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일본에서 온 그녀 (2)
일본에서 온 그녀 (2)
제주도 흑돼지 삼겹살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민재와 덕환은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일본 어느 지방에서 아이돌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일본의 연예계는 우리나라와 조금 차이가 있었는데, 아이돌이라고 해서 무조건 처음부터 전국구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소극장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가 인기를 얻으면 도쿄로 진출해 공중파 방송에 출연하며 연예인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덕환이 아이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까지 아이돌 생활을 하신 거예요?”
“열여덟 살 때까지요.”
“아이돌 생활을 그만 두신 계기가 있으셨던 거예요?”
“한국 연예계는 어떨지 잘 모르지만 일본 연예계는 상상 이상으로 안 좋은 일이 많아요. 특히 여자 연예인들에게는 안 좋은 일들이 더더욱 많은 편이구요. 일본 연예계는 아직도 대부분이 방송하고 연예기획사가 야쿠자나 폭력 조직들하고 연계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가 있던 아이돌 그룹 연예 기획사 역시 폭력 조직이 관리하는 회사였던 거죠. 그걸 알게 된 후 간신히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었어요.”
“그럼 처음에 아이돌 할 때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던 거군요?”
“네, 하나도 몰랐죠. 그냥 연예인 아이돌 좋아서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그런 일에 폭력 조직이 관계되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아예 발도 들여 놓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 아이돌 그만 두고 바로 한국으로 오신 거예요?”
“아니요. 제가 원래 있던 기획사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퍼지니까 다른 기획사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도 그때는 연예인을 완전히 그만 두려는 생각이 아니어서 다른 기획사와 계약하고 잠시 그라비아 일을 했었지요. 그런데 그라비아는 원래 일본 여자 연예인이면 누구나 다 하는 일이거든요? 경쟁은 엄청 치열한데에 비해 수익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일을 하는 데 회의감이 많이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하던 일 모두 그만두고 평소 좋아하던 한국을 배우기 위해 이렇게 오게 된 거예요.”
그녀의 말에 덕환은 옆에 앉은 민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거봐, 그라비아는 일본 여자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거래잖아? 그라비아가 무슨 야동이야?’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손바닥 위에 상추와 깻잎을 올리고 잘 구워진 삼겹살에 쌈장을 듬뿍 찍고 마늘과 고추, 김치까지 올려 야무지게 한 쌈을 싸서 입속으로 쏙 입어 넣고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 중이었다.
민재는 외국인이 우리나라 음식을 이렇게 맛있게 먹는 모습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오셔서 삼겹살 많이 드셔보셨나 봐요? 쌈을 싸는 게 보통 솜씨는 아니신데요?”
민재의 말에 아이는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삼겹살 많이 좋아했어요. 일본에도 한국인들이 하는 삼겹살 가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 파는 삼겹살이 일본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는 거 같아요!”
이제야 알았느냐, 한국 돼지의 참맛을? 일본 돼지를 쳐 바르는 한국 돼지의 압도적인 맛!
민재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삼겹살 말고도 한국 음식 좋아하는 거 있으세요?”
“냉면도 좋아하고, 짜장면도 좋아하고, 감자탕이랑 부대찌개도 좋아하고, 치킨, 떡볶이도 좋아하고...... 한국 음식들 많이 좋아해요!”
이렇게 말하며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뜨고 활짝 웃음 짓는 아이,
민재는 그 모습에 살짝 마음이 설렐 뻔 했다.
덕환이 말을 받았다.
“그래도 한국 음식들 중에서 먹기 힘들거나 부담스러운 건 없으세요?”
“어학당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다들 청국장하고 홍어는 먹기 힘들다고 하던데, 저는 아직 그거는 못 먹어 봐서요. 아직 그런 음식은 없는 거 같아요. BJ님은 먹기 싫은 음식 같은 거 있으세요?”
“저는 요새 욕이 먹기 싫어지더라구요. 얼마 전에 한국 근현대사 컨텐츠 만들었다가 10년간 먹을 욕을 한꺼번에 다 먹어서...... 아주 그냥 기대수명이 200년까지 늘어난 기분이에요.”
“에? 욕도 음식이에요? 욕이란 이름을 가진 음식이 있는 거예요? 그거 먹으면 수명이 늘어나요?”
한국말은 다 알아듣고 곧 잘 하는 거 같기는 한데, 아직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가 되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덕환의 저런 쓰레기 같은 개그까지 이해하려면 또 다른 소프트웨어가 추가적으로 필요할지도......
* * *
식사를 다 한 그들은 민재의 건물 5층에 있는 덕환의 스튜디오로 올라가 사전 미팅을 가졌다.
