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건물주의 하루 (16)
건물주의 하루 (16)
저번과 마찬가지로, 다음날 아침 시은은 걸음을 걷기 약간 불편해 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아직까지는, 민재의 그곳에 좀 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호텔에 가면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그것, 호텔 조식을 먹기 위해 민재의 팔짱을 끼고 식당까지 씩씩하게 걸어갔다.
“음...... 역시 F호텔에 비해 조금 부족해 보이네요?”
시은은 D호텔 조식 뷔페들의 메뉴들을 보고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D호텔 조식 뷔페의 수준은 절대 나쁜 정도는 아니었지만, 바로 직전에 시은이 우리나라 최고급 호텔 중 하나인 F호텔을 다녀온 여파가 컸을 것이다.
“여기는 4성급 호텔이니까요. 아무래도 5성급 호텔과는 조금 비교될 수밖에 없겠죠.”
“사람들이 호텔 선택할 때 별이 몇 개인지 꼭 확인하는 이유가 이거였군요? 별 하나에 조식 뷔페 메뉴 가짓수가 대체 몇 개나 차이 나는 거야......?”
그래도 시은은 F호텔에 비해 메뉴 가짓수는 부족해도 맛은 괜찮다며, 앉은 자리에서 민재가 가져다주는 음식들을 무려 다섯 접시나 비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객실로 돌아와 함께 샤워를 한 후, 옷을 챙겨 입고 호텔을 나섰다.
“시은씨 혹시 운동 하시는 거 있어요?”
민재가 시은을 위해 메르세데스 벤츠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를 안으로 모셔주고는, 자신은 운전석에 앉으며 물었다.
“전에 필라테스 학원 다녔었는데, 요새는 너무 바빠서 재등록을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운동복은 가지고 있죠?”
“네, 당연하죠.”
“다음에 잠실 L호텔 갈 때에는 시간 내서 호텔 피트니스룸에서 함께 운동해도 좋을 것 같아서요. 그때는 트윈스 유니폼 말고 땀 흘리고 운동할 수 있는 운동복도 챙겨 오세요. 물론 호텔 피트니스룸에도 운동복이 준비되어 있겠지만은, 다른 사람들이 돌려 입던 것보다는 자기 것을 챙겨가는 게 아무래도 더 좋겠지요.”
“아, 맞다. 민재씨 운동 잘 하죠? 저한테 운동도 가르쳐 주시고 커플 운동도 같이 하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무에타이요?
“아니요, 그냥 운동이요~!”
“하하,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잠실 L호텔 갈 때 함께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났네요. 점심 먹고, 야구 보고, L호텔에서 피자 시켜 맥주랑 같이 먹으면서 서울 전경 내려다보고, 그 다음날 커플 운동까지.”
“맞아요, 호호.”
“다음 데이트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참, 앞으로 계속 시은씨한테 스윗한 모습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죠? 자, 그럼......”
민재가 손을 뻗어 조수석 안전벨트를 잡아 당겨 그녀의 몸에 채워주었다.
“이보다 더 스윗할 수 있도록 노력 많이 할 게요.”
민재가 시은을 바라보며 웃었다.
시은도 수줍게 웃으며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민재씨. 지금 모습만으로도 너무...... 사랑스러워요.”
시은의 볼 뽀뽀에 함박웃음을 짓는 민재,
이제 그의 건물이 있는 합정을 향해 차를 출발 시켰다.
* * *
두 사람은 민재가 가지고 있는 여덟 개의 건물 중 하나가 있는 합정동에 도착했다.
“우와, 여기 건물에는 모두 식당만 있네요?”
차에서 내린 시은이 민재의 건물에 있는 식당 간판들을 구경하며 말했다.
“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홍대거리로 연결되지요? 데이트하는 커플들이 홍대거리 들어가기 전에 식사하고 들어가기 딱 좋은 목에 위치한 건물이라 식당하시는 분들에게만 세를 내어드리고 있어요.”
“그런 걸 다 계산하시고 세를 주시는 거에요?”
“그렇죠. 서로 잘 맞지 않는 업종의 분들에게 모두 세를 내어 드렸다가는 분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서로 맞지 않는 업종이요? 예를 들면 어떤 거요?”
“가령 예를 들어, 내 건물 4층에 독서실 하시는 분한테 세를 내어드렸는데, 유도 도장 하시겠다는 분이 찾아오셔서 자신이 이 건물 5층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세를 내어드려야 할까요, 내어 드리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될 거 같아요! 유도라면 사람 들어서 던지고 넘어뜨리고 할 텐데, 그럼 그 소리가 밑에 층까지 쿵쿵 거리고 울릴 거잖아요? 게다가 밑에 층이 독서실이면 더더욱 세를 내어주면 안 되겠죠.”
“맞아요. 그래서 지금 이 건물을 주로 어떤 용도로 임대를 할 것인가, 그리고 새로 들어오게 될 임차인들이 기존에 들어와 계신 분들과 세부 업종이 겹치지 않는가도 잘 살펴야 하지요.”
“같은 업종도 안 된다구요?”
