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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당연하지.”
하지만 혜주 씨는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왜죠?”
“위로 올라가거나 위에 있는 놈들 중에 깨끗한 녀석은 없거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이상에야 인간은 더러워지는 법이니까.”
“어……. 그 말인즉슨 혜주 씨도?”
“당연하지. 난 인간쓰레기야.”
그렇게 혜주 씨가 대답을 하고 대화는 약간의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잠깐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정현 씨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약점이 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서진아 씨, 였지?”
“네. 최 이사님에게는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고 합니다.”
“판도라의 상자라……. 노인네들이 생각할 법한 작명인데.”
“네. 서진아 씨의 말에 의하면 재단 전체의 비리가 아니라 최 이사님과 최 부장님이 함께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일종이라고 여겨진다고 합니다. 그 말인즉슨 회장님과 다른 이사님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겠죠.”
“그런 관계니까, 그들은.”
혜주 씨가 단정하듯이 이야기했다.
“성진, 뭔가 생각나는 거 없어?”
“예? 아……. 자, 잠시만요.”
최 이사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이라.
그렇게 잠깐 고민했지만 머릿속에 번뜩이듯 스치는 감각은 없었다. 애초에 서진아와의 관계는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고, 그 때문에 그쪽의 기억도 희미해졌던 것이다. 잠깐 서진아와 최 이사의 관계, 그리고 거기에 있을 법한 비밀을 혹시 자신이 들은 적이 있나 진지하게 고민해 보던 나는 뭔가 의문점이 하나 들어 고개를 들었다.
“…근데 그, 진아 씨로부터 들었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서진아 씨로부터 협력을 받기로 했습니다.”
“예?”
나는 놀라 되물었다.
“진아 씨는 최 이사 쪽에 있지 않나요?”
“그건 아니야. 제거당했거든. 당신과의 관계가 들켜서.”
“…저와의 관계요?”
“최 부장이 전했겠지. 이런 일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서진아는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말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서진아 씨는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더군.”
혜주 씨의 말에 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술집과 호텔에서 그녀를 심하게 대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못했다. 최 부장이 그럴 만한 인간이라는 걸 간파하지 못한 진아 씨에게 바보 같다는 기분보다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만큼 믿을 사람이 없었다는 건데.
“최 부장…….”
나는 이를 까득 물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견희 선배에게 한 일도 그렇고, 자신에게 간절히 매달려오는 진아 씨를 쳐낸 일도 그렇고 분노가 치밀었다.
잠깐, 견희 선배?
“한 가지,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말해 줘.”
“못 해요.”
“호오?”
“한 사람이 절 믿고 해준 이야기예요. 누구에게 무턱대고 말할 수는 없어요.”
“재미있네. 성진, 또 그 잘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가?”
“맞아요. 제가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그 사람이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강한 신념을 담아 혜주 씨를 바라보았다. 살짝 짜증을 내는 건지 담배 하나를 빼 든 혜주 씨가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계약 내용을 변경하죠.”
“네 쪽에서 제안하고 싶은 거구나.”
“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저는 앞으로 당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정현 씨를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
“서, 성진 씨…….”
옆에서 정현 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만류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나는 오금이 살짝 저려오는 것 느끼면서도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위선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하지만 그 위선을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조금씩 바뀌어 나가고 싶어요.”
“정현이 너로 인해 변한 것처럼?”
“네. 정현 씨가 있다면 전 변할 수 있을 겁니다.”
“뭐, 다시 알바라도 하려고?”
“…그래야겠죠.”
내 말에 혜주 씨는 입을 다물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쫓겨나지는 않을까, 아니면 총이라도 맞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모든 계약을 파기하고 쫓겨나 정현 씨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약간 초조해하던 나는 진땀을 흘리며 말을 덧붙였다.
“시, 시키시는 건 웬만하면 해드리는 ㄱ…….”
“…푸훕!”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혜주 씨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엥……?”
“푸하하하하! 하하, 아하하하! 하하하하!”
그녀는 지금껏 내가 못 보던, 완전히 폭소의 도가니탕에 빠진 모습으로 배를 잡으며 웃기 시작했다. 듣는 이쪽이 대체 뭘 잘못해서 저러는 걸까. 혹시나 저대로 웃다가 갑자기 이마에 총을 겨누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 정도로 뜻밖의 행동이었다.
“아~ 아, 하하… 하.”
“혜주 씨?”
“성진, 자기는 역시 최고야.”
“죄, 죄송합니다.”
“미안할 게 뭐 있어.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해줘야지. 하지만…….”
