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일본에서 온 그녀 (3)
일본에서 온 그녀 (3)
‘아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민재는 지금 차창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더벅머리 학생은 아이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무턱대고 그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짜응~! 일본에서 아이돌 했을 때부터 팬이었어요오~! 그라비아 사진집도 모두 일본에서 직구로 구입했구요오~!”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오시면 안 돼요......”
“아이짜응~! 사랑해요오~! 아이시떼루요오~! 그러니까 한 번만 만나주세요오옹~!”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계속 그를 지나쳐 원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뿔테 안경 학생은 아이가 원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공용현관문 앞을 막고 서서 그녀에게 계속 꽃다발을 내밀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보고 들어도 상황 파악 클리어.
민재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일단 차부터 가까운 곳에 주차시키기로 했다.
‘아...... 이게 무슨 ㅂㅅ 같은 시추에이션이야....... 그런데 저 사람, 한국에도 저런 사생팬이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 유명한 연예인이었나? 어쩌면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민재는 서둘러 자신의 페라리를 원룸 옆 한적한 곳에 파킹하고는 아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이, 무슨 일이에요?”
민재는 아이에게 다가오려는 뿔테 안경 학생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마치 달려드는 사생팬으로부터 연예인을 보호하는 경호원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뿔테 안경 학생은 아이가 타고 온 차에서 내린 남자가 그녀에게 달려온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다.
“아이짱, 이 사람 누구......”
이 때, 갑자기 아이가 민재의 팔짱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빠~! 이상한 분이 자꾸 집에 못 들어가게 막으셔, 어떡해~!”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애교 섞인 ‘오빠~!’ 소리에 민재의 간장도 함께 녹아내릴 뻔 했다.
거기에 자신의 팔뚝에 꾸욱 눌려오는 그녀의 엄청난 가슴살들......
아......!
민재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적이 당황했지만, 민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그녀의 연기를 받아 주었다.
“여기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가보네? 아이, 들어가자. 거 앞에 좀 지나갑시다! 왜 길을 막고 그래요?!”
185cm의 키에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민재가 몸으로 밀고 들어오자 뿔테 안경 학생은,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에...... 아이짜응.......! 아이짜응.......!”
민재에게 옆으로 밀려 온몸을 부들부들 거리며,
자신을 지나쳐가는 아이를 향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이가 원룸 공용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사이, 민재는 뿔테 안경 학생이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그 앞을 단단히 막아섰다.
공용현관의 자동문이 열리고 아이가 안으로 뛰어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마구 연타했다.
민재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뿔테 안경 학생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여전히 그의 앞을 굳게 막고 서 있는 중이었다.
“당신이 뭔데 나를 막아? 당신 아이짜응 하고 무슨 사이야!”
뿔테 안경 학생은 자신 보다 덩치 큰 민재에게 감히 손도 못 대고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며 진상을 부리고 있었다.
“야, 보면 모르겠냐?”
민재는 그를 향해 살짝 미소 짓고는, 자동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민재가 엘리베이터에 타자 아이는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밖에 있는 뿔테 안경 학생 보란 듯이 다시 그와 팔짱을 끼었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7층 버튼이 눌려져 있었다. 그녀가 사는 곳이 7층이었던 것이다.
민재는 바로 3, 4, 5, 6, 8, 9...... 모든 층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밖에 저 친구, 몇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는지 보고 다음번에는 집 앞까지 따라올 수도 있어요. 이렇게 하면 아이짱이 몇 층에서 내리는지 모를 거예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민재씨.”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의 팔짱을 꼬옥 끼고 있는 민재,
여전히 그의 팔뚝이 부드럽고 물컹한 그녀의 가슴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중이었다.
민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아이짱, 저 친구 뭐죠? 아이짱 팬 같아 보이는데?”
“네, 제 팬이라고 한 번만 만나달라고 막 쫓아다니는 분이세요. 도대체 제 집은 어떻게 안 건지, 얼마 전부터 집 앞에서 저러고 기다리고 계시더라구요.”
“팬이 아니라 스토커인가 보네요. 요즘에 저러다가는 전과 생길수도 있는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세상물정도 잘 모르는 친구인가 보네요.”
“한국에서는 이렇게 따라다녀도 전과 생길 수 있어요?”
“아이짱이 증거가지고 경찰에 신고하면요. 저런 사람들은 그냥 두면 나중 더 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어서 조심해야 해요.”
