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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건물주의 하루 (3) (4/140)



〈 4화 〉건물주의 하루 (3)

건물주의 하루 (3)





오후 8시 반이 되고, 민재는 다시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신디와 만나러 나가는 길이었다.




낮에 통화가 가능하냐는 신디의 문자에, 민재는 똑같이 문자로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일이신가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민재의 회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녀의 답장은 상당히 빨리 날아왔다.



[아무래도 제가 고객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거 같아 죄송해서요.  때문에 취향에도 맞지 않는 제품 보러 먼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저녁이라도  드리면서 제대로 사과를 구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민재는 문자를 읽다 말고 피식 웃음이 터졌다.



‘먼 길은 무슨, 삼성동에서 청담까지 차로 5분, 10분이면 되는 거리인데.’

그래도 참, 민재는 이 직원이 생각하는  귀엽다고 느껴졌다.



자기가 고객 기분 상하게 했으니 저녁을 사 주겠다?




본인 월급의  세배가 넘는 명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고객한테 ?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 겪어봐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 걸 보고 참신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기발하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쉽게 감을 잡을  있었다.

그래도 내심 싫지는 않았다.



‘몇 번 만나봤지만 나쁜 사람도 아닌 거 같고, 어차피 오늘 저녁에 약속도 없는데 간만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누면서 함께 저녁 먹는 것도 괜찮잖아?’




그런 생각에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는 페라리 대신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가기로 했다.



어디로 갈지 확실히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페라리를 끌고 나갔다가는 자칫 낭패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라리 F8 트리뷰토는 여느 스포츠카들처럼 차체가 매우 낮은 편이다.




그래서 과속방지턱이 많은 곳을 지나야 하거나 주차를 하기 위해 도로턱이 높은 곳에서 인도나 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차체 하부에 손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시동을 켜며, 그녀에게 어디로 가자고 할지 고민해 보았다.


‘군대 전역 한 이후로 다른 사람한테 밥 얻어먹는 게 이번이 처음인거 같은데? 어디로 가자고 해야 하지? 내가 먹고 싶은 데로 가려면 음식 가격 때문에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 할지도 모르고, 이게 지금 데이트 하러 나가는  아니니 굳이 분위기 좋은 데로 가자고  필요는 없을  같고...... 아, 그 사람 입장에서는 이걸 데이트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직까지는 서로의 관계를 명확히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아무래도 거기가 좋겠군.’



그는 신디에게 저녁 식사로 무엇을 사달라고 할지 마음속으로 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말...... 이거로 괜찮으시겠어요......?”




신디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민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민재는 퇴근한 그녀를 차에 태우고 루이XX 매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청담 버거X 매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네,  햄버거 엄청 좋아해요. 모처럼 얻어먹는 거니까, 이번에 새로 나온 스페셜 프리미엄 와퍼 세트로 부탁할게요!”



“햄버거 좋아하시면  옆에 조금만 더 가면 쉐이XX 도 있는데, 차라리 거기가 낫지 않으세요? 이런 곳으로 모시려고 했던 게 아니라서요......”




“쉐이XX도 맛있기는 한데, 버거도 너무 작고 가성비도 별로에요. 차라리 여기가 맛도 좋고 푸짐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결국  사람은 이곳에서 햄버거를 주문해 받아들고 2층에 있는 테이블로 이동했다.



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적한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았다.


민재는 자신이  한대로 큼지막한 버거에 프렌치프라이, 콜라 자리 사이즈를 주문했지만, 신디는 버거 없이 치즈프라이와 콜라, 이렇게만 주문했다.

‘역시,  사람 의도는 따로 있었네.’




민재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데이트 때 반드시 피해야 하는 대표적인 음식이  가지가 있다.




짜장면, 떡볶이, 그리고 햄버거다.


먹다가 입가에 소스가 묻는 음식, 치아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게 되는 음식, 손에 들고 먹어야 하거나 지저분하게 흘리게 되는 음식은 절대로 삼가야 하는 것들이었다.

첫 만남부터 입가에 거무튀튀한 짜장 소스를 잔뜩 묻혀야 되거나, 떡볶이 먹고 미소 지으려다가  사이에 낀 큼지막한 고춧가루가 그대로 드러나거나, 햄버거 손에 들고 먹다가 입과 손에 마요네즈가 다 묻고, 옷으로도 양상추와 토마토가 뚝뚝 떨어진다고 상상해보라. 그 모습을 보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려는 마음이 생기려 하다가도 다시   생각하게 되지 않겠나?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보이는 것이 목적이었을 테니, 햄버거를 엄청 좋아 한다하더라도 절대 고를 수 없었겠지.



“잘 먹겠습니다~”



민재는 신디를 향해 미소 지으며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저...... 혹시 식사비 때문에 제가 부담을 느낄까봐 염려하셔서 이런 곳에서 저녁 사달라고 하신 거면, 저 정말 괜찮아요. 저 고객님 덕분에 지난 달 인센도 많이 받아서 통장에 돈 넉넉하거든요.”

“제 덕분에 인센 얼마나 받으셨는데요?”