혜주 씨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짓궂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돈은 못 주겠어. 당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각오한 바입니다.”
오히려 그래 주었으면 했다.
“좋아, 나쁘지 않네. 그거라면 아무 문제도 없지. 자기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테고……. 여자들과의 관계는 정리하기 힘들겠지만.”
“그것도 다 이끌고 나갈 겁니다.”
“엥? 정말?”
“네. 그녀들은 절 받아들여 줬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며시 건너편에 있던 정현 씨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느닷없는 행동에 얼굴이 빨개져서는 고개를 돌렸다.
“…니들 셋이서 했니?”
“그건 프라이버시라는 걸로.”
“정현… 변태가 되라고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죄, 죄송합니다.”
“그걸 또 받아들인 서연 양도 대단한 사람인 거 같은데…….”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린 혜주 씨는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왠지 모르게 어른의 고민이 엿보이는 듯한 행동에 나와 정현은 입을 다물었다.
“젊은 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니까.”
“네?”
“아니야. 더 생각하면 내가 늙은 것 같으니까 그만할래.”
그녀는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성진 씨, 그렇다면…….”
“네. 견희 선배를 설득하고 다시 연락할게요.”
“그렇다면 저는 진아 씨와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만……. 그 전에.”
정현 씨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품속에서 웬 카드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근처에 있는 호텔의 카드 키였다.
“서진아 씨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네에?”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 사람은 상처받고 무너진 사람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 정현 씨…….”
나는 약간 슬픈 표정을 감추는 듯한 정현 씨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에게도 당신의 용기를 나누어 주십시오.”
“…알았어. 하지만.”
“하지만?”
“돌아와서 데이트하자.”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을.”
“둘이서만. 놀이공원은 어때?”
“한 번도 가본 적 없습니다만…….”
“재미있을 거야.”
“성진 씨와 함께라면 어디든 재미있을 겁니다.”
“나도.”
어느새 우리 둘은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정현의 눈동자는 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 모습에 천천히 입술을…….
“아~ 나가서 해!”
혜주 씨가 참지 못하고 양장본 책을 집어 던졌다.
* * *
몇 번을 고민하며 주변을 돌아다닌 끝에 결국 내가 결심을 세우고 호텔로 향한 것은 늦은 밤이 되고 나서였다.
어쩐지 약간 긴장이 되는걸.
그렇게 느끼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불빛으로 가득한 방 안에 진아가 앉아 있었다. 곳곳에 향이 나는 촛불을 켜두고 있는 데다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모습. 하지만 나는 고급스럽다기보다 어쩐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처럼 느껴졌다. 식탁 위에 올려둔 명품 백, 입고 있는 비싼 옷들. 그 모두가 진아를 대변하는 존재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 껍데기만 뒤집어쓴 채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뭘 봐?”
진아가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뭔가 대답하려던 나는 섣불리 이야기를 해봤자 반발만 살 뿐이라는 생각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나랑 하려고 온 거야? 네 여자로 삼으려고?”
까칠한 목소리. 본능적으로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커다란 눈동자에서 강렬한 적의가 느껴졌다. 나는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당신 이야기는 들었어.”
“그래서 위로해 주겠다?”
“미안해. 내 실수야.”
“내? 하! 좋은 말만 늘어놓는군.”
진아는 내 사과를 가차 없이 비웃었다. 그녀는 빙상처럼 유리잔 안을 타고 움직이는 와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한성진,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정현 같은 순진한 애들한테나 통하는 거야. 내 앞에서 허튼수작만 부렸단 봐.”
죽여버릴 테니까.
그녀는 뒷말을 흐리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벽으로 던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핏물 같은 액체가 번졌다.
“돌아가. 너하고 할 얘기는 없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한 진아는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턱을 괸 채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이 시선을 돌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때까지, 끝내 당신을 감추는 거야?”
가벼운 도발.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은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도 되잖아. 왜 굳이 그런 자신을 연기하려는 건데? 그런 걸로 얻는 게 뭐가 있다고.”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지며 진아를 바라보았다. 붉은색 립스틱, 연갈색의 웨이브진 머리, 비싸 보이는 목걸이와 옷. 그녀가 굳이 그런 자신을 입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로써 부족한 자신이 가장 쉽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대학생 한성진은 비싼 양복을 입음으로써 태왕의 일원이 된다. 아름다운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고 섹스를 하며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진짜 나는 여기에 있다.
서진아가 숨어 있는 것처럼.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추천/댓글 한번씩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진이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좀 느끼한 놈이 되가는거 같지만...
얘가 국문과니까 그냥 문학청년이라는 셈 치고 봐주세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