니까 이런 식으로 모욕하겠다? 이미 판결이 났는데 표절 시비에 날 끌어들여서 다시 한번 판을 엎어 보겠다는 거야?”

에일리는 시를 빼앗기고도 제대로 소송도 진행하지 못했던 데비를 떠올렸다.

시간을 질질 끌며 소송에 돈이 많이 든다고 하니까 제풀에 포기했던 심약한 친구였다.

― 이 시 너무 마음에 들어. 나 주면 안 돼?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것 같아서 내 것으로 하고 싶어.

써 놓은 시도 많으면서 시 한 편 달라고 하니까 정색하던 쪼잔한 친구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가고 말았다.

데비의 시를 너무 좋아해서 필사해 외우고 다닐 정도였건만.

― 이 시, 정말 네가 쓴 거냐?

책상 수첩에서 아버지가 필사한 시를 보고 무릎을 쳤다.

― 내 딸이 이렇게 재능이 출중할 줄이야! 다른 집안이면 몰라도 출판업을 하는 집안에서 딸 하고 싶은 일 못 밀어주겠느냐?

필사한 글로 출간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진실을 말하면 실망할 아버지를 보기가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다 보니 거짓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데비가 화내는 것보다 아버지가 실망하는 게 더 무서웠다. 데비야 안 보면 그만이지만 아버지는 평생 봐야 하지 않나.

얼결에 출간한 시집으로 상을 받고 유명세를 치렀더니 그 후속작이 문제였다.

대단한 걸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불면증이 오고 입맛이 없어 야위어 갔다.

― 안 되겠다. 그렇게 스트레스받느니 이번엔 새로운 피를 수혈받자꾸나. 소설은 어때? 시인이자 소설가. 시는 아무리 유명해도 돈이 안 돼. 소설이 좀 더 잘 팔리지.

― 소설은 써 본 적이 없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공모전을 제의했다.

― 공모전 상금 같은 건 걱정하지 마라. 이번 응모작들이 모두 수준 이하라서 수상작 없음이라고 발표하면 된다. 심사 위원으로 넣어 줄 테니 그중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그 줄거리 따다가 네가 더 매끈하게 만들면 된다. 다들 알게 모르게 그런 식으로 유명세를 이어 가지. 관행이란다. 그러니 꺼려하지 말거라. 대필로 이름만 갈아서 내는 작가도 얼마나 많은데?

처음 애슐리로부터 피소당했을 때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스토리를 거의 베끼다시피 했기 때문에 법원에서 베꼈다는 걸 알아채면 어쩌나 싶어서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처럼 느껴졌다.

― 걱정하지 마. 공모전을 해서 생판 모르는 사람을 밀어줘 봐야 좀 더 좋은 조건의 출판사와 계약하고 배신해 버리는데 우리도 땅 파서 자선 사업하는 거 아니잖아. 어차피 뒤통수 맞을 거, 문장 같지도 않은 문장 걸러 내고 보조 작가의 도움을 받아 네가 더 그럴듯하게 잘 써내면 돼.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어.

에일리의 아버지가 그렇게 격려해 주지 않았으면 진작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시라고는 해도 관용어구였어.”

법원에서 ‘스토리상의 유사성은 인정되나 직접적으로 겹치는 문장이 없으니 원고 저작물과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결이 나면서부터 에일리는 더는 베끼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흔한 클리세를 가져다 쓴 것뿐이야.”

지난 소송들을 떠올린 에일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설은 다 거기서 거기잖아.”

생각할수록 웃겼다.

“그나저나 베끼려면 적당히 베끼지, 그대로 따다가 쓰면 명백하게 표절인 거 드러나잖아. 바보 아냐? 아니면 될 대로 되라고 자포자기라도 한 건가? 어디 법대로 해 보자고.”

자신을 고생시켰던 지난 소송을 떠올리며 에일리는 이를 갈았다.

“팔리기도 많이 팔렸다던데 그 돈 다 토해 내도록 해 주겠어.”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에일리의 아버지는 에일리를 탓했다.

“적은 적당히 밟아 놓으면 기어올라. 아예 이 바닥에 발도 디디지 못하게 진작 매듭지었어야지. 그냥 놔두니까 이렇게 지저분한 짓을 하지 않느냐. 내 인맥 총동원해서라도 표절 의혹을 크게 띄워 줄 테니 잘해 봐라. 나도 다음번 선거에 출마할 때 이력 한 줄 추가하자꾸나.”

