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건물주의 하루 (1)
건물주의 하루 (1)
창가로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고 있었다.
“으음......”
민재는 햇살에 눈을 떴다.
침대 옆 수납장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들어 보니 아침 9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는 일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핸드폰 알람을 맞춰 놓고 자야할 만큼 시간에 쫓길 일은 없었으니까.
민재는 어지간해서는 마스터룸 창가의 커튼을 가리지 않았다.
현재 민재의 사는 집은 50층 아파트의 48층,
주변에 이보다 높은 건물은 코엑스 건물과 몇 년 후 들어서게 될 현대 사옥뿐이었다.
“아함~”
민재는 기지개를 쭉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살고 있는 삼성동 A아파트의 마스터룸은 이 집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넓었다.
마스터룸은 우선 침대와 작은 탁자와 의자가 있는 침실,
침실 안쪽에 있는 넓은 드레싱룸과 큼지막한 전신 거울이 있는 피팅룸,
드레싱룸 옆에 있는 작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마스터룸 욕실,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아침밥을 먹기 위해 아파트를 계약할 때 이곳 관리실에서 제공해준 태블릿을 켜고 인터넷으로 아파트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아침 밥 먹는데 왜 인터넷에 아파트 홈페이지로 들어가냐고?
A아파트는 조식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조식 메뉴로는 토스트와 샌드위치, 과일쥬스와 씨리얼이 있는 간편식과,
밥과 국, 여러 정갈한 반찬들이 있는 한국식 식단,
생선구이와 낫토 등을 메인으로 하고 있는 일본식 식단,
심지어 잉글리쉬 브렉퍼스트도 있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주문을 하면 바로 조리를 시작해서 집까지 배달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비용은 다음 달 아파트 관리비에 포함되어 청구된다.
혼자 사는데 아침은 꼭 챙겨먹는 민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서비스였다.
민재는 간편식을 주문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그리고 드레싱룸으로 들어가 잠옷을 벗고 집에서 입는 통이 넓은 편안한 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마스터룸을 나오면 넓은 거실이 나온다.
거실에는 누울 수 있을 만큼 넓은 카우치 스타일의 소파와 대리석 테이블, 벽에 걸린 초대형 TV가 있었다.
민재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 TV를 켜고 뉴스 채널을 틀어 놓았다.
[어제 닛케이지수가 장중 한때 15%가량 급락하며......]
TV로 뉴스를 틀어놓고도, 눈은 계속 손에 든 핸드폰으로 인터넷에서 또 다른 뉴스들을 확인하고 있다.
귀로도 뉴스를 듣고, 눈으로도 뉴스를 보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멀티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요즘 같은 시기에 무리한 주식 투자는 너무 위험한 일인 거 같아. 당분간 자본은 안전한 은행에 맡겨두고 있다가 다시 투자 적기가 오기를 기다리자.’
필요한 뉴스를 모두 확인한 후, 이번엔 업무용 단톡방을 열어보았다.
업무용 단톡방 내용은 별 거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서울 내 8개 건물의 각 관리인들이 전날 밤 건물의 특이사항 등을 보고한 내용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대치동 이상 없고, 서초동, 압구정, 이태원 이상 없고...... 방배동, 이촌동 금일 새 세입자 입주 예정...... 합정동 이상 없고...... 등촌동 금일 분뇨수거차 방문 예정? 분뇨수거차면 똥차인가?’
초반에 건물을 하나씩 늘려가던 때에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자신의 건물들을 찾아가서 직접 건물 상황도 체크하고 세입자들과도 만나 여러 건물에 대한 애로사항은 없는지 이야기도 나누고 좋은 건물주가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었다.
그런 자신의 적극적인 모습이, 세입자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는 세입자들 입장에서는 건물주를 만나는 게 얼마나 부담되는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지. 원래 건물주라는 존재는 세입자들 눈에 자주 안 띄는 게 그 사람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만.’
그래서 지금은 각 건물에 관리인을 고용해 관리인들이 건물을 관리하게 하고 직접 방문은 자제하고 있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는 건물이라면, 집에서 가까운 대치동에 있는 10층짜리 건물이었다.
그곳은 1층에는 카페, 2층부터는 여러 개인 병원들에게 세를 준 곳이었는데, 그곳 최상층 10층에 나만의 헬스장, 나만의 운동 공간을 마련해 놓아서 수시로 드나드는 중이었다.
나만의 헬스장을 만들기로 결심했던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삼성동으로 이사 온 후 아파트에서 가까운 헬스장을 찾아 등록을 했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안에도 헬스장이 있었지만, 운동을 좋아하는 그가 봤을 때 마음에 들 정도의 시설과 장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에 괜찮은 헬스장을 찾아 등록하면서 회원 정보에 주소를 적었는데,
민재가 이 동네에서 제일 비싼 A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헬스장 트레이너들이 어떻게든 민재에게 PT를 따내 보려고 수시로 다가와서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닌가?
