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꼴깍.
쥐 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신관은 돌그릇을 살폈다.
다들 마른침을 삼켜 가며 기다렸지만 돌 그릇은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
“거잇마알! 다시! 다시 엄사흐애라! 다시 흐애야 안다!” ( 거짓말! 다시! 다시 검사해라! 다시 해야 한다!)
에릭이 미친놈처럼 족쇄를 풀고 달려 나가려고 난동을 부렸다.
그리고 그를 호송해 온 교도관에게 죽을 만큼 많이 맞았다. 그 곁에 있던 클라렌스 후작이 보다 못해 소리쳤다.
“황태후가 함께 서명한 계약서가 여기 있습니다! 황태후의 친필 서명이오! ‘아르켈론’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외다!”
“저놈들, 감히 ‘아르켈론’을 운운해!”
이에 격분하는 이도 있었으나, 황제의 바로 아래 단상에 자리한 황실 방계들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황제를 힐끔거렸다.
“국보를 이따위 일에 사용하는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에 대한 일말의 의혹도 남겨 두기 싫구나. 후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을지 모르나, 황태후의 일은 짐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이를 해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권좌를 차지하는 이의 자격에 대해 후대에 불씨를 남겨 놓는 것. ‘아르켈론’의 사용을 허락한다.”
황제의 선언에 클라렌스 후작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황태후를 쳐다보았다.
“대신, ‘아르켈론’을 쥐는 것은 죄인 나이젤 네놈이 직접 해야 할 것이다.”
황제의 차가운 눈빛이 클라렌스 후작을 향했지만 그는 드디어 황태후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미소 지었다.
“당장 ‘아르켈론’을 가져오라.”
황제의 명령에 신하들이 급히 움직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아르켈론’이 담긴 상자가 들려 나왔다.
신관이 그 상자를 열자 푸른 불길이 일렁이는 검은 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오오! 저것이 바로 진실의 ‘아르켈론’.”
도감에서나 그림으로 접했던 황궁의 신묘한 마도구를 본 사람들이 감격에 차 중얼거렸다.
“죄인 나이젤은 단상에 올라가라.”
교도관이 나이젤의 등을 떠밀었다. 나이젤은 족쇄를 쩔그렁거리며 걸어가면서도 당당해 보이려고 어깨를 한껏 펼쳤다.
“죄인이 뭐가 저리 당당해?”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이젤의 귀에 들렸다.
“저 문서가 진짜여서 자신 있는 모양이지.”
“진짜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신관이 아르켈론을 나이젤의 두 손 위에 올려놓았다.
“자, 진실의 시험을 받고 싶은 자 자신의 뜻을 밝혀라.”
신관의 말에 나이젤이 아르켈론을 움켜쥔 채 버럭 소리 질렀다.
“황태후는 혼외자를 숨겨 놓고 황실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이젤의 손 위에서 푸른 불길이 확 치솟더니 나이젤의 온몸을 휘감았다.
“저 문서는 황태후가 직접 작성한 것……!!”
파직, 파지지직.
나이젤이 말을 하는 도중에 아르켈론 주변으로 번개 같은 것이 제멋대로 아른거렸다.
쾅!
폭음과 함께 아르켈론이 산산조각 났다.
“아아악!”
나이젤의 눈이 아르켈론의 파편에 직격당했고 곁에 있던 신관의 옷자락이 파편에 뚫려 구멍이 났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참담한 결과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악! 내 눈이! 눈이!”
나이젤이 얼굴을 감싸 쥐고 단상 위를 뒹굴었다.
“‘아르켈론’을 들고 거짓말을 하면 불길이 몸을 태워 버리는 거 아니었나?”
사람들은 자신의 상식에 어긋나는 광경을 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탄 거라 할 수 있나?”
몸이 시커멓게 그슬려 머리가 꼬불꼬불해진 나이젤의 곁에서 애먼 피해를 입은 신관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 검댕을 뒤집어쓰고 화상을 입긴 마찬가지였다.
“곁에 있던 신관은 왜……?”
사람들이 술렁이는 사이 황제가 손을 들어 관중을 주목시켰다.
“쯧. 아까운 국보만 날렸군. 선대로부터 귀중하게 물려져 온 ‘아르켈론’의 마지막을 이런 추한 소문에 쓰니 대지신의 진노가 몸소 내렸구나.”
신의 진노라는 말에 듣던 이들의 눈이 모두 커졌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희생한 신관에게 섭섭지 않은 위로를 보내겠노라. 이런 헛소문에 귀 기울인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검증회가 끝난 뒤 대지신을 위한 대규모 참배를 명한다.”
황제의 선언에 관중이 ‘황제 폐하 만세!’ ‘대지신께 영광을!’ 따위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럼 그렇지. 반란 수괴 놈이 어디서 물귀신 작전을 쓰려고.”