“호외요, 호외!”

신문팔이 소년들이 뿌리는 신문 사회면에 작게나마 표절 의혹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에일리는 고소장을 쓰면서 『트러블썸』 지와 연락을 취하려고 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짜증이 난 에일리는 직원을 보냈다.

“3개월 출간 정지라 전 직원 다 휴가 중이라고 합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직원이 면목 없어 하며 말했다.

“그런데 밀린 월급은 언제 주시나요?”

“지금 월급 소리가 나와? 표절당했으니 배상금을 받아야 월급을 주지! 좀 더 발로 뛰란 말야! 거기 사장이 호텔 오너라며? 사장에게라도 접촉해 봐.”

“사장은 크루즈선 타고 해외여행 갔다던데요.”

“아악!”

직원들 월급도 몇 달째 밀리고, 생각보다 표절에 대한 반응도 크지 않아 기사 청탁비로 헛돈만 잔뜩 쓰고도 멈출 수 없던 그 날도 에일리는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금방 갚는다니까요. 우리도 피해자라고요. 거기서 돈을 받아야 갚을 수 있어요.”

“사장님.”

전화 통화에 방해를 받은 에일리는 뒤를 돌아보며 짜증을 냈다.

“나중에 말해. 전화하는 거 안 보여?”

그러나 직원이 들고 있는 잡지를 본 순간 에일리는 수화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표절과 표절 사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상반신을 수그리고 있는 천박한 모델 사진이 박혀 있는 『트러블썸????지에는 가장 크고 눈에 띄는 글씨로 표절에 대한 내용을 예고하듯 ‘편견은 이제 그만. 표절도 이제 그만’이라는 단어가 인쇄되어 있었다.

잡지를 펼치니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눈에 띄었다.

「‘같은 글이어도 품격과 저질,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현상에 대한 고찰’

…본 잡지야말로 표절 피해에 대해 손해 배상을 청구할 예정이다.

지난 화보집 촬영 때 자사는 재작년에 출간되었던 SM 특집 기사 편의 문장을 다시 사용하였으나 이를 표절한 소설가는 오히려 자신이 표절당했다고 고소장을 접수했다.

이에 이 기사가 만들어진 전 과정을 공개한다. (이하 생략)」

“보조 작가. 보조 작가 데려와!”

사색이 된 에일리는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해당 문장 가다듬은 건 외주 넣은 보조 작가였어. 그 보조 작가가 표절한 거야. 내가 한 게 아니야!”

에일리는 울부짖었지만 공모전에 냈던 데비와 애슐리의 합작품이 공개되면서 표절의 전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평소에 데비와 애슐리를 겨냥해 도색 잡지 알길 우습게 알고 했던 에일리의 발언과 인터뷰 내용이 밝혀지면서 그 하찮은 삼류 잡지를 표절한 더 하찮은 이름으로 남겨졌다.

* * *

“더 이상 발걸음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면서.”

호위 기사 다스탄을 비롯해서 그를 조용히 따르는 그림자의 무리가 있었다.

“그랬었지. 그런데 황후가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까 머리가 아파서 조용히 쉴 곳이 필요해.”

후드를 푹 뒤집어쓴 펠릭스가 걸음을 서둘렀다.

“부정부패의 온상! 국정을 말아먹은 황태후와 그 친인척 일당은 물러나라!”

“철도 주식 폭락이 웬 말이냐! 정부의 지급 보증을 시행하라!”

시위대가 거칠게 항의하고 치안관들이 이들을 진압하느라 난장판이 된 골목을 지나쳐 또 다른 시위의 현장을 가로질렀다.

“라임 출판사는 로비와 청탁에 쓸 돈으로 임금 체불 해결하라! 파산이 면죄부냐!”

결이 다른 이질적인 시위대도 있었다.

“여기가 더 시끄러운데요?”

“그러잖아도 속 시끄럽거늘, 밖은 더 떠들썩하군그래.”

펠릭스의 투덜거림에 다스탄이 그의 안위를 살피며 곁으로 다가왔다.

“굳이 이런 날 나가셔야겠습니까? 민심이 흉흉한데요.”

“욕먹는 건 어머니이지 이 몸이 아니거든.”

“남의 일이라 할 수 있을까요? 모후이신데.”

“그럼 내가 했나?”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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