“회원님~ 스쿼드 하실 때 무릎은 좀 더 고정시켜 주셔야하고 엉덩이는 좀 더 뒤로 빼셔야 해요~ 만약 저한테 PT 받으시면 좀 더 정확한 자세로 운동을 배우실 수 있으실 거 같은 데, PT 받아보실 생각 없으세요~?”
“회원님~ 풀업 하실 때 배치기 반동 넣으시면 운동효과 하나도 없어요~! 저한테 PT 받으시면 반동 없이도 풀업 한꺼번에 20회 3세트 반복! 거기에 악마의 얼굴 같은 등 근육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는데, 저한테 한번 PT 받아 보실 생각 없으세요~?”
운동 리듬 끊어지게 트레이너들이 계속 말을 걸고 PT 등록 유혹하는 것이 보통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남자 트레이너들은 말로만 꼬시는데, 여성 트레이너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스킨십까지 하며 달려들었다.
“회원님~ 벤치 프레스 하실 때는 어깨와 가슴을 활짝 펼 수 있도록 허리 부분을 벤치에서 살짝 이격시켜 주셔야 하구요옹~”
도와달라는 말도 안했는데, 여성 트레이너들은 운동을 하고 있는 민재에게 다가와 손가락 끝으로 그의 가슴과 옆구리를 사르르, 훑고 만지며 그를 유혹하듯 말하곤 했다.
도저히 운동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민재는 그 헬스장을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냥 근처에 호텔 휘트니스에 가입해봐?’
삼성역 근처에 있는 유명 호텔의 휘트니스 센터를 찾아가 알아보니 연회비가 1억 정도란다.
대신 시설도 만족스럽고 운동하는 환경도 좋기는 한데,
‘야~ 그 돈이면 차라리 내가 장비 사서 나만의 헬스장 만드는 게 더 낫겠다! 어차피 나 건물도 있는데 남는 공간에다가 만들면 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결국 대치동 건물에 나만의 헬스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띵동~
벌써 아침식사가 배달 온 모양이었다.
문을 열어보니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예쁘장한 아르바이트가 아파트 조식 서비스를 배달하러 와 있었다.
“조식 서비스입니다,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다 드시고 그릇은 현관 앞에 놔 주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민재는 씨익 웃으며 알바가 건넨 조식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샌드위치랑 토스트라 금방 해서 가지고 오네.”
그는 아침을 먹고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외출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피팅룸의 거울을 통해 옷매무새를 확인해 보는 민재.
“흠...... 오늘 나쁘지 않네.”
공들여 드라이한 머리도, 신경 써서 코디한 의상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사실 민재가 강남 삼성동 A아파트 사는 부자가 아니었더라도, 여성들의 시선을 충분히 끌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약간 공유를 닮은 외모에 185cm의 크고 늘씬한 키, 군대 있을 때부터 선임들과 함께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한 덕에 제법 단단한 체구까지 가지고 있어, 어디가도 절대 빠질 얼굴과 몸매는 아니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까지 쭉 내려갔다.
입주민 전용 주차장 그의 자리에는 그가 소유한 두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민재가 면허를 딴 후 가장 먼저 산 차는 페라리 F8 트리뷰토였다.
하지만 페라리는 매일 타고 다니는 데일리 카로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는 얼마 안 가 편하게 타고 다닐 차량으로 은색 메르세데스 벤츠 S-Class를 더 구입하게 되었다.
‘그래도 오늘 갈 곳이 갈 곳이니 만큼, 지금은 페라리를 타는 걸로.’
그는 페라리 F8 트리뷰토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우와아앙~!
엔진의 굉음과 함께 그의 페라리가 영동 대교를 향해 달려나갔다.
* * *
그가 도착한 곳은 압구정로 명품 거리에 있는 루이XX 메종 매장이었다.
매장 앞 인도까지 차를 몰고 들어가니, 매장 발렛 요원들이 다가왔다.
차키를 넘겨주고, 안주머니에서 작은 초대장을 꺼내 매장 정문을 지키는 가드에게 보여주는 민재.
“신디 초대로 이벤트 보러 왔습니다.”
초대장을 본 가드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매장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민재는 그들의 인사에 가볍게 목례로 답하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루이XX의 직원 신디가 밝은 웃음을 띠며 달려 나왔다.
“어머, 고객님 오셨어요? 시간도 딱 맞춰서 오셨네요!”
“제가 늦은 건 아니죠?”
“늦기는요, 제시간에 아주 정확히 오셨는걸요? 자, 이제 저와 같이 올라가시죠!”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곱게 빗은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루이XX의 검은색 근무복을 입고 있는 신디는, 민재의 팔을 친근하게 잡으며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