“이 건물처럼 식당만 들어와 있는 건물에 1층에 중국집이 들어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마침 2층이 공실이 되었는데 또 다른 중국집 사업 하시는 분이 임대해 들어오고 싶어 하는 상황이에요. 시은씨가 건물주라면 1층에 중국집 하시는 분이 계신데 2층에 또 중국집 하시겠다는 사장님께 임대를 드리고 싶으세요?”
“그것도 그러면 안 될 거 같아요. 이미 1층에서 중국집을 하시는 분이 그걸 아시면 상당히 싫어하실 수도 있으니까.”
“맞아요. 저는 이게 건물주가 임차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내가 월세 더 받으려고 내 건물에서 장사하고 계신 분들께 피해가 가거나 마음의 상처를 드릴 수 있는 결정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그게 건물주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거지요.”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정말 건물주도 아무나 하면 안 될 거 같아요. 전에 뉴스에서 보니까 임차인이 자신의 건물에서 음식 장사를 해서 대박을 내니까 건물주가 임차인 내쫓고 자기가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한 것과 똑같은 음식 장사해서 돈 벌고 있다는 양심 없는 건물주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민재씨는 정말 천사네요!”
“사람은 천사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거 같아요. 참, 천사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오늘 우리가 점심 먹기로 한 이 건물 돈까스집 사장님 부부가 정말 천사같이 착하신 분들이거든요? 그럼 저랑 같이 그분들 뵈러 들어가실까요?”
“그럴까요?”
시은이 웃으며 민재의 팔짱을 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위이이이이이잉~
그녀의 핸드백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진동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시만요.”
핸드백에서 폰을 꺼내 발신번호를 확인하는 시은,
“어머, 이건 매장 제너럴 매니저님 전화인데? 민재씨 잠깐만요!”
시은은 잠시 그에게서 떨어져 조용한데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민재는 건물 앞에 서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의 통화가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표정은 멀리서 봐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 * *
시은은 그 다음날 바로 매장 제너럴 매니저와 함께 루이XX 한국지사로 소환 당했다.
소환 이유는 시은과 같은 매장에서 일하던 직원 누군가가 시은이 자신들의 매장 고객인 민재와 밖에서 사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
아마도 그들은 두 사람이 청담 스시OOO을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매장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 주변에 다른 식당들도 많이 있었고 말이다.
시은은 한국지사 담당자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으로 고객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지, 금전 등을 목적으로 일부러 고객을 유혹하려 한 것은 아닌지 추궁 당했다고 한다.
명품 브랜드 회사들의 경우 직원들이 고객들을 사적으로 만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랬다가는 오랫동안 쌓아올린 브랜드의 가치와 평판이 한 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지사 담당자들의 조치는 상당히 단호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시은이 사심이 있어서 고객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고 계속 루이XX에서 근무하고 싶다면 제주도 공항 면세점 안에 있는 매장으로 당장 전출 갈 것을 지시했다.
만일 전출을 가지 않고 이대로 퇴사를 하게 된다면 시은은 그들의 예상대로 부정한 목적을 가지고 고객에게 접근을 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브랜드 이미지 실추와 브랜드 전체 직원들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명목으로 본사로부터 민사소송까지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어야만 했다.
짧은 시간 심각한 고민을 해야 했던 시은은 결국,
한국지사의 지시대로 제주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제주도로 떠나는 날,
민재는 시은을 배웅하기 위해 그녀를 공항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제주도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시은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민재씨와 함께 좋은 꿈을 계속 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꿈에서 너무 일찍 깨어버린 것 같네요.”
민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주도 안 가고, 그냥 퇴사 하면 안 돼요?”
시은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랬다가는 난 고객을 유혹한 꽃뱀 밖에는 안 되는 사람이 될 거예요. 민재씨도 내가 그런 소리 들으며 살길 원하지는 않으시겠죠?”
“하지만 우리......”
민재도 살짝 목이 메일 뻔 했다.
“분명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었잖아요?”
“맞아요. 저도 민재씨 너무 사랑했어요. 지금도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구요. 하지만 저도 이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 들어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몰라도 그건, 제게 꿈이었거든요. 저도 민재씨와 계속 함께 하고 싶었지만, 꽃뱀 취급당하면서까지 제 꿈을 내려놓고 싶지 않아요.”
시은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였다.
“민재씨한테 너무 미안해서, 나 기다려 달라는 말은 안 할게요. 대신 제주도 내려오실 때 꼭 연락 주시고 제 얼굴 보러 와 주세요. 전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시은씨......”
민재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시은은 그의 품에서 결국 울음을 터드리고 말았다.
“나도 가기 싫은데...... 나도 민재씨랑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그래도 날...... 제발 날 이해해주세요...... 미안해요, 민재씨....... 내가 정말 미안해요.......”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오랫동안 함께 눈물을 흘렸다.
* * *
그렇게 시은이 탄 비행기가 이륙하고,
이를 바라보는 민재는 형언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이제 겨우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려는 줄 알았는데......’
민재는 긴 한 숨을 토해내며,
쓸쓸히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공항 주차장으로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