“난 처음부터 황태후 전하의 결백을 믿었다고.”
사람들의 잡담으로 시끄러워진 가운데, 신관장은 좌중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로 인사한 뒤 황제를 향해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피델리스 오브제’가 든 쟁반을 소중히 든 채 되돌아갔다.
“와아!”
데비는 블레이크를 향해 달려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다행이에요! 누명 쓸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황제는 ‘황제 폐하 만세’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검증회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는 블레이크에게 다가가 보란 듯이 말을 건넸다.
“다시는 오해받을 만한 짓을 하지 말거라.”
블레이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심안술사, 짐을 구한 건 고맙다만 잘못은 잘못이다. 그러니 포상은 그대의 목숨을 보전케 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하지. 한 번만 더 황궁을 넘나들었다가는 그때는 반드시 벌하겠다. 명심하라.”
펠릭스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데비를 내려다보았다.
“폐하의 바다보다 깊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짐을 도와주어 고마웠다.”
데비는 악수를 청하는 황제에게 어쩔 줄 몰라 넙죽 허리를 숙이는 척하면서 펠릭스의 소매에 파랗고 투명한 병을 집어넣었다.
펠릭스가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모두가 떠나고 블레이크와 데비 역시 황궁을 벗어나게 되자 블레이크가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홀린 듯한 눈으로 데비를 쳐다보았다.
“키마이라로 데뷔해도 되겠어. 그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손재주를 부릴 생각을 다 하고.”
쟁반에서 떨어지려는 ‘피델리스 오브제’를 잡는 척 미리 준비해 둔 가짜로 바꿔 치기 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비밀이 많은 남자와 사귀려면 그쯤은 해야죠.”
“간도 크고.”
블레이크는 긴장이 풀려 휘청거리려는 무릎에 힘을 주며 낮게 웃었다.
그에게 데비는 언제나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존재였다.
― 방법이 있어요!
에릭과 나이젤을 붙잡았으나 에릭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해 황제를 비롯해 블레이크도 인상만 구기고 있을 때 데비가 손을 번쩍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 짜잔! 부서진 마도구도 감쪽같이 고쳐 내는 심안술사의 손이 여기 있습니다. 부서진 마도구도 따지고 보면 다 쓴 마도구인데 어찌어찌 끼워 맞추면 한 번쯤은 작동하더라고요. 안전은 책임질 수 없지만.
다 써 버렸다던 ‘아르켈론’을 마도구 파편 따위로 대충 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실패할 경우 더 큰 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데비는 뻔뻔하게 큰소리쳤다. 그녀가 고친 것이 폭발할 것을 알았기에 나이젤에게 들게 했는데 그 정도로 큰 피해를 입힐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방법을 찾아내자 판을 짜는 건 순식간이었다.
황제가 판을 기획하자 데비가 방법을 찾아냈고 블레이크는 뒷받침을 해 주었다.
― 기왕 사기 치는 김에 크게 쳐 봅시다! 블레이크! 손재주 좀 가르쳐 줘요! 저도 마술 한번 해 볼래요!
블레이크는 데비의 손을 잡고 검증회장을 퇴장하면서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황제가 하염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머니를 용서해 주십시오.
생애 처음으로 블레이크는 어머니란 단어를 사용했다.
― 낳아 줬다 해서 모든 사람이 어머니라 불리는 건 아닙니다. 황후의 삶을 선택한 순간 저와의 인연은 끊어진 거나 마찬가지이니 이후에 제가 두 분의 눈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머니를 찾아 목숨 걸고 황궁에 잠입해 놓고 인연이 끊어졌다 말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 제 목숨 구하겠다고 사지에 용감하게 뛰어든 사람을 찾았으니 저는 더 이상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블레이크와 데비가 서로를 아련하게 쳐다보는 모습을 봐야만 했던 펠릭스는 그때를 다시 떠올리며 토할 것처럼 혀를 쓱 내밀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 펠릭스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흩뜨리며 투덜거렸다.
‘바나바스 백작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사는데 나는 꼼짝없이 일만 하며 살겠구나. 좋은 건 다 백작 몫이고… 팔자도 참 좋네.’
펠릭스의 눈이 황태후를 향했다.
아련하게 블레이크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킨 황태후는 고개를 돌렸다가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약속대로 제 어머니로만 살아 주시깁니다. 독점이라도 하지 않고는 백작의 타고난 행운이 배 아파 죽을 지경이니. 저도 좋은 것 하나는 가져야죠.’
펠릭스는 훗 하고 웃으며 걸어갔다.
* * *
“…해서 부정하게 청탁을 받아 준 혐의를 피할 수는 없었다지. 종신 유배형에 처해지긴 했는데 타이라섬이라서. 외딴섬이라고는 해도 기후나 풍경이 좋기 때문에 딱히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섬 밖으로 나올 수는 없겠지만 황족으로서 품위 유지를 위한 지원은 될 테니까.”