“지금까지 고객님 덕분에 받은 인센만  백만 원은 넘을 거에요. 그렇게 인센 받는  웬만큼 오래 일한 시니어들 아니면 힘든 일이거든요. 그래서 고객님께 감사의 뜻도 전하고, 오늘 혹시 저 때문에 매장까지 괜한 발걸음 하셔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려고 모신 건데...... 햄버거만 사드리는 게 너무 죄송해서 그래요.”


“전 정말 햄버거 좋아해서 신디한테 이거 사달라고 한 건데? 그리고 저 오늘 신디 때문에 불쾌한 거 전혀 없었어요. 덕분에 새로 런칭한 시계들도  감상 했고, 겸사겸사 자코메티 작품들도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는데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 때, 신디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밖에서 계속 고객님한테 고객님, 고객님 하고 부르니까 이상해서...... 사람들도 이상하게 쳐다보고...... 물론 고객님이 제 고객님이라 고객님을 고객님이라 부르는 게 맞긴 하지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제부터 제가 고객님을 민재씨....... 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 물론 여기 밖에서 만요! 나중에 매장에서는 다시 고객님이라고 부르구요!”

이 사람 참, 진도를 이렇게 나가네......

“네, 편하게 부르셔도 되요. 그런데 제가 신디 본명을 아직 안 물어 봤네요? 신디 본명은 뭐에요?”


“저 시은이에요. 유시은.”



“시은씨...... 이름 참 예쁘네요. 그런데 왜 본명  쓰고 가명을 써요?”

“원래 회사 방침이 그래서요......”


신디, 아니 시은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이 무척 단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 *

햄버거를 다 먹은 후에도, 시은은 그의 팔을 꼬옥 붙잡고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


“정말 어렵게 모셨는데, 제가 이렇게 민재씨한테 햄버거만 먹이고 보내면 너무 마음이  좋을 거 같아서요...... 그러니 이번엔 제가 다른 데로 모실게요!”


“저 이미 배부른데?  다른 데로 가자구요?”



마치 슈렉 고양이 (애니메이션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은의 애절한 눈빛 때문에, 결국 민재는 그녀가 가자는 곳으로 차를 가지고 이동하게 되었다.


* *



그녀가 민재를 데리고 간 곳은 강남에 있는 커다란 고기집이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소고기와 소주를 주문했다.


“저 차 가지고 왔는데요?”



민재가 난감해 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대리 불러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저랑 마음껏 마시는 거에요~! 민재씨 술 약하거나 그러진 않죠? 저보다 먼저 취하거나 뻗으면 안 돼요~!”


그녀는 술에 자신 있는 듯, 생글 생글 웃으며 그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 * *




‘자기보다 먼저 뻗지 말라며?   먹는  알았더니, 니미.....’


술에 자신 있기는 개뿔,


그녀는 소주 두 병 마시고 그대로 자리에 뻗어 버렸다.



결국 민재는 여기 고깃집에서 먹은 비용을 모두 자신이 결재하고, 대리를 불러 그녀를 자신의 차에 태워 집에다 바래다주려고 했다.


“시은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집이 어디에요? 집까지 바래다 줄 테니까 집이 어딘지 좀  해봐요?”


“@#$%^&*~”



시은이 뭐라뭐라 말은 하는 것 같은데, 너무 취해서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못 알아들을 것 같았다.



일단 민재는 그녀의 지갑에서 민증을 꺼내 주소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 주소에 사는 거 맞겠지? 혹시 부모님 집이거나 전에 살던 집이면 어떡하지?’



그래도 시은을 자신의 집에 데려가 재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리기사가 도착하자, 민재는 일단 민증에 있는 주소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 *



불행히도 민증에 나와 있는 주소는 그녀가 예전에 살았던 집이었다. 이미 그곳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이었다.

“아놔...... 이걸 어떡하지?




그녀를 들쳐 엎고 차로 돌아오던 도중 한 가지 묘안이 생각났다.



그는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시은을 다시 차에 태운 후, 운전석에 앉아 있는 대리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제가 지금 대리비에서 10배 더 드릴 테니까 지금 다른 데로 가주시겠어요? 대리비는 바로 기사님 통장으로 송금해드릴게요.”

“아이구, 그럼 당연히 해드려야죠! 어디로 모셔다 드릴까요?”

“압구정로데오역 근처에 있는 P호텔로 가주세요. 그리고 거기 들렸다가  여자분 내려놓고 삼성동 A아파트로 가주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거기 호텔에 여자 분만 모셔다 드리고 댁으로 돌아가시려구요?”




“네, 맞아요.”

“사장님, 나이도 젊으신 분이 상당히 호인이시네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술이 떡이 되가지고 날 잡아 잡수~ 하고 있는데 그냥 이렇게 하시는 걸 보니.”



대리기사의 능글맞은 말투에 민재는 괜히 낯이 뜨거워졌다.

“저희 사귀는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 같은 시대에 그런 짓 하면 바로 철캉철캉 경찰서 가잖아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는 법인데...... 아무튼 사장님, 참, 착하신 분인 거 같네요. 복 많이 받으실 거에요~”



대리기사는 곧장 압구정로데오역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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