“한국에 오면 저 알아보는 사람 없어서 이런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저런 사람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럼 일본에서도 따라다니는 사람들 많았나보네요? 하긴, 일본에서 연예인 활동 하셨으니 팬들도 많으셨겠지요.”
“팬이 아주 많지는 않았는데 쫓아오시거나 연락처 알아내서 문자하고 전화하시는 분들은 좀 많았어요. 그것 때문에 숙소 밖으로도 잘 못나가고 전화번호도 수시로 바꿔야 했구요.”
민재는 예전 시은을 만나기 전 어떤 명품 매장 직원이 자신에게 사적으로 전화하고 문자하며 귀찮게 굴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럴 때 스트레스는 정말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겠지요.”
“네, 맞아요. 집 앞에 편의점에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부터가 너무 스트레스 받아요.”
민재가 엘리베이터 모든 층의 버튼을 눌러 놓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매 층마다 문이 열리며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7층 도착.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때까지도 아이는 민재의 팔뚝을 거의 끌어안듯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원룸 703호 앞에 도착한 두 사람.
그곳이 그녀의 집이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난 여기 복도에 좀 있다가 아까 그 친구 사라졌다 싶으면 내려갈 테니까.”
그러자 아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팔뚝에 가슴을 꼬옥 밀착하고 말이다.
“여기 복도에서 기다리지 마시고, 저희 집에 들어가셔서 차 한 잔 하고 가실래요?”
분명 그녀는 차 한 잔 하고 가라는데, 왜 표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라면 먹고 갈래? 같은 거지......?
민재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아뇨, 그래도 어떻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오늘 저 집까지 차도 태워 주시고 위험할 때 도와주시기도 하셨는데 차도 한 잔 대접해 드리지 못하고 그냥 보내드리는 건...... 일본에서는 이러면 상당한 실례로 여겨요.”
그거 진짜야? 일본에서는 차 태워주고 자기 도와준 사람한테 차 한 잔 안주고 그냥 보내면 정말 실례인 게 사실이야?
민재가 살짝 당황하는 사이, 아이는 재빨리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는 그의 팔짱을 끼고 거의 반강제적으로 집안으로 데리고 가고 있었다.
“빨리 들어 와요오~”
“아, 저기, 아이? 아이짱? 저, 저기 그래도 이건.......”
“괜찮으니까 어서 들어와요오~!”
결국 현관문이 닫히고,
185cm의 키에 조각 같은 근육을 가지고 무에타이와 각종 운동을 섭렵한 건장한 체구의 이 총각은,
160cm의 키에 귀엽고 아름다운 일본인 아가씨에게 완전히 제압당해 집안으로 끌려들어 와 버렸다.
* * *
그녀의 집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반적인 형태의 원룸이었다.
현관 옆에는 빌트인 냉장고부터 세탁기, 하이라이트, 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들이 놓여 있었고,
붙박이장 옆으로도 2단 행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많은 양의 옷들이 빼곡히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신발장과 현관 앞에도 그녀의 구두와 신발들이 상당히 많이 놓여 있었다.
‘모델 출신답게 옷하고 신발들이 상당히 많은 모양이네? 정말 한국에 오래 있으려고 일본에 있는 짐 거의 다 가지고 온 모양이구나.’
민재는 아이가 내준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이가 주방에서 주전자에 물을 담아 하이라이트에 올려놓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차, 어떤 거로 드릴까요?”
“차, 뭐뭐 있는데요?”
“커피하고 녹차 있어요.”
커피하고 녹차...... 설마 한국인들이 먹는 거랑 똑같은 맥ㅅ 이나 ㅅ록차 이런 거는 아니겠지...... 적어도 일본에서 가져온 차를 주겠지...... 혹시 녹차 달라고 하면 일본식 말차를 줄지도 몰라...... 일본 사람이니까 전통 다도를 보여줄지도 모르고......
이런 생각에 민재는,
“녹차로 부탁드릴게요.”
라고 말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고 말하며 활짝 웃는 아이.
볼수록 웃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물이 끓자 그녀는 선반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찾더니, 미리 준비한 찻잔에 담는 것이 아닌가.
그 때, 민재는 그녀가 찻잔에 담는 것을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국산 ㅅ록차 티백을 말이다.
‘아...... 일본인도 우리 ㅅ록차 애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나......?’
일본인을 만나서 그런지, 오늘따라 계속 이마에 일본 만화처럼 세로로 주름살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