샤워 가운 차림의 블레이크는 포도주를 들어 목을 축인 후 협탁 위에 올려놓고 데비가 앉아 있는 침대 곁에 걸터앉았다.
“다행이에요!”
데비는 언젠가 가면을 쓰고 마주쳤던 귀부인과의 기억을 곱씹었다.
그게 천변의 가면임을 안 이상 그날의 귀부인은 황태후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황태후가 그날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샴발리 백작은 놓쳤지.”
꾀주머니 아니랄까 봐, 그는 황태후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척하며 클라렌스 후작과 선을 그어 두었기 때문에 내부 고발자 역할을 하며 자신의 죄를 감면받았다.
“황제께서도 모르고 놔주신 건 아닐 거예요.”
“방심할 수 없는 자야.”
“그럼 로레인 건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데비의 말에 블레이크는 말없이 그녀의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프렛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설득해 봐야지.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은 거라 하지 않나.”
그의 손이 데비의 턱을 감싼 뒤 느릿하지만 가벼운 키스가 이어졌다.
“지금으로서는 샴발리 백작이 황제께 입 안의 혀처럼 굴며 알아서 기고 있는 상황이라 국정 혼란이 수습될 때까지는 가만히 놔두실 것 같더군.”
“제롬 경위와의 면담 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상관인 라파엘 치안정감이 레이너스 공작의 사촌이라, 문건이 거기까지 올라간 건 확인했지만 그들이 어떤 셈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 제롬 경위도 결국은 상관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
“레이너스 공작은 대체 어느 입장인 거죠?”
“황태후의 비즈니스 파트너나 마찬가지라서 황태후가 해 왔던 정책의 핵심은 그의 생각과도 일치하지. 황제로서는 황태후 때와 마찬가지로 레이너스 공작과 쭉 손잡고 정치를 할 수밖에 없을 거야. 딱딱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우린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하자고.”
그가 데비의 어깨를 가볍게 밀쳐 뒤로 눕히고는 그녀의 샤워 가운에 허술하게 묶인 허리끈을 잡아당겼다.
데비의 매끈한 나신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자 그는 만찬을 감상하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선을 훑었다.
데비의 뺨이 기대감에 가득 차 붉게 물들었다.
블레이크는 데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실망스러웠겠지.”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바라본다고 하던가.
전체 그림을 보게 된 후 자신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으로 살아왔는지 깨달은 지금, 데비가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고 싫어졌을까 봐 가슴이 떨렸다.
“뭐가요?”
데비가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냥, 모두 다.”
낳아만 주고 관심이 없다 생각해 어떻게든 눈길을 끌어 보려고 했던 온갖 문제 행동들이 떠올랐다.
굶고 아픈 척하다가 소용없자 악에 받쳐 기숙사에서 폭력 사건을 일으켰던 것도, 학교에서 크게 판을 벌여 물의를 빚었던 것도. 결코 고상할 수 없다고 할 만한 뒷골목 비즈니스에 뛰어든 것도, 데비에게 박제되어 두고두고 놀림당하는 ‘제국의 쓰레기통’ 타이틀까지.
아, 하나 더 있군. ‘사춘기 소년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질풍노도 시기 같아 닭살이 돋고 얼굴이 심하게 붉어지는 온갖 허세 섞인 행동들도.
더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조차 없게 망가지기 전에 불꽃 따귀로 그를 다잡아 준 데비였기에 그녀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살걸 그랬어.”
그가 얼굴이 붉어진 이유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데비가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데비의 손이 그의 탄탄한 복근과 둔부를 지나 윤곽이 뚜렷한 그의 허벅지까지 미끄러졌다.
“열심히 살았으니까 군살 하나 없이 멋진 몸을 가지고 있잖아요?”
데비가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다른 클라렌스가의 핏줄들이 다 화를 입은 것에 비하면 잘 빠져나가 재산과 사업을 지킨 것도 그렇고.”
클라렌스 후작이 남몰래 은닉해 두었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그의 수많은 아들과 가신의 이름으로 분산해 둔 것도 다 찾아내 징수하는 가운데 블레이크는 황제의 도움 없이도 재산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자신은 클라렌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적이 없다는 논리였다.
성도 바나바스이고 테리움 영지의 기록은 수탈 그 자체라는 점을 들었다.
오래전 클라렌스 후작이 테리움 영지의 반란을 진압한 후 블레이크에게 물려준 것에 대해서는 테리움 영지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끊어 냈다.
어차피 그의 기반은 영지가 아니었기에 ‘영지가 없으면 귀족으로서의 힘이 약화된다’라고 여기는 다른 귀족들과는 결을 달리했다.
데비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
“글은 자신감에 넘쳐 날카롭게 쓰더니 정작 당신은 왜 자부심을 갖지 못하나요? 거울 좀 보고 살아요. 이렇게 매력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