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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그럼 이만.”
“잘 가요오.”
나는 정현 씨를 배웅하고 이내 뒤로 돌아섰다. 어둠과 침묵으로 물든 방 안. 머릿속이 살짝 복잡해졌지만 이내 피로감이 몰려들어 나는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잠들어 있다.
세상모른 채.
“…….”
한계를 넘어서, 그리고 몇 번이나 더 가버려서.
세상에 태어났을 때와 같은 모습을 한 채.
“성, 진…….”
저 왔어요.
나는 그런 혜주 씨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당겨 품에 안았다. 팔베개를 가볍게 해주고 새하얀 시트에 몸을 맡기자 잠이 쏟아졌다.
눈을 감고…….
“차돌, 된장찌개…….”
…내일 아침 메뉴는 정해졌군.
【외전 3: 김서연 양의 성 정체성】
사실 김서연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미모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어 자신의 앞에 미(美)라는 접두사가 붙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사실 스무 살을 넘긴 이후로 ‘소녀’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타당한지 조금은 신경이 쓰였지만 어쨌든 예쁘니까 괜찮아! 라는 심정으로.
거기에 어~엄~청 멋진 남자 친구까지 생겨서.
조금 이상한 관계까지 발생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제외하고 여섯 명. 도리어 그 부분도 친구나 여동생, 혹은 언니가 생겼다고 여기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이 친구가 생겼다는 부분이 요새 들어 과연 괜찮을까 싶었던 것이다.
“…….”
보통 친구끼리 그걸 하나?
그리고 그렇다면 다들 그런 걸 느끼나?
그거, 가 뭐냐고 묻는다면 역시…….
“세수?”
“히꺄악?!”
오전의 카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서연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섹스?! 섹스?!
“섹……!!”
하고 입으로 내려던 순간, 눈앞에 있는 ‘친구’의 모습에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고 진정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견희는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였다. 그런 모습에 서연은 입을 다물고 눈을 마주쳤다.
“어, 왜?”
“졸리면 세수라도 하고 옴이 어떤가 해서…….”
“조, 졸리진 않은데?!”
“아까부터 멍하니……. 뭐 하는 거니? 공부는 네가 하자며.”
“그, 그랬…나?”
“응.”
그랬지.
서연은 그렇게 말을 마치는 견희의 모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식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하고 고소한 바디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자니, 안경을 쓴 견희는 다시금 시나리오의 집필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펌을 해서 부드럽게 뺨을 가리는 검정색 머리칼. 붉은색의 강렬한 입술에 만년필의 끝자락이 머물다 이내 스륵 내려갔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을 고치는 견희의 모습에 서연은 저도 모르게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무척이나 어른스러워 보였다.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화장을 비교적 옅게 하는 자신과는 달리 견희는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옷도 청바지나 재킷 같은 걸 좋아하는 자신과는 달리 항상 화사하게 스커트나 원피스로 여성스러운 매력을 발산해 서연은 그런 견희에 대해 가끔 존경심을 느끼고는 했다.
자신에게 평소부터 저렇게 하고 다니라면 무리니까.
오빠가 그렇게 하시라면 기꺼이 하겠지만, 또 그럴 분은 아니시라.
화장은 피부에 달라붙는 일종의 가면 같은 것이라 짙을수록 무거워지는 경향이 큰 물건이었다. 물론 견희의 솜씨가 훌륭하기에 겉으로 봤을 때 티는 전혀 나지 않았지만 본인이 느끼는 감각은 다를 것이다.
음, 결론은 예쁘다는 거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자신과 다른 면모를 지닌 그녀가.
“…….”
“뭐, 뭘 그렇게 보니? 토익 공부 한다면서.”
“아, 아니야아.”
잠시 그런 긴 속눈썹을 빤히 바라보던 서연은 견희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들자 시선을 피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비쳤던 것일까. 가만히 고개를 또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갸웃거리던 견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올 거야.”
“누, 누가?”
“정현이.”
아, 그랬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 슬슬 점심. 일본 여행 관련으로 회의를 하기 위해 정현이 온다고 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잠시 한 페이지도 진도를 나가지 못한 토익 교재를 내려다보던 서연은 이내 뭔가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근데 너랑 정현 언니랑… 언제부터 그런 거야?”
“뭘?”
“그, 말 놓은 거.”
“아, 그거…….”
얼굴이 빨개졌다. 귀엽다. 으, 저렇게 회피하듯 시선을 돌리는 것도 어쩜 저렇게 여성스러운 거지. 손에 들고 있는 만년필도 무척이나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어서.
“지난번에 여행을 함께 갔었는데…….”
“뭐어?! 어, 언제! 나만 쏙 빼놓고!”
“어, 어쩔 수 없었단다? 그럴 만한 자리도 아니었고 그때는 음, 우리 사이가 이렇지 않아서.”
“그, 그건 그렇지. 크흠.”
어쩐지 부끄러워져 서연은 크게 헛기침을 했다. 잠깐 그런 서연을 빤히 바라보던 견희는 이내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어 테이블 위를 맴돌던 손을 맞잡았다.
“어쨌든 이번에는 같이 가는 것으로.”