그곳은 다른 층과는 달리 지붕 안에 있는 다락방 형태의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남쪽을 향해 커다란 창문이 달려 있어 채광이 무척 좋은데다가 테라스도 있어서 밖으로도 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안에는 덕환이 업무를 보는 자리와 회의용 테이블, 의자, 손님을 맞이하는 소파들이 놓여 있었고, 그 너머로 촬영이 이루어지는 세트와 조명 기구, 카메라들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촬영 내용에 대해 의견을 나눈 세 사람은 내일부터 바로 촬영에 들어가기로 합의하고 1시간 만에 미팅을 종료했다.
덕환이 민재와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내일 시간 맞춰 오고 먼저 들어가. 난 직원들하고 지난 번 영상들 편집하는 거 때문에 좀 더 있다가 나가야 할 거 같으니까. 아이짱도 수고했어요, 그럼 내일 뵈요~!”
“그래 알았어, 수고~”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뵈요~!”
민재와 아이는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Y대 어학당 다니시면 신촌 근처 사세요?”
“네, 맞아요.”
“기숙사?”
“아니요, 신청했는데 안 되서 주변에 방 구해서 혼자 살고 있어요.”
“집에 까지 어떻게 가세요?”
“올 때 버스 두 번 갈아타고 왔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가려구요.”
차로 가면 압구정에서 신촌까지 30분 정도 걸리지만, 버스를 타고가면 모르긴 몰라도 1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저 차 가지고 왔는데, 태워다 드릴게요.”
“아뇨, 괜찮아요. 처음 뵙는 분께 폐 끼칠 수는 없죠.”
이게 바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생각 차이인가? 한국인들은 보통 이런 상황에서 신세 진다고 생각할 텐데, 일본인들은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집까지 바래다 드리는 건 좀 그럴 것 같으니까, 그냥 그 근처까지만 바래다 드릴게요.”
“아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미소 지었다.
‘아노? 아노가 일본말로 무슨 뜻이었지? 이따가 한 번 찾아봐야겠다.’
민재는 아이를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그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빨간색 페라리 F8 트리뷰토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아이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선생님 차예요?”
민재는 만화처럼 이마에 세로로 주름이 생길 뻔 했다.
‘선생님은 무슨, 내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선생님 소리를 듣냐?’
민재는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석으로 와 앉으며 말했다.
“네, 제 차죠.”
“와, 선생님 엄청 부자이신가보네요.”
엄청 부자는 맞지, 이 차가 주차되어 있는 이 건물도 민재꺼니까.
그래도 민재는 선생님, 이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민재는 주차장에서 차를 뒤로 뺀 후 차에서 내려 바리케이드를 다시 설치하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신촌을 향해 출발하며 말했다.
“어...... 제가 아직 선생님이란 말을 들을 나이는 아닌데...... 저 이제 겨우 20대 중반이에요.”
“어머, 그러셨군요, 죄송해요...... 아노...... 제가 선생님을 뭐라 부를지 몰라서, 그래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폐를 끼치고 말았네요.”
“역시 이래서 처음 만났을 때 호칭 정리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네요. 저는 앞으로 덕환이처럼 아이짱, 이라고 부를게요. 아이짱은 저한테 민재씨 아니면 민재상이라고 불러주세요.”
“민재씨, 민재씨가 좋을 거 같아요. 여기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니까, 민재상이라고 부르면 조금 이상할 거 같아요.”
“네, 그럼 앞으로 민재씨라고 불러주세요, 아이짱.”
“네, 민재씨~!”
두 사람은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해보니 아이는 연예인 생활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수더분하고 소탈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반면에 외모는 ‘이 사람 진짜 연예인 맞구나’ 싶을 정도로 빛이 나게 아름다웠는데,
아직 스무 살 초반의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동안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반비례되는 그녀의 몸매는 단정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도 모두 가려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육감적이었다.
‘그라비아 모델이 수영복이나 속옷 입고 화보 찍는 일이라 했지? 그런 모델 일 계속 했었어도 엄청 성공할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민재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아이의 몸매는 정말 엄청났다.
특히 민재의 차를 타고 상체에 안전벨트를 매면서 그녀의 옷이 안전벨트에 살짝 눌리게 되었는데,
그로인해 그녀의 옆모습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도대체 가슴 사이즈가 얼마나 큰 것인지,
어우야......
민재는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신경 쓰여서 조수석 쪽 사이드미러로 눈을 돌리기도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도착한 신촌,
원래는 신촌역 근처까지만 태워다 주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 앞까지 오게 되었다.
“잘 들어가요, 내일 뵈요.”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이가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아이짜응~!”
원룸의 현관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차 안까지 들려왔다.
민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곳에 웬 일본 애니 오따구처럼 생긴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더벅머리 학생이 꽃다발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