“그, 래…….”
“얼굴이 빨간데, 어디 아프니?”
네가 너무 예뻐서 어쩔 수가 없다고.
…라며 한성진 씨 특유의 시그니처 대사를 말할 수도 없어 서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견희와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견희의 모습에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아, 왔네.”
견희가 그런 자신의 뒤쪽을 넘겨다보며 손을 들었다. 따라서 자연히 고개를 돌린 서연은 카페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다 이내 이쪽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정현을 발견했다. 자신보다 훨씬 화장기가 없다시피 한 단정한 얼굴, 거기에 검정색 바지 정장. 길게 빠진 다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서연은 다시금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멋지다.
잘생겼다아.
“잘 지내셨습니까.”
저 무뚝뚝한 목소리도 믿음직한 것이…….
“응, 정현이도?”
“네. 혹시 두 분 식사 안 하셨으면…….”
밥부터 먹자니. 어머, 남자다워.
“그럴까? 일단 일어나자, 그럼. 근데 서연아?”
“서연 언니?”
“후꺄악!”
멍하니 있던 중, 서연은 얼굴을 감상하던 정현이 갑자기 손을 뻗어와 펄쩍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다시금 제자리. 심장이 뛰어 당황해하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바, 밥이요?!”
“네, 밥.”
“BOB!”
“…서연 언니?”
“하아, 얘 토익 공부 한다더니. 왜 이러는지.”
“이, 일단 일어나자고! 점심, 점심……. 뭐 먹을래?”
당황한 서연은 머릿속의 잡념을 털어내고자 일어서 제대로 읽지도 않은 토익 교재를 가방 속에 밀어 넣었다. 잠깐 당황해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 하지만 딱히 뭐라 할 여지도 없어 견희가 가방에 공책과 만년필을 넣고 세 사람은 카페를 빠져나왔다.
공기는 차가웠다.
“음, 뭘 먹을지 정해두고 나올 걸 그랬나…….”
약간 추운지 팔짱을 끼며 중얼거리는 견희,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정현이 이내 찬바람을 가리듯 옆에 서며 입을 열었다. 서연은 그 광경이 마치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하다고 생각하며 무척이나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일단 차로 가심이 어떻습니까?”
“응, 그럴까?”
“네. 시내로 나가보는 걸로. 뭔가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있습니까?”
“음, 글쎄? 나는 뭐라도 괜찮은데, 서연이 넌 어떠니?”
“백합…….”
“응?”
“백, 백 선생님 프랜차이즈?!”
“…….”
“음.”
무의식중에 나온 말을 서둘러 수습을 해보았지만 제대로 통하지 않아 견희와 정현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런 어색함을 억지로 깨뜨리기 위해 서연은 이를 악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모, 몰라! 아무거나 먹어! 추우니까.”
“어머, 얘는…….”
“그렇다면 차로 안내하겠습니다.”
나쁘지는 않은 걸까. 견희와 정현이 제각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세 사람은 사이좋게 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연은 이내 스스로가 옛날 만화에 나왔던 반은 남자에 반은 여자인 한 캐릭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영어 공부가 필요하시다면…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왼쪽의 정현. 거기를 돌아볼 때의 자신은 여자.
“얘, 조금 천천히 걸어주면 안 될까? 오늘 좀 굽이 높아서…….”
오른쪽의 견희. 거기를 돌아볼 때의 자신은 남자.
약간, 아주 약간이지만 흥미가 생기는 것이었다.
* * *
그래서 성진에게 물을까 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 사람은 이런 쪽으로 괴롭히면 진지하게 죄책감을 느낄 거란 말이지…….”
자기가 일곱 명하고 뭐 그런 관계가 된 것에 대해서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져서.
그래서 굳이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 간에 적당히 넘어가고 있는 부분이니까. 안 그래도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은 사람을 그렇게 마음고생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고민의 골은 깊어져 그 끝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단 말입니다!”
라고, 누구에게 하는 외침인지 모를 것을 뱉어내며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만나자 하여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 그녀는 이대역 근처에 도착해 ‘데이트 상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주말 점심이라 그런지 커플들이 많이 돌아다녔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서연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오늘은 잔뜩 힘을 줘 꾸미고 왔기 때문이었다. 피부가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정교한 화장에 원피스, 코트까지 걸친 그야말로 여성성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복장. 머리도 오늘은 고데를 잔뜩 해 준비하는 것에만 세 시간이 넘게 들었다.
그렇기에 완벽한 것이다.
“나는 미소녀. 후후.”
거기에 남자들이 여러 번 번호를 물어봐, 물론 모조리 거절했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서연은 자부심을 느꼈다. 이런 자신이 너무나도 예쁘고 완벽하다고 느껴 화장실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어 성진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기에 오늘 데이트하러 가요~ 라며 메시지까지 남겨.
“조금은 더 신경 쓰고 걱정하라고요……?”
가벼운 장난을 친 서연은 이내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현이 서 있었다. 오늘은 쉬는 날이니만큼 그녀 역시 짧은 바지에 스타킹을 신어 꾸미고 온 듯한 모습이었지만, 서연은 자신에게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 멋져질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